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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 밀기 전, 주머니부터 뒤적이는 나라

쿼터는 없었지만, 온기는 있었다.

by Susie 방글이




한국에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 문턱에 들어서며 미국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집을 비워두니 우리 손길을 기다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지 낀 가구, 쌓인 우편물, 바싹 말라버린 화분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시급한 건 먹는 일이다.
배부터 채워야 힘이 나고, 그래야 치워야 할 것들도 손에 잡히니까.


그래서 우선 슈퍼로 향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ALDI.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현금을 쓸 일도 거의 없었다.
주머니 속을 뒤적이니 반짝이는 건 1센트, 5센트, 10센트뿐, 정작 필요한 쿼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늘 그렇다. 꼭 필요할 때는 없다. 분명 어제는 굴러다녔던 그 동전이 오늘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반대로 필요 없을 땐, 어딘가에서 계속 굴러 다닌다.

차 바닥이나, 서랍 속, 가방 밑…


ALDI의 카트는 25센트를 넣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엔 불편하다고 느꼈다.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이는 시간이 아까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불편함이 만들어내는 묘한 질서와 책임감을.


ALDI는 독일계 마트다.

실용과 효율을 중시하는 철학이 카트 하나에도 묻어난다.

25센트를 넣고 카트를 빌리고, 다 쓰고 나면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동전을 돌려받는다.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작지만 분명한 책임이 따른다.

쿼터 하나면 장보기 준비 끝! 돌아올 땐 쿼터도 같이 돌아와요.
정리된 카트, 서로에 대한 작은 책임감의 시작입니다.

이 시스템은 ALDI가 카트 정리 직원을 따로 두지 않아도 되게 한다.

그 결과, 운영 비용을 줄이고 소비자에게 더 저렴한 가격으로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

불편함은 단지 질서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소비자 모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된다.


박스째 올려두는 담백한 진열. 인건비는 줄이고, 대신 손님한테는 저렴한 가격으로 돌려준다.
꾸밈없는 진열, 대신 솔직한 가격

한국에서도 한때 비슷한 시스템이 있었다.

대형마트 입구에 동전을 넣고 쓰는 카트가 등장했지만,

소비자들은 동전을 준비하는 번거로움보다 더 편리한 방식을 원했다.

불편함은 점차 편리함으로 대체된 셈이다.


미국 월마트나 여느 마트 주차장으로 가보면 차이가 더 선명해진다.

카트들이 통로를 막고, 화단 위에 걸쳐 있고, 차들 사이에 굴러다닌다.

"비 오는데 누가 일부러…"

"나 하나쯤 괜찮겠지."

그 무심한 선택들이 공간을 어지럽힌다.

편리함은 남기고, 책임은 누군가에게 떠넘긴 채.

목적을 잃은 순간, 어디든 제자리가 되어버린다— 누군가의 바쁨이 남긴 작은 무심함
물건은 사갔지만, 매너는 두고 갔네

ALDI 앞에서 쿼터 없이 서성이던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혹시 카트 필요하세요?"

다 쓴 카트를 제자리에 넣기 귀찮은 마음 반,

잠깐의 호의 반.

그 순간이 어쩐지 따뜻했다.

불편함 속에서만 피어나는 연결의 순간.

기계가 줄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우리는 지금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삶을 더 빠르고 간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사라진 것도 있다.

줄을 서는 시간,

사람과의 대화,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작은 수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기회.


편리함에는 대가가 있다.

그 대가는 때론 책임감이고,

때로는 배려, 연결, 여유다.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해 주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감각은 따로 있다.

불편함이 건네는 질문에

잠깐 멈춰 설 수 있는 용기.


그래서 나는 이제

차 콘솔 박스에 쿼터 하나를 넣어둔다.

내 장바구니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카트 필요하세요?"

말 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25센트.

이 작고 무심한 동전 하나가,

편리함이 지나친 자리에

작은 책임과 따뜻함을 남긴다.

죄 없는 10 샌트 동전 2개만.. 사람도 동전도 늘 필요할 때는 없다. 있을 때 잘 챙겨두자.
사탕이 쌓이는 걸 보니, 가을이 이미 시작된 셈.

계절은 잠시 멈춘 듯해도 어느새 바뀌어 있다. 한국에서의 뜨거운 여름이 끝나자, 미국에서의 가을이 조용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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