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간차로 동거 중이다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에 잠깐 눈이 뜬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다. 습관처럼 시계를 본다.
새벽 3시 30분.
아, 이제 들어왔구나. 나에게는 한밤중이지만 남편에게는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다.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반대로 저녁이 되면 상황은 뒤집힌다. 같이 TV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겨우 버티다가 시계를 보면 밤 10시쯤이다. 그걸 보는 남편이 늘 같은 말을 한다.
"졸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이미 내 눈은 전원 종료 직전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부부의 생활은 꽤 단순하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고 남편은 완벽한 올빼미다. 내가 하루를 시작할 때 그는 여전히 어제에 머무르며, 내가 잠들 때 그는 슬슬 그만의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하루는 묘하게 교대 근무처럼 돌아간다.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같은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산다. 그렇게 오래 같이 살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잠깐만, 나 혼자 있고 싶다.'
그런데 이 말은 사랑이 식어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 사랑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연애할 때는 하루라도 못 보면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하루 종일 보면 조금 덜 보고 싶어진다. 결혼 초에는 같이 있는 시간이 사랑의 증거였는데, 지금은 각자 있는 시간이 평화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젊을 때는 이런 고민을 할 틈도 없다. 각자 직장에 가고 바쁘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집에서는 잠깐 얼굴 보고 하루가 끝난다. 같은 집에 살지만 사실은 출퇴근이라는 장치 덕분에 자연스럽게 적당한 거리가 생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서서히 달라진다. 현업에서 조금씩 물러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서로를 마주하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많아진다.
처음에는 좋다.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TV도 본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 종일 이 사람과 함께라니, 조금 낯설다.'
사랑과 거리는 가끔 묘한 관계다. 부부 사이에도 환기가 필요한데, 가끔은 창문이 없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해결책이 있다.
생활 패턴의 시차다.
사실 이 생활 패턴은 남편의 직업 덕분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일을 하다 보니 촬영하고 밤새 편집하는 날이 많았고, 몸이 자연스럽게 밤에 맞춰졌다. 그렇게 생긴 생활 리듬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혼 초에는 몰랐다. 부부에게 필요한 것이 항상 함께 있는 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래 살다 보니 다른 것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서로에게 조금 비켜서 있는 시간 말이다.
아침에는 내가 집을 쓴다. 커피를 내리고, 글을 구상하고, 글을 쓴다. 책을 읽다가 빼꼼과 아침 산책을 다녀오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브런치에 달린 댓글을 읽으며 답글을 쓰는 시간도 그때 갖는다.
남편은 밤이 되면 정치 뉴스뿐 아니라 이런저런 뉴스를 챙겨보고, 주식 공부도 한다. 요즘은 특히 AI에 관심이 많아 밤늦도록 이것저것 들여다보곤 한다. 내 취향이 아닌 영화를 보거나 좋아하는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가끔은 작업실에서 목공의 디테일을 다듬으며 그만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서로 취향과 리듬이 달라도 각자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낮이 되면 함께 있어도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더 편안하다. 오래 함께 살아본 부부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서로의 리듬과 취향을 존중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함께 있을 때 더 즐겁고 건강하게 만드는 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같은 집에 살지만 같은 시간에 살지는 않는다. 같이 살지만 적당히 떨어져 산다. 일종의 시간차 동거라고 할까.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의 생활 방식은 꽤 다양했다. 남편이 한창 바쁠 때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기러기 아빠 시절도 있었다. 어떤 때는 주말 부부처럼 지낸 적도 있었다. 떨어져 살기도 하고, 주말에만 만나기도 하고, 이제는 다시 같은 집에 살면서 시간차로 산다.
기러기 부부, 주말 부부, 그리고 지금은 시간차 부부.
이쯤 되면 거의 부부 생활 풀코스다. 다음 코스가 또 남아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결혼 30년쯤 지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부부가 오래 잘 지내는 비결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같이 사는 기술보다
가끔 안 보이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
남편이 새벽에 들어와도, 내가 초저녁에 잠들어도,
우리는 서로 '잘 살고 있구나'를 확인한다.
말은 안 해도, 시계와 생활 패턴으로 서로를 느낀다.
이게 바로 우리 부부의 리듬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는 아마 꿈속에서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