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진 공기밥 역설
공기밥이 작아졌다고 덜 먹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작아진 밥그릇이 허기를 부추겨 3kg을 안겨줬다.
예전엔 식당에서 공기밥 한 그릇이면 충분했다. 밥그릇을 싹싹 비우고 나면 속이 든든했고, 숟가락을 내려놓는 순간이 자연스러웠다. 구수한 된장찌개 국물에 밥을 비벼 마지막 한 술까지 떠먹으면 세상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밥그릇이 텅 빌 때쯤, 아직 두어 숟갈을 더 뜨고 싶다. 고기를 쌈장에 찍어 쌈에 싸 먹으려는데, 밥그릇 바닥이 훤히 드러난다. "이게 다야?"라는 허전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결국 "공기밥 하나 더 주세요"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한 번은 아쉬움이 남아 이렇게까지 물었다. "혹시… 반 공기만 더 주실 수 있나요?"
돌아온 건 잠깐의 정적 후, "없어요"라는 단호한 대답과 함께, '밥을 반 공기만 달라는 사람이 세상에 있긴 해?'라는 표정이었다.
선택지는 둘뿐이다. 하나 더 시키거나, 약간의 아쉬움을 안고 집에 가거나. 남편은 늘 전자를 택했다."밥 하나 더요!" 하며 눈빛이 반짝인다. 새로 나온 공기밥은 또 금세 사라진다. 고기 한 점, 밥 한 술, 쌈장 듬뿍 얹은 상추쌈까지. 어느새 그릇 두 개가 쌓이고, 남편의 배는 부풀어 오른다.
밥그릇이 작아진 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다. 환경부에 따르면, 한국의 음식물 쓰레기는 연간 약 500만 톤에 달한다. 이를 줄이기 위해 일부 식당은 공기밥 크기를 20%가량 줄였다고 한다.
다이어트 열풍, 탄수화물 기피, 간편식을 선호하는 생활이 밥의 자리를 밀어낸 것도 한몫했다. 식당 입장에선 남는 밥을 줄이고 원가를 절감하려는 선택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밥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적당한 양'은 애매한 허전함으로 돌아온다. 한 숟갈 더 뜨고 싶을 때 그릇은 이미 텅 비어 있다.
문제는, 덜 주면 덜 먹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먹게 된다는 점이다. 아쉬움을 채우려다 한 그릇을 더 시키고, 남기기 싫어 끝까지 먹는다. 사실 남겨도 되는데, 늘어난 위 덕에 다 먹는다. 밥그릇이 작아지니 "조금만 더"라는 마음이 자꾸 고개를 든다.
SNS에서도 비슷한 푸념이 심심찮다. 한 네티즌은 "공기밥이 작아져 두 그릇 시키다 보니 더 먹게 된다"라고 했다. 이를 나는 '작아진 공기밥의 역설'이라 부르고 싶다.
미국은 이와 사뭇 다르다. 대체로 ‘왕사이즈’ 접시로 유명하지만, 요즘은 건강식 레스토랑처럼 적당한 양을 주는 곳도 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햄버거 세트 하나가 한국 패밀리 세트만 하고, 파스타 한 접시는 한국의 파스타 두 접시 분량이 기본이다.
미국 식당에선 "이걸 어떻게 다 먹지?"가 첫 고민이다. 접시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보고 있자면, 포만감은커녕 부담감이 먼저 든다. 결국 절반은 To-go 박스에 담아 간다. 한국이 '허전함'을 자극한다면, 미국은 '포만감'을 넘어 '포장'을 자극한다.
이 역설은 우리 집에도 파문을 일으켰다. '밥돌'이라는 애칭의 남편은 이번 한국 여행에서 3kg이나 쪘다. 작아진 공기밥 탓에 "조금만 더"를 외치다 두 공기를 거뜬히 먹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맛있는 추억과 함께, 작아진 공기밥은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다.
미국은 한 번에 많이 줘서 과식을 유도하고, 한국은 조금 줘서 허기를 자극한다. 결과는 같았다. 과도한 포만감이든, 애매한 허기든, 현대인의 식욕은 채워도 채워도 빈자리를 남긴다. 빈 밥그릇은 식사의 끝과 함께 우리의 욕망의 민낯을 보여준다.
적당히 만족하기 어려운 시대, 작아진 공기밥은 어쩌면 그 빈자리를 더 선명히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편은 오늘도 "밥 하나 더 주세요!"를 외치며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한다.
어쩌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길은, 한 공기 밥을 더 나누는 따뜻함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