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hot by sho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ture film Nov 26. 2020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목소리가 목소리의 모순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수정하는 순간

단일화 할 수 없는 목소리의 층위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아론 소킨, 2020)

★★★☆


1960년대 미국은 아니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며’ 공론장을 구축했다. 발화자들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쌓여온 억압의 크기에 비례하여 드높았다. 자유와 평화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와 같은 기표를 가진 억압의 목소리 역시 거대해졌다. 극단의 거대한 두 축이 충돌하며 사회를 유지 혹은 재정의하고자 했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이 충돌의 번쩍임을 ‘실화’를 통해 들여다본다. 충돌하는 양 극단의 힘을 영화화할 때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선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상으로 악을 사용하는 방법은 매력적이다. 메시지를 명증 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사적 긴장을 끌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관객을 스크린 밖의 안전지대에 두면서 철저하게 외부 관람자의 태도를 유지하게 한다. 이런 영화는 그 메시지의 층위를 떠나서 선전적이고 선동적이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관객의 몰입과 거리두기에 있어 효율적이다. 거리의 시위 장면은 흑백 인서트 쇼트를 통해 감정적 분출을 ‘사실’에 가깝도록 유도한다. 재판 장면은 판사 율리우스 호프먼(프랭크 란젤라)의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를 통해 선과 악의 대립을 명증 하게 보여준다. 율리우스 호프먼의 부당한 목소리에 맞서는 시카고 7 그리고 흑표당 의장 바비 실(야히아 압둘 마틴 2세)의 언술은 그들의 목소리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여타의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의 힘은 애초 시카고 7 내부에 내재한 다양한 목소리를 단일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다성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정의라고 말하는 지점의 균열을 드러낸다. 영화 후반 윌리엄 컨슬러(마크 라이런스)와 톰 헤이든(에디 레드메인)의 재판 연습 장면은 그래서 가치가 있다. 목소리가 목소리의 모순을 발견하고 스스로 목소리를 수정하는 과정은 어쩌면 이들이 추구했던 정의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 영화 엔딩에서 톰 헤이든은 재판 시작 이후 베트남에서 사망한 4,752명의 이름을 언급한다. 율리우스 호프먼 판사는 “정숙하세요” “이름이 4,500여 개라고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톰 헤이든은 계속 이름을 언급한다. 어느 누구도 톰 헤이든의 목소리를 멈추게 할 수 없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톰 헤이든의 목소리를 지우는 것은 ‘영화’이다. 재판 이후 시카고 7에 대한 이야기가 자막으로, 사운드가 톰 헤이든의 목소리를 잠식한다. 아무리 그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도, 그래서 지루하다고 해도,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의 톰 헤이든은 영화 안에서 4,752명의 이름을 언급했어야 했다.


(2020.11.2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