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의 초콜릿 케이크

by 장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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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트에 온 지 사흘 째 되는 날, 본격적인 책작업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를 굽곤 했던 생일 치레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다는 남편을 다독이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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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진은 본격적으로 장을 보기 전, 냉장고를 차지하고 있던 식재료를 꺼내 들었다. 오이 무침과 배추 겉절이, 감자채 볶음과 불고기가 첫 촬영의 피사체였다. 모든 게 아직 낯설기만 한데 식탁 위의 풍경은 친근하다. 겐트까지 오는 여정이 쉽지 않았는데 긴장을 늦춰도 될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플랑드르 지천의 감자밭은 새하얀 별꽃을 터뜨리고 호시절을 맞아 푸르게 영근 오이며 배추가 풍요를 속삭인다. 중국 마트와 한국에서 공수한 고춧가루와 참기름, 간장과 액젓이 유럽의 제철 식재료 사이에서 춤을 춘다. 그렇게 첫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프로젝트에 대한 무게감을 어느 정도 내려둔 오후였다.




촬영 후 남은 음식은 우리에겐 생명수였다. 겐트에서 한식을 매일같이 먹을 수 있다니! 애진이 십 수년간 한국을 오가며 체득한 손맛은 궤도에 오른 듯했다. 한식의 정갈한 맛을 끌어낼 줄 알았다. 나는 남편을 향해 미역국 한 그릇만 보태면 생일상과 다를 게 없다며 농담을 건넸다. 애진은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눈치껏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이 남편이 생일이라 일러주었다. 애진은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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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애진은 공유 오피스의 이웃들을 소개해 주었다. 교회당으로 변모한 일요일과는 다르게 폐공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에스키모 섬유회사'가 문을 열었던 1906년의 세상과는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2019년의 사람들은 공간의 기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포도나무 덩굴에 이끌려 둘러본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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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로 쌓은 천장이 눈길을 끈다. 훤히 트인 공간감과 적재적소에 놓인 사물들, 곳곳에 배치된 큼지막한 식물. 이 세 가지만 잘 조합해도 플랑드르의 미감을 어느 정도 쫓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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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은 곳은 애진의 작업실과 벽을 맞댄 줄리의 초콜릿 케이크 공장이다. 애진에 의하면 겐트에서, 아니 벨기에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라고. 역 앞 트럭에서 소소하게 팔던 것이 입소문을 타고 겐트 전역에 소문이 났다고 한다. 맛이란, 역시나 감출 수가 없나 보다.



줄리의 초콜릿 케이크 공장을 나와 계단을 오르면 진정한 공유 오피스가 자리해 있다. 자율성과 창의성에 기반한 시대의 젊은이들이 노트북을 펼친 채 머리를 맞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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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된 가치를 지양하고,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을 지향하는 시대의 흐름은 겐트에서는 꽤 당연한 이야기 인 듯하다. 오히려 훨씬 진보적이며 미래 지향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어렴풋한 정의 또는 자유의 공기 속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다. 겐트 시의 정책적 모토가 '지속가능성'이었던 것이다. 전통의 가치를 지키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겐트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나는 지속가능한 삶의 단면을 엿보았다. 겐트에 머무를수록 그 밀도는 더욱 높아졌다.




짧은 투어를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애진은 잠깐 들를 곳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창가에 앉아 애진을 기다렸다. 촬영을 마무리 짓고 곧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줄리의 초콜릿 케이크를 두 손에 든 애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Happy Birthday, Jinho!" 우리는 답례를 잊지 않았다. 스마클릭, Smakelijk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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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의 초콜릿 케이크는 너무도 달콤했고 입속이 달라붙을 만큼 진득했다. 혓바닥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유명세가 자자하다던 벨기에 초콜릿의 풍미란, 이런 것이었을까.



우리는 낯선 공감각을 잠시 내려놓고 언제나 이어오던 일상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겐트에서 맞이한 생일 치레가 물에 젖은 허브 잎사귀처럼 은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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