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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Sep 03. 2017

<오디세이> by 가레스 하인즈

신화에서 그래픽 노블까지.

고전, 그리스 신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이름을 많이 접했지만 읽어본 적이 없었다. 천년을 넘게 지속된 텍스트에는 분명 뭔가 있겠거니 했지만, 사실 그거 아니래도 읽을 것이 너무 많으니까. 또한, 그다지 흥미롭다 여기지도 못했었다. 그리스 신화에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쉽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리스 신화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시점에 나는 매우 어렸다. 선과 악이 단순하게 나뉜 이야기를 선호하던 나이였다. 사랑도 사람도 내가 바라는 모습만이 진실된 것이라고 믿던 나였다. 그러니, 신들의 왕이라는 제우스의 행동들부터가 이해가 안 되고, 매우 인간적으로 보인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갈 리가 있었을까.


그러다 그래픽 노블로 화한 <오디세이>를 읽게 되었다. 현대에 매우 가까운 매체로 옮겨진 서사시는, 약간의 지적인 흥미로움을 가져왔지만, 큰 감항을 얻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나라는 사람은 게임이나 영화 같은 훨씬 자극이 큰 이야기에 길들여진 현대인이니까. 하지만- 흥미로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학부 시절에 동아시아의 신화에 대한 교양 수업을 들었던 기억들이 살아나면서 이 이야기가 도대체 왜 이렇게 흘러왔나 분석하고 싶어 졌다. 


신화와 역사


하지만 내가 기호학, 신화학 등을 공부하거나 상징에 대해서 분석해 본 경험이 있는 것도, 미학에 대해서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기에, 그저 얕은 지식으로 그래픽 노블로 화한 텍스트를 해체하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뭐 이 글이 논문도 아니니 상관은 없지 않을까? 어쨌든 제멋대로의 상상 속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글을 쓰는 내 심정처럼, <오디세이>는 제멋대로다. 이제는 ‘여정’을 뜻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는 단어. 서점 검색창에서 오디세이를 치면 <미학 오디세이>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그런 활용이 드러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제멋대로의 상상이 수천 년을 이어져서 이제는 현대인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신화-종교가 공동체의 상상이라는 식의 접근을 한 <사피엔스>가 떠올랐다.


어쨌든 호메로스는 나 같은 일반인은 아니었을 것 같고, 그렇다면 ‘오디세이’에 담긴 이야기는 적어도 그의 관점에서의 역사의 기록과 더불어 신화 체계에 대한 접근일 것이다. 또한, 고대의 신화가 으레 그러하듯 사회의 규범체계의 근간이 되었을 것이며, 교육의 교보재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런 내용이 단순히 개인의 머릿속에서만 나왔을 리가 없으니 공동체의 기억들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문학성에 개인의 노력이 가미된 형태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산세가 험한 동아시아 지역만을 한정해보면 - 흑백 대립의 선악구도가 뚜렷한 신화가 잘 발견된다. 반대로 당시의 지중해의 기후는 온화하고, 살기 편한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스의 철학이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것을 방증하고. 따라서 가치의 다원성이 나름대로 인정되는 곳이 아니었을까. 한편으로는 여성 신격의 격하 현상이 생각보다는 약하다는 점이 있을 것 같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 가진 의미는 무엇이었을지 짐작하긴 어렵지만 -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일신 체계(가톨릭)가 오면서 종교 체계 자체가 뒤집혔기 때문에 그 격하가 더 강하게 발생하기 전에 신화는 ‘이야기’ 거리로 그 자체의 신격을 잃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가 종교이고 철학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해보면 - 각 신격들은 그 가치를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방대한 여러 지역의 신이 통폐합된 신화 체계에서 자연물에 기원을 둔 것 같은 여러 신격들은 저마다 ‘인간적’인 성격과 가치를 대변한다. 바다의 포세이돈은 아무래도 ‘가족’을 참 중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칼립소는 상처 입은 미중년을 좋아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서 - <오디세이>에서 신들의 실력 행사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라는 것이 아니다. 토의를 거쳐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려는 모습도 있으며, 신적인 행위는 이야기 전반의 보조도구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것처럼, 명계에서는 뒤를 돌아보면 안 되지만 돌아보는 것처럼. 금기에 대한 세계적인 신화 체계의 공통점일 수도 있으며, 인간의 부족함과 신에 대한 ‘원죄’ 같은 형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시 - 판테온의 신은 제우스, 헤라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 또한 그 신들 역시 대립각을 세우고 싸우고, 죽는 관계이기 때문에 기존의 해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인다. 신의 의지를 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하니까. 이 선택은 한 신에게는 사랑받을 행위이지만, 한 신에게서는 미움을 받을 행위이다. 


한때 ‘화약고’라고 불릴 만한 다양한 나라가 있는 지역의 신화 체계란 응당 이런 것이 되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 다양성 속에서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가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 같고. 한편으로는 그 다양성이 가져온 발전만큼, 거대한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잃은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역사와 현재의 미디어


그러한 다양성의 역사를 가진 신화는 왜 이 시대의 미디어로 다시 태어났을까. 처음에 던진 의문이 다시 든다. 왜, 새로운 미디어로 - 더 널리 퍼지게 하고 있을까. 사실 그 이전에 르네상스 때부터 지금까지 왜 사람들은 사실상 종말 한 ‘그리스’ 문명의 근간이 되는 가치 체계를 배우려고 하는가? 재미있기 때문에라는 말은 절반의 답변밖에 되지 않는다. 어쨌든 더 재밌는 것들도 있으니까.


역사란 거울이라고 하는 말. 혹은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역사란 과거와 오늘의 대화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말 그대로 ‘역사’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물론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들으며 잠든 세대가 트로이로 보이는 유적을 발굴해내는 일들도 있지만, 그런 고고학적인 중대한 발견들이 끝나고 나도 <오디세이>는 다른 미디어로 변주될 것 같으니 - 역사를 보기 위해서 이 이야기가 계속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리라.


현대에 ‘오디세이’ 가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이 이야기는 떠오른다. 그 모티프가 차용되는 다른 작품은 열외로 하자. 원전 자체가 여전히 의미를 갖는 부분은 과거로의 노스탤지어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먼 예전이다. 이야기의 신비함? 톨킨이나 마틴 - 아니면 롤링의 책이 더 훌륭하고 - 아니 적어도 현대적으로 적합하다. 이야기는 대체로 시대의 맥락에 따라 생동하니까.


그러니 <오디세이> 안에는 사람들이 찾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일신 교리에 사라졌던 만신전을 현대에 복원하는 것은 - 물론 콘텐츠로의 가치가 있기에 투자하는 것과 별개로 - 다양한 가치 체계가 혼선을 빚는 그 신화의 내용 자체가 현대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디테일로 들어가면 지금의 가치 체계와 사뭇 다른 이야기들이 있지만 여러 가치 사이에서 혼란의 항해를 계속하는 모습은 매우 현대적이지 않은가? 적어도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올리는 이야기보다는 말이다. 


현재의 미디어와 미래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이다. 물론 나는 이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어쨌든 메신저 자체도 미디어이고, 메신저도 메시지가 될 순 있겠지. 미디어도, 메신저도 매개자이며, 전달자이다. ‘오디세이’는 과거 호메로스에게서부터, 구전으로 혹은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고 기록되었으며, 여러 ‘번역자’와 ‘검열자’라는 메신저를 통해 현대로 전해졌다. 


그리고 가레스 하인즈라는 메신저는 이야기를 ‘그래픽 노블’이라는 미디어로 담아 <오디세이>를 펴낸다. 그렇다면 이 미디어는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아마, 이 미디어를 통해 ‘오디세이’의 수명은 연장되고, 어떤 이들은 나처럼 ‘오디세이’를 가레스 하인즈의 글과 그림으로 처음 접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미디어에 담긴 이 ‘오디세이’는 가레스 하인즈의 ‘해석본’이며 또한 이 시대의 맥락을 의도했건 아니건 담아낸 작품일 것이며 천년 넘게 이어온 이야기의 맥락의 확장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디세이아’ 본인처럼 시간을 항해해왔고, 앞으로도 고향에 닿을 길은 없어 보인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라거나, <창세기전 시리즈> 라거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라거나, 그 단어 자체가 원전과 달리 변주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건 ‘그리스’의 신화이며, 현대의 신화는 ‘영상매체’ 에사 ‘게임’ 까지 확장되었고, 이제는 기술이 더 발전하면 그 신화 속에서 개인이 직접에 가까운 간접 경험을 하는 시대가 될 것이니까.


그러니 서사시의 미디어를 벗어던진 - 그리스 고어를 벗어던진 이 이야기는 그 모습을 바꾸어 계속 항해할 수밖에 없으며 이야기가 담은 내용과 배치되게 - 다시 서사시로 돌아가지 않고 변주될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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