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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은 시원한데, 몸이 시원찮다.

미국에 없는 병

by Susie 방글이





3박 4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은 에어컨이 몇 시간째 풀가동 중이었다. 밖은 찜통더위, 안은 냉동실. 창문을 열 수도 없고, 나는 점점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아랫배가 살짝 묵직했다. 장거리 이동의 피로인가 했지만, 묵직함은 곧 통증으로, 통증은 울렁거림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식은땀이 목을 타고 흐르고, 손끝과 발끝은 얼음장 같았다.


"아이고, 몸이 얼음장이야!"

남편이 내 손을 잡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운전하면서 중얼거리더니 약국에 들러 약을 사 왔다.

"네, 냉방병 증상 맞네요. 약 드릴게요."

약사의 말이 끝나자 남편이 투덜거렸다. "당신 때문에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고맙고, 미안하고, 아픈 와중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귀엽게 괘씸하기까지 했다.


왜냐고?


이 남자, 더위 타기로 동네 소문난 사람이다. 체온은 남들보다 1.5도쯤 높은 것 같고, 땀샘은 지하수처럼 솟는다. 여름이면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냐?"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런 남편이 내가 냉방병으로 고생하자 말은 없었지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자기만의 처방전을 꺼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해! 몸을 데워야 돼!"

......


"에어컨 안 틀겠단 말은 죽어도 안 해."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덥다. 냉방병이라고 북극곰이 되는 건 아니다. 속은 울렁거리고, 겉은 땀범벅. 이 모순의 끝판왕 같은 상황. 결국 타협은 이렇게 났다. 에어컨은 켜되,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


며칠 뒤, 또 한 번의 에피소드. 이번엔 복통 대신 콧물이 줄줄.

"감기겠지?"
아니, 요즘 너무 덥다. 그냥 에어컨 앞에 오래 있었을 뿐이다.

나는 냉방병에 유독 약하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에어컨에 취약한 체질이다.

늘어나는 건 약뿐ㅠㅠ

예전에 한국에서 살면서 직장 생활할 때도 여름에 '냉방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었다. 반면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면서는 냉방병은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민감 체질이 아니라, 내가 한국 에어컨에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미국은 중앙 냉방 시스템을 쓴다. 바람이 환풍구를 통해 부드럽게 퍼져 공기를 서서히 시원하게 만든다. 피부에 직접 닿기보단, 공간 전체가 은근히 차가워진다.
한국은 다르다. 좁은 공간에서 에어컨 바람이 정면으로 강하게 쏜다. 집, 사무실, 식당, 차 안, 어디서든 마찬가지. 정면승부다. 무방비 상태로 맞으면 뚫린다.

집 뒷마당에 덩치 큰 실외기- 냉매를 압축해 보내고, 집 안 공기를 순환시켜 시원하게 만드는 심장 같은 존재.
미국 가정에서 보이는 벽걸이 온도 조절기
중앙 냉난방 시스템이 집 전체를 통째로 컨트롤하면서, 각 방마다 천장에 설치된 이 통풍구로 공기를 내보내요.
바닥에 설치된 공기 배출구(vent register). 주로 난방(Heating)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냉방에도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미국에선 멀쩡했던 내가 한국에만 오면 복통, 콧물, 몸살에 시달린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몸은 한국 에어컨 앞에서 무너진다.

태생은 한국인이지만, 몸은 이미 미국에 적응한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한국 에어컨이 유난히 강한 걸까?


'냉방병'은 한국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다. 에어컨 속에서 재채기를 하면 "아이고, 냉방병이네~"하고 진단과 처방이 동시에 끝난다.


반면, 미국에선 이런 개념이 없다. 비슷한 '빌딩병(sick building syndrome)'은 곰팡이, 먼지, 환기 불량 같은 건물 환경 문제로 생기는 증상을 가리킨다. 한국의 냉방병처럼 에어컨 냉기가 직접 원인은 아니다.


결국, 나는 깨달았다. 내 몸은 미국의 빌딩병 환경엔 끄떡없지만, 한국 에어컨의 직격탄 앞에선 무너져 내린다. 다음 여행 땐 담요를 꼭 챙겨야겠다. 아니면 남편의 에어컨 사랑부터 설득해야 할까? 어쨌든, 이 부조리극 속에서도 우리 부부의 온도차는 웃음으로 이어진다.


"여행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야 돼."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어릴 땐 시간이 있는데 돈이 없고, 한창 일할 땐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고, 나이 들면 돈도 시간도 있는데 건강이 없다던 그 말. 이번 여행에서 온몸으로 깨달았다.


만약 여행 중에 이 냉방병 때문에 아팠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무리 멋진 풍경과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어도, 통증과 식은땀 앞에선 빛을 잃었을 테니까. 결국, 여행은 건강이 받쳐줄 때 가장 빛난다. 다음번엔 담요뿐 아니라 내 몸과 한국 에어컨의 전쟁을 대비할 전략도 세워야겠다.

이 길 끝엔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마음도 함께 달리는 오후

여행의 진짜 준비물은 여권도, 카메라도 아닌, 건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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