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아닌 욕, 감정의 마법 단어
요즘 사람들 말하다 보면 ‘개’가 자꾸 튀어나온다.
"개 짜증 나." "개 맛있다." "개 좋아!"
짜증이든 기쁨이든, ‘개’는 감정을 한 방에 터뜨려준다.
'진짜', '너무'를 대신하는 짧고 강렬한 감정의 부사.
원래 '개'는 욕이었다.
조선 시대, 개는 충직하지만 천한 동물이었다.
집을 지키고, 거리를 떠돌던 낮은 존재.
그 이미지가 사람을 비하하는 말로 굳어졌고,
오랫동안 한국 욕의 대표주자였다.
하지만 지금의 '개'는 다르다.
"개 귀엽다"는 사랑스러움이 묻어나고,
"개 피곤해"는 하루의 고단함을 생생히 전하며,
"개 맛있어!"는 치킨 한 조각의 황홀함을 배가시킨다.
'개'는 욕을 넘어, 감정을 강조하는 일상 부사로 진화했다.
재밌는 건, 이 '개'가 친구 사이의 다리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야, 이 개XX야!"라고 웃으며 부르면 그건 욕이 아니라 애정이다.
"이거 개 웃겨!"라는 말엔 웃음과 공감이 실린다.
거칠지만 따뜻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친근한 표현.
언어를 배우면 욕부터 익힌다는 말이 있다.
영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F"로 시작하는 단어를 쓰는 걸 들으면,
왠지 더 진짜 같고, 감정이 확 와닿는다.
"It’s f...ing cold."
"I’m f...ing tired."
"That was f...ing amazing!"
요즘 영어에서 F 단어는 단순한 욕이 아니다.
감정을 강조하는 부사처럼 널리 쓰이고 있다.
'so', 'really'보다 더 세고, 더 직관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그런데 '개'와 'F' 모두 공통점이 있다.
친구끼리 웃으며 쓰면 친근하지만,
격식 있는 자리나 공식적인 상황에선 여전히 부적절하다는 것.
감정도 표현방식에 따라 예의가 되기도, 무례가 되기도 한다.
'F 단어'가 감정을 폭발시키는 도구라면,
'개'는 한국 특유의 정서와 함께 감정을 풀어낸다.
'F'는 선을 긋기도 하지만,
'개'는 선을 허물며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
'개'는 지역과 세대에 따라 색깔도 다르다.
부산에서의 '개 시원해!'는 바닷바람처럼 쾌활하고,
서울에서의 '개 바빠'는 도심의 분주함을 담는다.
MZ세대의 '개쩐다'는 트렌드를,
'개고생 했네'는 삶의 무게를 나눈다.
물론, 어디서나 막 쓰면 낭패다.
감정 강조도 타이밍과 맥락이 맞아야 한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는 '개'를 풀어놓으면 큰일 난다.
참고로, 대문에 쓰여 있는 '개조심'은 여기서 말하는 ‘개’가아니다.
거긴 진짜 개가 튀어나올 수 있으니, 그건 정말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진짜 개 좋다."
"That was f…ing awesome."
친구가 피식 웃는다면, 그 말은 잘 전해진 거다.
감정도, 단어도, 결국은 마음이 닿는 방식이니까.
과장은 웃음을 낳고, 웃음은 마음을 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