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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ture film Nov 26. 2020

<레퀴엠>

사라, 해리, 마리언의 눈물 그리고 관객이 찾은 거짓 위안

마리언, 사라, 해리의 눈물


<레퀴엠>(대런 아로노프스키, 2000)

★★★☆


TV를 지켜야 하는 사라 골드팝(엘렌 버스틴)과 TV를 팔아야 하는 해리 골드팝(자레드 레토)은 대립한다. 영화는 두 중독자에 의해서 시작된다. 해리는 TV를 가지고 나가려 하지만, 사라는 라디에이터에 TV를 묶어 놓았다. 물론, 사라는 해리에게 열쇠를 주고, 해리는 TV를 판다. 그러나 사라는 다시 TV를 사 온다. 그리고 다시 라디에이터에 TV를 묶는다. 멈추지 않는 두 인물의 중독을 이야기하기에 이 에피소드는 적절하다.      


그렇다면 두 인물의 중독을 바라보는 관객은 안전한가? 물론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중독은 그들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다시 보자,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관객에게 비슷한 장면을 반복한다. 사라가 TV를 켤 때, 그리고 해리가 마약을 할 때, 동일한 장면이 제시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반복은 관객이 현란한 영상언어를 받아들이도록 예비한다. 사라와 해리 그리고 해리의 연인 마리언 실버(제니퍼 코넬리)가 중독될 때, 관객 역시 이미지에 중독된다. 사라, 해리, 마리언이 몽환적 세계에서 충족감을 느낄 때, 관객 역시 현란한 영상에 현혹된다.      


즉, <레퀴엠>은 주요 인물의 중독이 아니라 이를 재현하기 위해 사용된 영상언어에 중독된 관객을 다룬다. 사라, 해리, 마리언은 이 벗어날 수 없음에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 어느 때보다 정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을 관객이 목격하게 한다. 이들의 눈물은 중독에 대한 후회, 혹은 반성이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적 스타일에 중독된 자신에 대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대신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레퀴엠>의 가치는 사라, 해리, 마리언의 실패가 보여준 교훈의 도덕적 잣대에 있지 않다. <레퀴엠>은 자신이 중독된지도 모르는 관객이 중독된 인물을 보면서 위안을 찾는 그 모순에 가치가 있다.          


(20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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