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활옷과 녹원삼

현대식 전통 혼례

by 장보현





혼례날이 가까워질수록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한옥의 시원한 대자리 위에서 전통 예복을 맞이한 어떤 날이었다. 순조의 딸 복온공주의 붉은 활옷과 청색 단령, 그리고 녹원삼과 보랏빛 관복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12세 복온 공주의 체형에 맞게 복원한 활옷, 이승현 한복


활옷은 궁중 복식으로 공주나 옹주의 혼례복이다. 조선 시대에는 복식으로 신분을 구분 지었다. 특히 왕가의 복식은 엄격히 규제되어 민가에서는 착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신분 질서가 와해되었고 복식 규제 또한 느슨해졌다.


특히 복온공주가 혼례 때 입은 활옷은 민가에 허용되어 혼례복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붉은 겉감에 청색 안감을 대어 음양의 조화를 그렸고, 소매는 색동으로 갖추었으며, 만복과 장수 그리고 다산의 의미를 지닌 도상을 수놓은 조선 시대 최고의 여성 예복이었다. 1987년 한상수 자수장에 의해 재현된 복온공주 활옷은 대중에 공개된 이후 현재까지 전통 혼례복의 대명사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붉은 활옷은 음양의 조화를 위해 청색 단령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령은 '둥근 옷깃'이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 관복으로 널리 사용된 옷이다. 품계에 따라 색을 구분 지었으며 가슴의 자수장식인 '흉배'로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었다. 단령은 머리에 쓰는 사모와 허리에 두르는 관대를 착용하고 목화를 신어 복장을 갖춘다.




음과 양의 조화, 혹은 전통 혼례의 클리셰를 위해서라도 새신랑 새 신부의 청홍 조합이 마땅했으나 혼례는 유월 중순, 하지에 이른 여름날 치러질 예정이었다. 두터운 공단 소재에 형형색색 자수가 빼곡히 들어간 활옷은 퍽 무겁기도 했고 바람도 잘 통하지 않았다. 하긴 조선 시대 신부가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정성과 염원이 켜켜이 쌓여있겠나.



그에 반해 원삼은 산뜻한 느낌이었다. 옷감이 살결에 스칠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활옷을 걸치고 있을 때보다 한결 바람도 잘 통하는 듯했다. 도류불수桃榴佛手(복숭아, 석류, 불수감) 숙고사 원단에 수복(壽福) 글자와 화문(花紋, 꽃무늬) 조합을 부금한 녹원삼이었다.


원삼은 앞깃이 둥근 옷을 일컫는 말로 활옷과 함께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예복이었다. 신분에 따라 자적색, 녹색, 흑색 등으로 구분 지었으며 직금이나 부금의 유무로 계급을 나타냈다. 특히 녹원삼은 영정조 이후 민가의 혼례에 허용되어 조선 시대 대표적인 예복으로 자리매김했다.


녹원삼은 조선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예복이었던 만큼 출토 유물도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순조임금의 막내딸 덕온공주가 1837년 대례복으로 입었던 녹원삼을 좋아한다. 안감이 비치는 녹색 화접문갑사에 '수'와 '복'자로 금박을 입혔다. 절제미가 돋보이는 금박이 초록 비단 사이를 유영하며 여백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녹원삼의 경우, 보랏빛 단령을 갖추었다. 흉배의 호랑이 자수가 익살스럽다. 청색 단령 흉배의 쌍학이 문관의 표식인 반면, 호랑이가 수 놓인 흉배는 무관을 상징한다.



일습一襲이란 옷, 그릇, 기구 따위의 한 벌 또는 그 전부를 일컫는 말이다. 의복의 경우 한 벌의 완전한 차림을 갖춘 복식을 뜻한다. 형식과 절차를 중요시 여겼던 유교 사회에서 무언가 온전히 갖춘다는 행위는 일상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마음 가짐이었을 것이다. 전통 의복인 한복에는 일습의 미학이 중첩되어 있다. 속옷, 일상복, 겉옷을 두루 갖추어 매무새를 다지며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되새기는 자기 암시인 것이다. 혼례복을 입기 전, 일상복인 치마저고리는 새 신부의 상징과도 같은 삼회장 녹의홍상으로 갖추었다.



일주일 간의 치열한 고민 끝에 혼례복으로 결정한 녹원삼과 자줏빛 단령. 23평 남짓한 작은 한옥에 어울릴 만한 그림이었다. 고귀한 신분만이 착용할 수 있었던 금박이 다소 마음에 걸렸다만, 혼례는 일생일대의 특별한 날인 만큼 금빛으로 반짝일 새로운 나날들이 꿈처럼 번득이기도 했다. 옷 위에 아로새긴 장수와 다복, 다산의 인간적인 바람이 일상으로 잔잔히 스며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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