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으로 버티는 나
코로나 초창기, 점심시간을 쪼개 마트에 들렀다. 진열대는 텅 비었고, 휴지 코너엔 '품절' 팻말만 덩그러니.
긴 줄 끝에서 누군가 "휴지 언제 들어오냐!" 소리쳤지만, 직원은 지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내 앞의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화장지 묶음을 들고 있었다. 한 아저씨는 12 롤짜리 두 묶음을 끌어안고 보물이라도 찾은 듯 득의양양했다. 하지만 'One Per Person' 사인을 못 본 탓에, 직원의 말에 하나를 내려놓고 씩씩거리며
나갔다. 그 뒷모습이 왠지 처량했다.
"도대체 왜 다들 화장지에 목숨 걸어?"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없으면 물로 씻으면 되잖아…"
같이 간 미국 동료에게 물었다. "왜 휴지에 목숨 걸지?" 그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휴지 없으면 진짜 큰일 나!" 심지어 2겹이냐 3겹이냐를 따지며 휴지의 소중함을 설파했다.
비데가 드문 미국에서, 휴지는 단순한 위생용품이 아니라 생존의 상징이다.
미국인들에게 휴지는 단순한 화장지를 넘어 키친타월, 갑 티슈(클리넥스)로 확장된다. 부엌의 기름때부터 식탁, 심지어 커피를 쏟은 바닥까지, 휴지는 만능 해결사다. 미국 집엔 물걸레 대신 키친타월이 굴러다니는 경우가 흔하고, '일회용'은 편리함의 상징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물이 청결의 핵심이다. 비데가 보편화되며 화장실에서 물로 씻는 습관이 뿌리내렸다. 부엌에선 수세미와 물로 설거지를 하고, 바닥은 물걸레로 닦는다. 코로나 시기 마트에서 물티슈는 바닥났지만, 물 자체는 늘 풍족했다. 한국인에게 물은 위생을 넘어 정서적 안정을 주는 존재다. 물로 시작해 물로 끝나는 청결 문화는 한국 생활의 중심에 있다.
이러한 미국의 휴지 의존은 위기 상황에서 두드러진다. 1973년 오일 쇼크 당시, '투나잇 쇼'에서 던진 '휴지가 동난다'는 농담이 언론의 과장 보도로 화장지 부족 공포를 낳았다. 사재기로 인해 몇 주간 실제 품절 사태가 벌어졌다. 이 트라우마는 위기 때마다 미국인들을 마트의 휴지 코너로 달려가게 한다. 화장지, 키친타월, 클리넥스는 미국인의 생존 도구이자 위기의 상징이다.
휴지 사재기는 '내 집은 내가 지킨다'는 미국의 '개척자 정신'과 연결된다. 코로나 팬데믹에서도 총기와 홈트레이닝 기구가 불티나게 팔렸다. 위기 속에서 개인의 자립과 생존을 우선시하는 미국인의 태도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반면, 한국의 위기 대응은 공동체와 가족 중심의 문화를 반영한다. 코로나 초기에 마스크와 손소독제가 마트와 약국에서 매진됐다. 약국 앞 긴 줄과 ‘마스크 오브제’ 번호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공의식을 보여줬다. 라면, 쌀, 김치는 가족 중심의 식탁을 지켰다. 라면은 국민 생존식이고, 쌀은 '밥심'의 상징이다. IMF 시절 이웃과 쌀을 나눴던 기억은 '밥상만 지키면 살아남는다'는 농경문화의 DNA를 떠올리게 한다. 외출이 줄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밀키트와 홈쿡은 가족과 함께 밥을 나누는 정서를 되살렸다.
결국, 미국은 총기류, 화장지, 홈트레이닝 기구로 '개인 생존'을 챙겼고, 한국은 마스크, 라면, 쌀로 '공동체 식탁'을 지켰다.
집에 전화했다. "우리 집 휴지 떨어졌어?"
남편은 넉넉하다고 했지만, 불안한 군중심리에 물든 나. 왠지 불안해서 휴지 한 묶음을 샀다.
그날 밤, 남편과 위기 상황에서 뭘 챙길지 웃으며 얘기했다.
남편은 물었다. "그럼 당신은 뭘 먼저 챙길 거야?"
고민 끝에 깨달았다. 휴지가 있어도 쌀이 없으면 허기지고, 쌀이 있어도 라면이 없으면 허전하고,
라면이 있어도 휴지가 없으면 찝찝하다.
결국 나는 밥으로 배고픔을 달래고, 라면으로 장기전을 대비하며, 휴지로 위생을 지킨다.
미국의 생존 본능과 한국의 밥심을 버무린 나만의 생존법이다.
이제 우리 집엔 라면 한 박스, 휴지 4 롤, 쌀 2kg이 늘 준비돼 있다.
2025년, 코로나는 끝났지만 미국의 '휴지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캐나다와의 무역 갈등으로 휴지 값이 오를 거란 뉴스가 나오자, 마트 진열대에서 휴지가 또 사라졌다. 미국은 캐나다에서 휴지류를 대량 수입한다. 갈등만 생기면 '또 휴지 끊기는 거 아니야?'라며 마트로 달려가는 미국인들.
1973년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다.
위기는 언제나 마트 진열대에서 먼저 온다. 이 나라는 늘 이유를 찾아 휴지를 산다. 전염병, 눈보라, 무역 갈등.
상황은 바뀌어도 휴지는 생존이고 평정심이다.
하지만 내 카트에는 라면 한 한 박스와 쌀 2kg도 늘 함께다.
..... 그리고 미국에 사는 한, 나와 휴지의 인연은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