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도시는 늘 남편 먼저
남편은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 갔다. 나는 못 갔다. 이런 일은 매 번 생긴다. 멋진 도시는 대체로 남편이 먼저 간다. 다큐멘터리 촬영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달고.
나는 그 사실을 이해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좋은 데는 혼자만 간다니까.'
그가 다녀온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옛 수도이자 음악과 예술의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의 도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자연스럽게 자라난 도시라기보다, 누군가의 강한 의지로 만들어진 도시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가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와, 바다로 나가는 창 같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결심하며 세운 곳이다.
늪지와 강이 뒤섞인 북쪽의 거친 땅 위에 궁전과 운하, 넓은 거리가 차례로 놓였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의 풍경은 어딘가 러시아 같으면서도 러시아 같지 않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건물들과 넓게 뻗은 거리를 보고 있으면 북쪽 어딘가 유럽 도시를 걷는 기분이 든다.
나는 화면 속에서 네바 강(Neva River)을 바라보았다. 강 위에는 북쪽 특유의 흐린 빛이 떠 있었고, 돌로 된 강변과 오래된 건물들이 그 빛을 조용히 받아내고 있었다.
북쪽의 도시는 빛도 조금 다르다. 강하고 화려하기보다는 오래 머무는 빛이다. 그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음악이 떠오른다. 어떤 도시는 건물보다 먼저 소리로 기억되는 것 같다.
나는 화면 속 도시를 바라보며 잠시 멈췄다. 이곳에서 수많은 음악이 태어났겠지. 그리고 그 중심에는 차이콥스키가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떠올리며, 나는 그의 음악이 왜 특별한지 다시 생각했다. 러시아 작곡가이지만 그의 음악은 아주 러시아답지만은 않다.
선율은 유럽처럼 우아하고, 감정은 러시아처럼 깊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갑자기 따뜻한 불빛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음악이다. 그는 작품에서 직접 경험한 개인적 감정과 가족사, 문학 작품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예를 들어 '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에서는 여동생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에서 감정을 얻었다. 발레 '백조의 호수' (Swan Lake)와 '호두까기 인형' 같은 음악은 우아하고 아름답고, 어딘가 러시아의 겨울 공기 같은 음악이다.
연출자의 눈으로 계획하고 본 장면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방송 화면 속에서 그가 어떻게 다녔을지 상상했다. 촬영 중 남편은 차이콥스키가 실제 사용했던 피아노 앞에도 섰다고 했다.
그가 건반을 손으로 눌러보며 음을 확인하고, 직접 그린 악보를 들여다보는 순간, 마치 작곡가의 숨결과 감정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고 했다. 짧게 지나가는 화면 속에서도, 나는 그 장면에서 그의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만약 내가 이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물론 차이콥스키처럼 음악적 영감을 받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악기 하나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도시라면 내 상상력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운하와 강, 오래된 건물과 북쪽의 흐린 빛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악보 대신 공책을 펼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운이 좋았다면 J. K. 롤링 (J. K. Rowling) 같은 작가가 되었을까. 물론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요즘 들어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어릴 때 악기 하나 배워둘 걸 그랬다고. 지금쯤이면 서툴게라도 악기 하나 잡고 차이콥스키의 선율을 흉내 내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악기 대신 글을 쓴다. 음표 대신 문장을 놓고, 멜로디 대신 이야기를 이어 붙인다. 그래서 다시 상상해 본다. 만약 내가 이 도시에서 살았다면,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었을까.
그가 다녀온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방송이라는 시스템이 얼마나 촘촘히 계획되어 있는지도 떠올렸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장면을 담아야 하므로, 일단 많이 찍어야 한다. 비록 편집 과정에서 방송에 나오지 않을 장면도 많지만, 그 모든 순간을 우선 기록해야 한다.
남편이 촬영을 위해 바라본 장면과, 내가 방송으로 본 풍경은 얼마나 다를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딜 가든 짧게 이동하며 장면을 담아야 했으니, 그곳의 감동을 천천히 느끼기에는 마음이 조금 바빴을지도 모른다.
그는 도시를 며칠 동안 찍었다. 아마도 꽤 열심히.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그는 그 도시를 촬영했을 뿐이고,
나는 그 도시를 상상했다.
어쩌면 상상 속에서 나는 그곳을 조금 더 오래 걸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늘 그런 말을 한다. 자기가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다녀온 곳들을 나와 딸을 데리고 다시 가보고 싶다고. 촬영할 때는 늘 바쁘게 지나가지만, 언젠가는 천천히 다시 걸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하나씩 차근차근 가보자고.
정말 그러면 좋겠다.
그 많은 도시들 중에서도 나는 이곳은 꼭 가보고 싶다. 차이콥스키가 살았던 도시, 그가 음악을 남긴 도시. 생각해 보면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지 않는가. 차이콥스키.
그 도시의 공기 속에서 그의 음악이 태어난 순간을, 그 풍경 속에서 느껴보고 싶다.
언젠가는 남편과 함께 걸어보고 싶다. 이번에는 촬영 없이, 그냥 여행으로. 그리고, 딸도 끼워주자.
그때는 더 이상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