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주시초 ― 산곡」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었다옹

by 수상한호랑이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알이 쏟아지는

잠푸하니 볕바른 골짝이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을을 날려고 집을 한 채 구하였다


집이 몇 집 되지 않는 골안은

모두 터앝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 낟가리가 쌓여서

어니 세월에 뷔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었다

나는 자꾸 골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 채 있어서

이 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나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앉어서

지난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 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 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2025.7.14. 온갖 시선을 헤매이며 허기진 육신 뉘일 곳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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