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식 전통 혼례
함은 혼례를 앞두고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채단과 혼서지(婚書紙)를 담아 보내는 상자를 일컫는 말이다. 현대에 이르러 함 들이는 의식은 허례허식으로 치부되어 점차 생략되는 추세다. 그럼에도 결혼식을 간소화하는 대신 전통 혼례의 의미를 되새기려 했다. 처음엔 생소하던 함이 의미를 알아 갈수록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함 속에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넘어 동양 철학 세계관을 아우르는 상서로운 조화가 담겨 있던 것이다.
1. 오방주머니 : 상서로운 조화의 철학관을 담은 복주머니
오방주머니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된 마음을 기원하는 일종의 민간신앙이 내재된 소품이다. 새로이 가정을 꾸리고 인생의 또 다른 단계로 진입하는 신혼부부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 새로 시작하는 부부에게 의식주 기반과 행복을 물려주는 것이다. 과거 뿐 아니라 동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인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방위에 따른 각기 다른 색의 다섯 가지 주머니에는 각각 <찹쌀, 고추씨, 팥, 목화씨, 노란 콩>이 담겨 있다. 동측의 청색 주머니에는 찹쌀을 넣어 부부의 백년해로를, 서측의 백색 주머니에 담긴 고추씨는 자손번창을 기원한다. 남측 적색 주머니의 팥은 잡귀를 쫓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북측의 흑색 주머니에는 목화씨를 넣어 침구 및 의복에 대한 밑천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노란 콩을 담은 가운데 황색 주머니는 부귀를 상징한다.
오방주머니에 들어있던 목화 씨앗은 결혼식을 올린 이듬해 봄, 한옥의 옥상 정원에서 싹을 틔웠다. 한여름 꽃이 피더니 늦가을 무렵 거짓말처럼 새하얀 목화솜이 결실을 맺었다. 매해 솜과 씨앗을 채취해 차곡차곡 모아 훗날의 자식에게 솜이불 한 채 지어 보낼 것이라는 우스갯 이야기를 읊조리며 혼례로부터 이어진 목화씨앗이 또 다른 일상의 전통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해 본다.
2. 청홍 채단 : 음과 양의 조화
채단은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비단을 일컫는 말이다. 혼례를 앞두고 맞춘 신부의 녹의홍상 한복이 그 대상이었다. 청색 종이와 홍색 종이, 홍색 실과 청색 실을 교차하여 비단을 감싼다. 이때 쓰이는 실타래는 매듭을 짓지 않고 한 방향으로 묶어 한 번에 풀리도록 고정한다. 신랑 신부의 앞날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리라는 뜻이다.
3. 기러기 한 쌍 : 부부의 백년해로
전통 혼례에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한 가지 요소를 꼽으라면 기러기 한쌍이다. 기럭 아범이 기러기 한 쌍을 들고 신랑에게 기러기를 전달해야 비로소 혼례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러기는 전통적으로 상서롭게 여겨 온 동물이다. 우리 조상은 질서 있게 무리 지어 규칙적으로 출몰하는 기러기의 모습을 음과 양의 섭리로 파악했다. 철새의 본능에 따른 기러기의 성향은 음양오행의 철학관에 안성맞춤이었고,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본보기였다. 질서와 의리, 평생 다른 베필을 맺지 않는 기러기의 습성은 대상화되었다.
목안木雁이라 불리는 나무 기러기는 목이 돌아가도록 고정되어 있다. 일종의 사인이다. 기러기가 마주 보고 있으면 부부의 정이 돈독하고, 그 반대는 불화가 싹튼 것이라는 표식. 목안은 통나무 조각을 불에 그을려 수분을 제거하고 기본적인 형태를 다듬은 뒤 젖은 수건으로 까만 재를 닦아내 완성한다. 본래 나무 조각 보다 한결 가벼워진 기러기 한 쌍의 그을음과 입체적인 비정형의 나뭇결이 퍽 아름답게 느껴진다.
4. 혼서지 :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
신랑의 집안에서 신부의 집으로 보내는 편지다. 귀한 딸을 베필로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담아 집안의 어른이 손수 글자를 써서 보냈다. 한자 문화권의 거대하고도 유구한 전통이 동시대에 과연 유효한 것일까? 그 오래전 나의 큰아버지들과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혼서지를 받아 큰어머니들과 어머니의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손수 먹을 갈아 꼭꼭 눌러쓴 글자에 감도는 쿰쿰한 먹향이 양가의 결합을 앞둔 어느 날 어색한 정적을 가로질렀을 것이다. 현대식 혼례에서는 한복집 대필 서비스를 받았다.
5. 거울과 귀금속
함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요소는 아니지만, 신부가 치장할 수 있도록 시어머니가 보내는 선물이다. 명경지수(明鏡止水, 밝은 거울과 정지된 물)라 했던가. 자그마한 손거울 속에 비친 고요한 내면을 그려본다.
6. 함 : 실용품 이상의 의미, 액운을 날리는 주술과 금기의 대상
여름의 초입 음과 양이 교차하는 초저녁, 청홍 보자기에 '근봉 (謹封삼가 봉하다)'으로 싸맨 함을 짊어지고 신부 집에 도착한 새신랑은 문 앞에 놓인 바가지를 단박에 부수고 함을 들였다. 바가지를 엎고 발로 밟아 큰 소리를 내어 깨뜨리면 모든 액운이 날아간다는 주술적 기원이었다. 주술과 금기가 어쨌든 새신랑은 서울에서 경상도까지 꽉 막힌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스트레스를 굉음과 함께 날려버렸다고.
7. 함 들이고 난 뒤
전통 방식에 따르면 나무궤짝에 칠이나 수를 놓은 아름다운 함이었겠지만, 현대식 혼례에서는 여행용 캐리어를 함으로 사용했다. 일상적인 실용성을 고려한 변화다. 함 속에 들어있던 물건은 집안 곳곳에 제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일상의 오브제로 거듭나고 있으며, 캐리어는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