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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작업 May 11. 2023

ESSAY / 간추린 체르니 100


음, 내가 피아노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더라. 작년 12월쯤이었나. 대충 작년 12월로 잡고 지나온 시간을 계산해 보면 대략 반년쯤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어릴 때는 그렇게 쳐다도 보기 싫었던 피아노 바람이 자발적으로 불기 시작한 건, 실은 좀 오래되었다. 스물 예닐곱쯤 되었으려나. 갑자기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은 거였다. 기타는 손이 아파서 싫었고, 드럼은 귀가 아파서 싫었다. 관악기는 돈 많이 들고 마이너해서 안 끌렸고, 돈 안 드는 리코더는 폼이 안 나서 싫었다. (리코더 연주자분들 죄송합니다. 제가 문제지, 여러분들은 멋지세요.) 그래서 선택한 건 돌고 돌아 피아노다. 뭔가 굉장히 에둘러 닿은 것처럼 표현해서, 피아노 치기 싫었는데 다시 치는 거냐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다른 악기들도 한번 염두는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엔 피아노였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작년 여름쯤 정주행하게 된 일본 드라마 <롱 베케이션>에서 기무라 타쿠야가 피아니스트로 나온 거였다. 세상에나. 그 드라마를 보는 내내, 피아노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천상의 악기였다. 피아노가 주된 내용으로 나오는 것도 아닌 데다, 심지어 타쿠야가 피아노 때문에 고뇌하는 장면이 더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반해 버렸다. 피아노에게. 게다가 그 무렵 볼까 말까 재고 있던 애니메이션 <4월은 너의 거짓말>에도 피아노가 나왔다. 온 세상이 나에게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라고 염원하는 것만 같았다. 은근 운명론자(?)인 나는 결국 이 보이지 않는 부추김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드디어 겨울에 피아노 학원 등록!




첫 수업 때, 선생님이 커리큘럼을 어떻게 짜고 싶냐고 물어왔다. 보통 성인 취미반은 곡 하나를 놓고 완주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게 된다고 한다. 굳이 이론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좋긴 한데, 뭔가 아쉬웠다. 90년생이라면 한 번쯤 경험했을 과업인 '레슨지의 포도 색깔 채우기'를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반갑긴.. 했는데 허전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할 거 정석대로 배우는 게 좋지 않나? 히사이시 조는 가능한데 바이엘은 버벅대는 사람이 되긴 싫었다. '그냥 정식 코스대로 밟을게요'라는 나의 말에, 다음 시간 준비물은 '어린이 바이엘'이 되었다. 어린이라니.. 내가 하겠다고 해놓고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선생님 말은 거스르는 게 아니다. 그러고 다음 시간 나는 '어린이 바이엘'에게 완패당했다. 이게 이렇게 어려웠어?






피아노를 치며 가장 만족스러운 건, 이 시간만큼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워 N답게, 멍 때릴 때도 쉬지 않고 잡생각이 드미는 내 일상에서 '생각을 멈추기'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아니, 일단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생각이 온 오프가 되나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생각 아닌가요? 멍 때리는 동안 잡히는 시야의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나요....? 심각한 중증 생각러, 프로 걱정러인 나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 없던 일이 피아노와 함께하며 일어났다. 일단 악보를 보고 건반에 손을 올려놓기 시작하면 '이다음 음은 어딜 눌러야 하지?'라는 생각 말고는 그 어떤 잡념도 들지 않는다. 오직 이 곡을 무사히 완주해야겠다는 목표의식뿐이다. 다른 망상을 할 여유가 없다. 내일 할 야근, 친구와의 찝찝했던 대화, 이번 달 잔고 걱정, 내 인생의 다음 스텝, 인류의 기원, 갑자기 지구가 종말 하면 어느 행성에 가서 살지... 뭐 이런 것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다. 이건 사실상 해방이나 다름없다. 오버 좀 보태자면, 피아노를 처음 시작한 날을 '수련 생각 독립일'로 지정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생각과, 걱정과, 불안함과, 막연함과 이별하는 하루 1시간이 너무나 귀중해서, 나는 이 악기를 당분간은 끊을 수 없게 될 것 같다. 내 삶은 대부분 어수선했다. 가끔씩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아 두세 시간 정도 산만한 일상을 재배열하고선 그 일시적인 정렬로 며칠을 산다.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는 정리되지 않는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일단 딴생각 말고 이번 프로젝트에 전념하자, 딴생각 말고 이번 책을 끝내자, 딴생각 말고 글이나 쓰자 하며 스스로를 달랜다. 그렇게 마음을 적절하게 재배치하다 보면 며칠은 누그러져 살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이런 유의 의지는 언젠가는 효력을 다하기 때문에, 꾸준하고 확실한 솔루션이 필요했다. 피아노가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 준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저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 이상의 선물을 받았다.







바이엘과 뉴에이지 곡을 병행하며, 연습과 수업을 꾸준히 나가다 보니 어느새 반년이 흘러 있다. 그동안 학원은 한번 바꿨다. 지금 다니는 학원 선생님은 여기에 더해 코드까지 알려 주신다.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코드만 정복해도 웬만한 연주는 즉석에서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더욱 열정이 불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어린이 바이엘까지 졸업하고 체르니를 들어갔다. 그냥 체르니가 아니라,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직장인 맞춤형(?) 같이 느껴지는 '간추린 체르니 100'이다.




간추리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1) 흐트러진 것을 가지런히 바로잡다. 2) 글 따위에서 중요한 점만을 골라 간략하게 정리하다. 


2)의 의미로 붙은 타이틀에서 나는 1)까지 얻어볼 생각이다. 피아노를 치는 아주 짧은 행위는 나의 흐트러진 생각을 바로잡고, 위로받는 경험이 되어 준다. 고작 피아노 하나 치는 걸로 뭐 그렇게까지 거창한 인생의 교훈을 얻었냐고 하면, 그냥 피아노를 한번 쳐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니면 너만의 '피아노'를 찾으라고.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하다못해 걷기라도 하든. 이 미친 세상에 잠시라도 마음이 안착할 시간과 여유를 주라고. 그걸 겪고 나면 나의 이 '피아노 찬양'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 소중한 취미와, 내 또 다른 성장을 증명하는 간추린 체르니 100을 정말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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