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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톡과 정 사이

스몰톡은 시작, 정은 여운

by Susie 방글이


한국과 미국, 두 문화 사이를 오가며 늘 느끼는 게 있다.

같은 사람 사는 세상인데,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참 다르다는 것.


미국에서는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스몰톡(small talk)이 오간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카페 줄을 서면서, 동네 마트에서 계산을 기다리면서 "오늘 날씨 참 좋네요", "커피 맛있어 보여요" 같은 가벼운 인사를 나눈다.


서로 얼굴을 마주치면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눈 마주치면 짓는 미소와 짧은 말 한마디가 묘하게 기분을 풀어준다.


얼마 전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재채기를 하셨다. 습관적으로 "Bless you"라고 했더니, 그분이 갑자기 활짝 웃으면서 "Oh, thank you so much! You made my day!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하루가 더 행복해졌네요)라고 하셨다.


순간 내가 세상을 구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그걸로 우리 둘 다 웃을 수 있었다. 서로 좋은 하루 보내라며 인사를 나누고 흐뭇한 마음으로 쇼핑을 마쳤다.



이렇게 미국에는 Bless you (이 말의 기원은 6세기경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처럼 한국에는 없는 재미있는 표현들이 꽤 있다. 미국에는 있는 표현들이 한국에 없는 표현들이 있고, 반대로 한국에는 있는데 미국에는 없는 표현들이 있다. 다음 기회에 따로 모아서 한 번 정리해 볼 생각이다.

(말 나온 김에 조만간 한 번 써야겠다)


반면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조심스럽고, 지하철에서 옆자리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은 드물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미국에 없는 특별한 것이 있다.


처음엔 무심한 듯해 보여도, 마음이 한번 열리면 그 안에 깊고 따뜻한 온기가 흐른다.


바로 정이다.


지난겨울, 12년 만에 한국을 찾았을 때 그걸 새삼 느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예전 한국에 살 때 자주 가던 동태탕집이었다. 미국에 사는 내내 그 맛이 그리워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직행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왁자한 분위기와 익숙한 냄새, 그리고 맛이 그대로였다. 국물 한 숟갈에 12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정말 너무 맛있게 먹고,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가니 식당 사장님이 계셨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예전에 자주 찾던 곳이라 사장님 얼굴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너무 먹고 싶어서 12년 만에 공항에서 바로 왔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사장님께서 "아이고, 세상에!" 하시며 너무 기뻐하시고, 결국 음식값을 받지 않으셨다. 오히려 본인이 기분이 더 좋다고 하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우리는 고맙고 민망해서 연신 인사를 하며 식당을 나왔다. 그런 따뜻하고 유쾌한 정... 참 한국스러웠다. 그리웠다.



우리는 재래시장에도 자주 나갔다. 활기찬 인파와 군것질 냄새, 상인들의 정겨운 목소리가 참 좋았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덤으로 주는 손길. 사람 사는 세상이다.


시장을 구경하던 중, 어느 목공 노점상 앞을 지나가다 딸과 그 가게 주인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딸은 늘 하던 대로 아저씨에게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을 본 아저씨는 갑자기 "아, 그 어색한 미소 좋았어 방금!"이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아저씨는 딸이 미소를 지어줬던 게 어찌나 좋으셨는지, 우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우리가 아저씨가 만든 나무 작품에 관심을 보이며, 남편이 목공을 취미로 한다는 말에 둘은 금세 통하는 사이가 됐다. “이건 올리브 나무로 만들었고, 어쩌고 저쩌고” 하며 ㅎ

(다음엔 남편의 목공취미를 글로 소개해야겠다)


아저씨는 결국 우리를 본인의 목공작업실 안으로까지 초대해, 자신이 만든 작품들을 자랑스레 보여주셨다. 남편은 목공 기구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게 있으면 나도 만들 수 있는데” 라며. 미국에서는 목공구가 워낙 고가라 아마추어 목수가 모든 공구를 갖추기란 쉽지 않다.



다 구경한 뒤 작업실을 나오기 전 딸에게 직접 만든 나무 물컵, 일명 쿡사(Kuksa)를 선물로 주셨다.


"오늘 아침부터 이렇게 단란한 가족 덕분에 기분이 참 좋네."라고 하시며.


인사를 하고 떠나는 딸을 보며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색하게라도 미소 지어주는 사람 요즘 없어, 귀한 거야 그거."라고 하시는데, 괜히 딸은 미국에서 스몰톡으로 쌓은 스킬이 한국에서도 통하는구나 싶었다고 한다.


딸은 그 나무 물컵을 방에 걸어두고, 지금도 그날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날 그 시장 골목에서, 미국의 스몰톡 문화와 한국의 정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따뜻한 해프닝이었다. 딸의 가벼운 미소가 인연이 되고, 낯선 아저씨와 정겨운 시간을 나누며, 따뜻한 마음이 오갔다. 세상 어디나 사람 사는 마음은 비슷하구나 싶었던 순간.


두 문화는 참 다르다.


한쪽은 가볍게 웃으며 스쳐가는 인사 속에 따뜻함이 있고, 다른 한쪽은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지만, 한번 열리면 깊은 정이 흐른다. 어쩌면 이 두 가지를 모두 품고 살 수 있다면, 사람 사는 세상이 조금 더 포근해지지 않을까 싶다.


허리는 꺾일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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