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opywriter Diray_ EP.01
올해 1월 말부터 5월로 접어든 얼마 전까지, 나는 지옥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이름하여 'PT지옥'. 'Personal training'이 아니라 'Presentation'지옥. 광고 대행을 따오기 위해 여러 대행사들이 맞붙어 경쟁하는, 다른 말로 ‘비딩’이라고도 한다. 4개월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6개의 PT에 시달리다 보면 차라리 헬스장에서 받는 PT가 덜 고통스럽겠다는 생각이 든다. 4개월 동안 닭가슴살만 먹고 15킬로 빼오라고 해도 좋으니까 제발 경쟁 PT가 아니라 헬스 PT 하게 해 주세요.. 쥐어 짜낼 체력이야 어떻게든 구해 보겠지만, 쥐어 짜낼 아이디어가 더 이상 없어요..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요즘처럼 피티 시즌일 때면 더 많이 생각한다. 도대체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흔히 하는 자조 섞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내 직업은 뭐 하는 직업일까'하는 근본적인 차원의 고민에 빠지곤 한다. 분명 카피라이터라는 이름을 달고 있긴 한데 어느 날엔 비주얼 고민을 하고 있고, 또 어느 날엔 IMC 전략을 짜고 있다. 또 어느 날엔 목업 소스를 찾고 죽어라 정렬을 맞추고 있다. 어떤 기간엔 하드 코어 직장인의 모습을, 어떤 기간엔 부르기 전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프리랜서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나는 뭘까!
그러나 어떻게 고민하든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아이디어를 내는 직장인이다. 요즘 읽고 있는 김민철 작가님의 <내 일로 건너가는 법>에 뼈저리게 공감 가는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광고인이 아니라 회사원일 뿐이라고. 광고인이라는 비대한 자의식에 빠지지 말자고. 내가 늘상 주장하고 다니는 바였다. 광고인이라는 멋드러진 이름 뒤에는 그저 월급쟁이가 있을 뿐이다. 예술가도, 크리에이터도 아닌 그저 브랜드를 예쁘게 잘 꾸며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어 주는 일을 하는 직장인. 그 과정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 어떤 그림으로 다르게 풀어내느냐가 우리의 역량으로 해야 할 최선인 정도다. 광고주가 원하는 바 안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 그렇게 낸 아이디어로 월급을 받는 일. 이게 내가 생각하는 카피라이터의 역할이다.
프로세스적으로 들어가면, 우선 일을 받는다. 지금처럼 PT일 때도 있고, 따낸 광고주의 실행 제안일 때도 있다. 광고주 RFP(제안요청서)를 받으면 기획팀에서 먼저 파악한 후 제작팀에게 OT를 준다. 제작팀은 OT에서 받은 내용을 기반으로 제작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 우리 선에서 제작 안이 정리되면 들고 기획팀 리뷰를 한다. 서로의 피드백이 오고 간다. 그렇게 한 두 번 미팅을 하다 보면 (한 번만에 부러지면 얼마나 좋을까) 제작 안이 결정된다. 편집을 할 경우엔 그걸 바탕으로 외부 프로덕션 감독님에게 제작 OT를 드린다. 편집이 오고 간다. 투디와 DI(자막, 색감 보정 등)를 보고 편집 가안으로 성우 녹음을 한다. 편집 시안이 만들어지는 동안 제작팀 내부에선 카피나 그림 디벨롭을 함께 고민한다. 제작 안이 완성된다. 기획팀과 최종 리뷰를 한다. 최종 제안서가 만들어진다. 끝!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내가 하는 일은 아이디어를 내고, 정해진 아이디어에 맞추어 온갖 카피를 뽑고, 자꾸만 문장을 들여다보며 표현을 고민하고, 필요하다면 그 문장과 가장 잘 어울릴 비주얼을 함께 찾고, 녹음실에 방문해 문장들이 어떻게 읽히는지 체크하고, 최종 문서 콘티 작업과 오탈자 체크를 하는 것 까지다. 세세하게 들어가면 더 다양하고 산발적이다. 정신 없어 보이지만 하다 보면 하게 된다. 여기서 다른 부분들은 어째 저째하겠지만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작업은 색상으로 표시해 둔 저 단계다. 디벨롭 단계.
내가 이미 한 번씩 써본, 혹은 씨디님이 초안을 써주신 카피를 디벨롭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어렵다고? 나한텐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더 어렵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돈을 받고 카피를 쓰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무조건 더 좋은 걸 뽑아내야 한다. 거기서 거기인 수정은 안 하니만 못하고, 더 최악은 하향되는 경우다. 슬프지만 당연하게도 더 좋아지기가 가장 어려운데, 내 역량 탓인 것도 있겠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쏟아지는 피드백들이다. 이때부터 사공들이 정말 많아진다. 만들어진 카피를 우리 팀만 보는 게 아니라 이 프로젝트에 인볼브 된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 그 모두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물론 도움이 될 때가 더 많다. 문제는 다 반영하기가 힘들다는 거다.
모두의 피드백이 100% 반영된 카피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 중 받을 건 받고 넘길 건 넘기는 스킬이 필요하다. 나는 여기서 카피라이터의 역량이 제일 많이 갈린다고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더 성장해야 할 부분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디어, 발상도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걸 가능하게 잘 써보고 싶은데 아직은 어렵다. 연차가 쌓이고 내공이라는 게 생기면 수많은 피드백을 기가 막히게 버무려 내는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을까? 하하.. 사실 소심하게 한 마디 하고 싶기도 하다. 알겠으니까 제발 의견을 정리해서 주세요... 한분 한분 말씀하시면 초큼 힘듭니다!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본 카피라이터의 업은 이렇다. 내 일의 정체성은 나도 계속해서 재정립해보고 있기 때문에, 우선 지금까지 내린 바로는 이렇다. 누군가에겐 재밌어 보일지도, 누군가에겐 극악의 직업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둘 다 맞다. 재밌고, 지친다. 나는 이 이중적인 직업을 자발적으로 선택했고, 아직까지는 사랑하고 있다. 당장 TVCF(광고 총집합 사이트)만 봐도 나보다 뛰어난 카피라이터들이 수두룩하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잘하는 카피라이터로 보일 수 있길. 누군가 내가 쓴 카피를 레퍼런스 삼을 수 있길 바란다. 이런 대범한 꿈을 품고, 오늘도 달려 볼게요! (휴가라서 기분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