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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타야 하는데 예약한 우버가 안 온다.

PM의 배신, AM의 멘붕

by Susie 방글이




미국 타 주에 사는 딸한테 가는 날.

공항에 가기 위해 우리는 우버를 새벽 4시 픽업으로 예약해 두었다.
전날 밤, 분주하게 짐을 챙기며 나는 신분증 챙기고, 남편은 우버를 예약했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4시 10분 전.
이쯤이면 우버 위치 알림이 와야 하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왠지 불안하다. 커피는 이미 식었고,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새벽 공기는 점점 서늘해졌다.


"이상하다, 왜 안 오지?"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봤고, 남편은 뭔가 깨달은 듯 숨을 삼켰다.


"… 어어어, 이거 뭐지? 오후 4시로 예약됐네."


그제야, 우버 예약 시간 '4:00' 옆에 박힌 'PM’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멍해졌다.

'4시'면 그냥 04:00 아니면 16:00, 또는 오전 오후.

한국식 표기에 익숙한 남편이 실수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오전 4시는 4:00 AM, 오후 4시는 4:00 PM.

이 단순한 표기 방식이, 아직도 남편에겐 낯설 때가 있다. 더구나 까먹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선 허겁지겁 예약하느라, 체크 따윈 못 한 것이다.


'그냥 차를 가지고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공항 장기주차 요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며칠만 맡겨도 웬만한 식사 몇 끼 값은 훌쩍 넘는다.

망설일 틈도 없이 남편은 다시 우버 앱을 열었고, 나는 '제발 근처에 한 대만 있어라'라고 속으로 빌었다.

다행히 바로 올 수 있는 우버랑 연결됐다.


잠이 다 깼다. 식어버린 커피를 데워 텀블러에 붓고,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출발 30분 전, 아슬아슬하게 탑승에 성공했다.

단순한 시간 표기 하나가, 잊지 못할 추억의 해프닝으로 바꿔놓은 셈이다.

심장 박동처럼 빨갛게 요동치던 그날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미국, 영국, 한국, 아일랜드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회사에서는,
작은 날짜 하나에도 종종 혼란이 생긴다.

영국인 동료가 서류에 04/07/2011'이라고 적으면,
미국식 표기에 익숙한 나는 당연히 4월 7일로 읽는다.
그런데 정작 그건 7월 4일이었다.


같은 숫자 조합이, 나라마다 전혀 다른 날을 의미한다는 건 생각보다 자주 헷갈린다.
한국은 ’ 연/월/일’, 미국은 '월/일/연', 유럽은 '일/월/연', 이 기본이다.

왜 이렇게 다를까?


한국은 유교적 전통과 역사 중심의 사고방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일명 장유유서(長幼有序).
그래서 '연도-월-일'처럼 큰 것부터 작은 순으로 정리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반면 미국은 개인의 이벤트 중심 문화가 강하다.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행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월-일-연'처럼 달부터 먼저 등장한다. 일종의 관심 순서다.


유럽은 실용을 중시한다.
일정이나 계약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며칠인지'이기 때문에,
'일-월-연' 순으로 쓰는 게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날짜 표기 하나에도, 각자의 삶과 사고방식이 배어 있는 셈이다.


미국에서 살다 보면 날짜나 시간뿐 아니라, 온갖 단위와 기준도 낯설다.
킬로그램 대신 파운드, 킬로미터 대신 마일, 섭씨 대신 화씨.
거리 표지판, 음식 라벨, 레시피까지—어디에든 미국만의 룰이 자리 잡고 있다.

이방인의 입장에선 머릿속 계산기를 꺼내는 게 거의 반사 신경이 된다.

이대로 쭉 52 마일즈 직진합니다 (84 KM)
85-96 도 사이 (섭씨 30-36도 사이) - 덥다 더워!!

PM? AM? 다시 확인.
섭씨 20도? 화씨로 몇 도지?
무게는? 가격은? 용량은?
그저 단위를 바꿨을 뿐인데, 하루가 더 복잡해진다.


미국은 무슨 고집인지, 남들 다 가는 길엔 흥미를 잃는 나라다.
전 세계가 킬로미터법(KM)을 쓸 때, "우린 마일(Miles) 쓸게요!"
다 같이 섭씨(Celsius) 쓰자고 해도, "아냐, 화씨(Fahrenheit)가 좀 더 미국 스러워."
왠지 '남들과 다른 나'가 쿨한 거지, 계산해야 하는 불편함은 상관없다는 분위기다.

이쯤 되면, 단위도 자존심이고 아이덴티티다.
다름을 넘어서 '고집 센 자유'쯤 되는 이 문화 앞에서, 나는 오늘도 마일과 화씨 속에서 길을 찾는다.


돌아보면, 진짜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었다.

몇 시였는지, 며칠이었는지는 흐릿해져도

그날 나와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선명하게 남는다.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언젠가는 희미해지지만,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맴돈다.


04/07이든 07/04든, AM이든 PM이든,

파운드든 킬로그램이든—

세상은 언제나 숫자와 기준으로 나뉘고,

그 경계에서 우리는 늘 조금씩 헷갈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삶이란 결국, 그 차이와 혼란 속에서도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누고, 기억을 만들어가는 일.

서로 다른 언어와 습관, 시간의 표현법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웃고, 살아간다.


인생은 완벽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헷갈림과 어긋남을 품고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가는 여정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서로 다른 색깔이 모여 뉴욕이라는 이야기를 만든다

다르기에 더욱 풍성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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