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동안이라서요

미국과 한국, 동안에 집착하는 두 나라 이야기

by Susie 방글이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며 문화에 적응했다고 믿었지만, 주류 매장 Fine Wine & Good Spirits에

들어설 때마다 여전히 당황한다. 와인 한 병을 들고 계산대에 서면, 점원이 로봇처럼 묻는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내 나이에도 ‘동안’ 취급을 받는지, 아니면 매뉴얼대로 하는 건지, 늘 웃음이 난다.


"내가 21살 미만으로 보여?"


매장은 웃음바다가 되고, 27살 딸이 늘 어이없다는 듯 농담한다.


"엄마, 또 동안 인증받았네!"


사실 이게 한국이었다면 기분이 살짝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미국에서는 신분증 꺼내는 것이 매번 귀찮다. 어쩔 땐 핸드폰 애플페이만 믿고 지갑을 놓고 맥주를 사러 갔다 다시 집에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내가 사는 주는 나이에 상관없이 ID 바코드를 스캔해서 진짜 신분증임을 확인한다.


미국에서는 아동보호법이 강력해서 21세 미만에게 술을 팔면 점원이 해고당하고 가게가 영업정지될 수 있어, 백발 할머니든 산타클로스 같은 할아버지든 신분증이 필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자료에 따르면, 나이 추정 오류와 차별 논란을 막기 위해 신분증 확인이 표준 절차로 자리 잡았다. 인종과 문화가 다양한 미국에서는 흑인, 히스패닉, 동양인을 막론하고 얼굴만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21살인데 16세로 보이는 사람도, 19살인데 30대처럼 보이는 사람도 흔하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함께하는 거리

한국과는 참 다르다.


한국에선 내 나이에 신분증 보여줄 일이 거의 없다. 대신 ‘동안’이라는 말에 민감하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건 칭찬 이상의 의미다. 10살 어려 보인다는 건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는 의미, 어려 보이네라는 말엔

'괜찮다', '아직 가능성 있다'는 묘한 분위기가 따라온다.


한국에서 살 때 나 역시 피부과를 자주 갔고, 마스크팩과 탄력크림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친구들 모임에서도 "요즘 어디 시술 잘해?", "나 이번에 리프팅했는데 완전 탱탱해졌지?" 같은 대화가 밥 먹듯 오갔다.

한 친구가 “눈 밑 지방을 뺐다”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어머, 괜찮다. 확실히 덜 피곤해 보여”라고 받아주는 분위기다.


이런 문화가 왜 생겼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좁은 사회, 빠른 경제 성장, 그리고 치열한 경쟁. 좋은 대학, 좋은 회사, 좋은 자리. 그걸 위해 치열하게 달려온 세대가 만든 사회다. 취업, 연애, 친구 모임까지 외모는 경쟁력이고, 동안은 아직 경쟁할 수 있는 증표가 된다.


2019년 취업 포털 ‘커리어’’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65%가 외모로 업무 능력을 평가했고, 2017년 인사 담당자 대상 조사에서도 64%가 지원자 외모를 평가에 반영한다고 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동안’이 중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젊어 보일수록, 예뻐 보일수록 더 많은 기회와 호감을 얻는다고 믿는 사회니까.


물론 미국에도 외모에 대한 관심은 있다. 다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동안에 집착하는 분위기는 덜하다.

오히려 자신감, 자기만의 스타일, 개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동네 마트에서 50대 여성이 요가 바지와 헐렁한 티셔츠, 대충 묶은 머리로 계산대에서 농담을 나누는 모습을 봤다. 그녀는 젊어 보이려 애쓰지 않고, 그냥 자신 그대로다. 또 다른 날, 지역 축제에서 회색 머리에 문신한 할아버지가 손자와 함께 밝은 색 모자를 쓰고 춤추는 장면을 봤다. 한국이라면 이런 파격적인 스타일이 시선을 끌었겠지만, 여기서는 그저 개성을 축하하는 순간일 뿐이다. 이런 모습들에서 나는 미국식 자유로움이 외모나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캐릭터를 당당히 드러내는 태도임을 알게 됐다. 물론 여전히 신분증 보여달라고 할 때마다 피식 웃기도 한다.


이제 나는 한국식 마스크팩으로 피부를 가꾸고, 미국식 자유로운 스타일로 자신감을 내보이는 복합적인 사람이 됐다. 한국에서는 피부과 진열대의 화장품을 보며 ‘더 젊어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미국에서는 주류 매장에서 신분증을 내밀며 웃는 백발 할머니를 보며 ‘나이 듦도 멋지다’는 생각을 한다.

화장품 선반의 유혹

한국의 “동안” 욕심과 미국의 “자유로운 자신감”이 충돌할 때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세련된 외모가 경쟁력의 일부라면, 미국에서는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도 당당한 사람이 경쟁력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덕분에 문화적 시야가 넓어졌고, 나를 바라보는 눈도 따뜻해졌다.


두 나라의 색깔이 섞인 이 마음이, 왠지 편안하다. 그리고 오늘도 주류 매장에서 신분증을 내밀며 K-뷰티 마스크로 피부를 가꾸고, 미국식 자유로움으로 웃음을 나누며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마음만은 21살이다.”

두 문화 속에서 나를 찾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단 알고 보자. 미국의 괴짜 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