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을 읽었다옹
우리 사회에서 '공정'은 시기를 막론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 중 하나이며, 교육 현장과 사회 여러 분야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에 대해 항상 논의되는 주제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육 당국은 항상 공정한 교육제도와 입시제도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공정하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가치나 관념을 내걸고 만든 제도와 규칙인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능력주의가 세상에 공정함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교수는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을 통해 그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는 왜 그 자체로 공정함의 해답이 되지 못하는가? 이번 책을 통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 대해 고민해 보자.
그러나 실제로는 SAT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더 부유한 집 학생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p.32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
p.37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p.53
능력주의 사회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지닌 능력으로 인해 사회적 성공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반면, 불가피하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인 점은 단지 순수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능력이 이 두 집단 간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 맞는가에 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보상을 얻는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능력이라는 것은 노력 외에도 그들의 가정환경과 출신 배경,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나 행운 등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능력만으로 사회적 역할과 재화를 분배한다는 능력주의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능력주의의 폭정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문제는 '월급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p.60
여기에 더해 능력주의는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지나치게 개인에게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능력주의에서 성공과 실패는 그 사람이 그동안 해온 노력과 그에 따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본다. 때문에 성공한 사람은 정당한 과정을 통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으로 보고, 실패한 사람은 게으르거나 노력이 부족하여 도태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 사람이 능력을 갖추기까지의 과정은 자신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다면적, 우연적 요소들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이전까지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이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p.79
저자는 이번 장에서 종교개혁기와 미국의 역사 속에서 파생되었던 여러 가지 논쟁들을 소개하면서 능력주의가 발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종교개혁기 루터의 은총론은 "선행에 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일체 부정"하는 반능력주의적인 교리였고, 칼뱅의 예정론 또한 "구원이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일 뿐이며 인간의 실적이나 자격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라는 칼뱅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 이상 제어될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것이 직업을 통해 현시된다는 믿음은 "세속적 활동으로 자신의 구원 여부를 증명하는"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결국 능력주의로의 복귀를 의미하며, 능력주의적인 오만의 바탕이 될 수 있던 것이다.
비교적 최근의 논의를 살펴보면, 리어스(Jackson Lears)는 미국의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고 한다.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능력주의에 가까운 것이라면, 운의 윤리의식은 위의 인용문과 같이 개인의 노력보다는 보다 우연적이고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난 요소들에 집중한다.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불가피한 상황적 배경을 고려함으로써, 능력주의가 간과할 수 있는 우연적 요소를 보완하는 이론적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킹과 퍼커의 입을 통해 도덕 세계의 궤적이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는 믿음은 부정의에 맞선 싸움을 크고 예언자적인 외침이 되었다. 그러나 똑같은 섭리론 믿음이 약자들에게는 희망을, 강자들에게는 오만을 불러일으킨다.
p.96
이번 장에서는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일어난 '사회적 상승 담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사회적 상승 담론에 담긴 메시지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설명에서 사람들이 기회와 책임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는 점은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면 이 '책임'이라는 말은 아래 두 가지 인용구에서 상반되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이는 사회적 상승 담론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모두 기회를 가진 사람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고 개인의 노력만이 유일한 변수가 된다면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하지만, 성공 혹은 실패로 나아가는 과정에서는 그 외에도 많은 요인들이 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번 장의 말미에서는 왜 미국에 비해 유럽이 더 관대한 복지국가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는 유럽에 비해 미국이 "노력과 근성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크며, 유럽은 미국에 비해 "자신의 삶이 자기 통제 밖의 변수에 더 많이 휘둘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각 국가들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정책을 펴고 있으며 그 결과 실제로는 미국 사회보다 유럽에서 사회적 이동성이 큰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 운명의 책임자"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야스차 뭉크의 지적처럼, 이제 책임이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이자, 그렇게 못할 경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p.116
이 나라에서는 열심히 일하기만 한다면, 책임을 다하기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p.118
누가 토론에 참여할 수 있고 없는지의 자격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 토론(討論, debate)의 사전적인 정의는 "의사결정 집단에서 어떠한 관심 주제에 대하여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번갈아가며 공평하게 의사소통하도록 구조화된 사건"이다. 따라서 토론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상대방과 소통하는 과정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능력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 논리적 사고와 의사소통 능력을 갖춘 사람을 토론에 참여하는 구성원으로서 제한할 수 있다. 여기에 학력주의적 관점을 추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고학력자만이 앞서 말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한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한정적인 자격 부여는 토론의 결과가 그 토론의 구성원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국지적인 규모의 회의라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 운영 전반에 대한 토론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모든 구성원이 고학력자로만 채워진 국무회의의 결과가 모든 국민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정책을 만들어 낸다면 어떨까?
정치, 경제 분야 등에서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고학력 엘리트들 간의 토론은 공공선을 달성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높은 학력은 모든 이들에 대한 이해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더 많이 배웠다는 것'이 토론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저학력인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분법적 가치 비교평가의 '스마트하냐 둔하냐'는 '정의냐 불의냐', '옳으냐 그르냐' 등의 윤리적, 이념적 비교평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p.156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은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p.172
공정한 경쟁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나온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 그리고 훈련, 교육, 영양 등등에 똑같이 접할 수 있느냐다.
p.199
롤스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노력을 하려는 의지 자체도, 그러한 시도도, 그리고 흔히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근거한 것이다."
p.210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입시 제도를 놓고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그 주제는 바로 정시(주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에 중점을 둔 선발 제도)와 수시(수능 성적뿐만 아니라 생활기록부, 자기소개서 등 학생의 전반적인 학업 능력과 잠재력을 평가하려는 취지의 선발 제도) 두 가지 중에서 어떠한 것이 더욱 '공정한' 학생 선발 방법이냐는 것이었다. 대학 입시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했을 때 이는 수험생과 수험생의 가족, 그리고 공교육 및 사교육 종사자 등 상당히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하고도 민감한 사항이었다.
당시 논점은 주로 '최근 확대되어 있는 수시 선발의 비중을 축소하고 정시 선발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가'에 맞춰져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생긴 원인은 수시 전형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스펙 쌓기'가 필요하며, 이는 학생의 학업 능력보다는 학부모의 경제적인 배경이 중요해진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수시 전형의 합격 여부가 학생의 노력보다 가정적인 배경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부분이 있다는 주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시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수시 제도의 이러한 부작용을 정시 제도로 대체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시 확대 찬성파의 입장을 보면, 정시 전형의 경우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합격을 결정짓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비교적 평범하거나 어려운 가정에 속한 학생의 경우에도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좋은 학원에 다니고 고액 과외를 붙인다고 해도, 수능은 결국 학생 본인이 혼자 힘으로 보고 오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정한 제도라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보면 타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장에서 다루었던 롤스의 주장을 대입해 보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학생의 '노력'이라는 것도 결국 학생이 처한 환경과 가정에서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교육연구원 교통통계센터가 2016년에 발표한 ‘통계로 보는 교육정책'을 보면 소득이 높은 가정의 학생의 경우 소득이 낮은 가정의 학생보다 수능 성적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결국 '학생의 학업 능력'이라는 것은 학생이 처한 환경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부모를 잘 만나야 대학도 잘 가고 사회적인 성공도 얻을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이나 '정시와 수시 어떤 대학 입시도 결국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양비론적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신의 꿈을 위해 꾸준히 정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좌절만을 안겨주는 방향일 것이다.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학생들도 학업을 위해 온전히 '노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에 대한 연구와 지원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한다. 우리 사회가 '대학 입시 제도'에 관심을 가지듯이 '학생' 한 명 한 명에게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회였으면 한다.
하이에크는 부자들에게 비록 그들의 부가 능력의 징표가 아니지만, 사회에 그만큼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했다. 그러나 나이트에게 이는 과한 아부일 뿐이다. 돈을 잘 버는 일은 그 사람의 능력과도 무관하고 그가 한 기여의 가치와도 무관하다.
p. 225
이번 장에서는 능력과 자본의 축적에 대한 하이에크(Friedrich Hayek)와 나이트(Frank Knight)의 견해도 소개되고 있다. 위 인용구와 같이 하이에크의 경우 부자들의 '부'를 '사회에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본 반면, 나이트의 경우 '부'를 그들이 가진 능력과 사회에 기여한 가치 모두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사례에 따라 두 가지 모두 맞는 주장으로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에디슨이 전구를 판매함으로써 쌓은 부의 경우, 전구의 상용화로 인해 밤길을 안전하게 만들고 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등 사회에 기여한 만큼의 대가를 받은 것이므로 하이에크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경우, 이는 불법 도박으로 인한 사회 문제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나이트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의 주장만이 반드시 맞다고는 할 수 없는데, 이는 분배의 정의를 확립하는 데에 있어서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견지하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부자들의 부가 그들이 가진 능력이나 사회에 기여한 가치, 혹은 그 외에도 어떠한 변인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 사회적 재분배의 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선행 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버드를 능력주의적 기관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코넌트의 시도는 미국 사회 전체를 능력주의 원칙으로 규율하려는 더 큰 야심의 일환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전을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교육'이라고 제시했다.
p.251
동시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들,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비판받을 여지가 있기도 하다. 능력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세대에서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신분제나 계급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적 수준에 따른 계층은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코넌트가 하버드 대학의 총장으로 있던 시절에는 "미국 사회에서 세습 상류층이 득세"했고, 그는 "그런 엘리트층은 미국의 민주주의적 이상에 반한다"고 생각했다. 경제적, 사회적 계층이 아닌 '능력'에 의해 장학금도 받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하버드 장학생을 뽑는 시험인 'SAT'를 탄생시키게 되었고, 이 시험은 "미국 국민을 유능자와 무능자로 판별하는 인재 선별기"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능력에 기준한 유동적 사회는 비록 세습적 위계질서와는 상반되지만 불평등과 상반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p.255
코넌트와 같이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인물들에 의해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학 선상에서 배제되었던 인재들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될 수 있게 된 것은 긍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라는 것 또한 학부모의 경제적인 수준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위 5장을 돌아보며 살펴본 경기도교육청 연구에서도 그렇고, 6장에서 명시되어 있는 연구 결과에서도 SAT 점수는 부모의 부와 매우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다는 것은 결국 '능력주의' 자체가 "세습적 위계질서"를 완벽히 타파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게다가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공정성'이라는 이미지는 능력에 따른 "불평등을 정당화" 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권층이 가지고 있던 일말의 불편함, 즉 '능력이 아닌 세습에 의해 대학에 입학시켰다는 꺼림칙한 마음'을 무마시켜 주기도 한다.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p.282
그리고 비록 경제적 특권층의 자녀들이 얻은 능력이 '부'에 의해 만들어낸 능력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얻는 마음의 상처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마냥 '특권'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상류층 학생들, 그리고 명문대에 나온 학생들은 그저 행복감에 취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연구에 따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들 중 상당수는 우울감이나 불안감 등의 "감정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청소년 시절부터 겪어왔던 학업에 대한 부담감과 자신에 대해 걸린 기대로 인한 압박감이 만들어낸 후유증일 것이다. 이는 교육이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배움의 기쁨을 철저히 배제하고 성과에 대한 집착하는 문화가 생성해 낸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선별과 분투의 도가니에서 한 발 물러나 그냥 지긋이 도마뱀을 바라보기를, 그 동물이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지를 충분히 보고 즐기기를 원했을 것이다.
p.303
절망 끝의 죽음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발생하고 있다.
p.311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명문 대학을 나왔거나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으스대는 것을 볼 때에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일자리 감소와 임금 정체, 거기에 노동의 존엄성까지 깎아내리는 사회의 변화로 인해 겪는 심리적·경제적 위기로 인해 약물과 알코올 중독,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소위 '절망 끝의 죽음'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노동계급의 시민들이 겪는 비극적인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능력주의의 대두와 세계화 등으로 인해 사회와 상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노동'의 가치는 이전 세대에 비해 평가 절하 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자신이 스스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사회의 모습이 변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과 가치관이 변해가면서 '가치 있는 일'의 종류 또한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또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하는 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 상처는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과 시장주도적 세계화가 주는 효과와 맞물린다.
p.322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p.349
'공정하다는 착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능력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비판이 담긴 책이지만, 이 책의 궁극적이고 주요한 목표가 오직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공동선'을 이룰 수 있는가에 있다고 본다.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부작용들, 이를테면 노동계층에 대한 차별이나 경제적 양극화 현상에 대한 기득권층의 인식적 정당화 등은 구성원들 간의 유대감을 약화시키고 분열시킬 수 있다. 저자가 우려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비슷한 사회적 지위나 경제 수준을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생활환경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은 편안함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과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철저히 배척하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과 다른 생각에 대해 이해하며 생각의 폭을 넓혀볼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고 공공선을 길러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공정'이라는 가치와 더불어 언제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공존'이라는 가치를 말이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p.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