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원래 주의가 산만한 동물이다. 한 가지에 집중해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대단한 의지력의 소유자 이거나 돌연변이가 분명하다. 돌도끼로 들짐승을 사냥하던 시절, 거리에 핀 꽃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곰이 다가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생존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후대에 유전자를 남기기도 어려웠다.
결국 꽃을 보면서도 곰이 오는지 돌아보고 혹시 오늘 사냥하지 못하면 저녁을 굶겠구나라며 미래를 초조하게 걱정하는 이들의 생존확률이 높았다. 자연선택적으로 그들이 살아남아 우리에게 주의력 결핍이라는 생존에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줬다.
때문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뭔가를 하려는데 주변이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상황이라면 집중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대니얼 J. 레비틴이 쓴 [ 정리하는 뇌 ]에서는 흥미로운 예시를 드는데, ‘집중하다'의 영어 표현이 ‘Pay' Attention 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집중(Attention)은 우리의 에너지를 '지불(Pay)' 해야 한다는 것이다.
Do 가 아니라 Pay인 이유는 Pay에는 유한한 재화, 선택, 기회비용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 즉, 우리가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집중력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소진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경우를 보자면, 며칠 전 카페에 앉아 안 써지는 글을 오기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옆 자리에서 아주머니들이 얘기를 한다. 아들이 서울대를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딸은 국악을 하는데 남자 친구가 치과의사라고 한다. 곧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한 번은 식사를 같이 했단다.
“그런데 말이야! 걔 남자 친구가 꼭 내가 뭘 물어보면 말이야. 그 좀 이상하게 답해. 마치 있잖아 꼭....”
마치 뭐? 마치 꼭 뭐?
한창 궁금해졌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가려 버렸다. 나는 결국 “어머나 세상에. 그게 진짜야? 어머어머 웬일이야.” 라는 상대편 아주머니의 리액션밖에 볼 수가 없다. 너무 궁금해서 “그게 대체 뭔데요?”라고 물어볼까 고민하던 즈음엔. 내가 지금 무슨 글을 쓰고 있었더라 잠깐 잊게 된다. 다음 문장 진도 나가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런 존재다. 오늘 글쓰기를 멈출 좋은 건수 하나 잡았다고 생각하고 집중하기를 멈춰 버렸다. 이렇게 허접하고 얇은 쿠크다스 같은 인지의 보호막을 막아 줄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내가 마련한 게 바로 소니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다. 인지의 보호막에 힘을 실어줄 작고 귀여운 방패 같은 거랄까. 이걸 쓰고 있자면 사실 귀를 통째로 덮어 버려서 그냥 쓰고만 있어도 주변 소리가 잘 안 들린다. 그렇지만 노캔 기능을 켜면 순간 ‘웅~’ 소리와 함께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시공간이 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온전히 나만의 시공간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랄까. 물론 소리 하나 막는다고 해서 인간의 몽상과 쉴 새 없는 초조와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백색 소음이 오히려 글쓰기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원치 않는 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강력한 장점이다.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이며 ‘오늘은 시끄러워서 안 되겠다’라는 핑계를 원천 봉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게 글한 편 더 쓸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고 카페를 휘리릭 나와버렸다. 나오면서 보니까 카페 통유리 쪽에 사람들이 한여름 모기처럼 옹기종기 매달려 있다. 노트북을 켜고 엄청난 집중력으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오, 이런! 이들은 ‘주의 산만’이라는 우수한 유전자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지 못했구나. 신석기시대였다면 곰이나 사자의 반찬이 될 거였다고, 그들을 가엽게 여기기로 하고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