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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Nov 02. 2017

<#혐오ㅡ주의>

by. 박권일, 허윤, 위근우, 이준일

2018.05.04

본 리뷰는 책 <혐오_주의>와 브런치 작가 MC워너비 님의 글 <혼자 화난 래퍼들> 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최초 업로드 시, <혼자 화난 래퍼들> 에서 인용한 글들의 원 출처를 밝히지 않고 제목만 명시해서 업로드하였었습니다. 이에 해당 부분을 수정 진행하였습니다. 

본 글에서 한국 힙합씬에 대한 분석은 모두 해당 글, <혼자 화난 래퍼들>에서 참조한 것입니다. 
인상 깊게 읽은 글 '혼자 화난 래퍼들'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글의 저자이신 브런치 작가 "MC워너비" 님 죄송합니다. 

추후 글에서 인용 및 출처 표기를 확실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혐오 혹은 사랑 그리고 우원재와 릴 디키.


박권일은 혐오는 '증상'이라고 진단한다. 그 증상의 이면에는 '과잉 능력주의' 가 있다고 주장한다. 혐오는 분노와 다르며, 타자와 나를 구분지어야 하는데 거기서 나의 정당성의 근거가 '능력주의' 적인 서사에 근간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능력주의는 다분히 자의적인 것이며, 또한 전근대적인 우열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것이다. 게토를 탈출한 흑인들의 성공 서사가 한국에 와서 <혼자서 화난 래퍼들>(MC 워너비)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분명한 분노의 대상이 없었기에, 약자를 혐오하느 방식으로 서사는 쓰여왔다.


그러나 그 자신의 순수성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그렇게, 혐오는 강화된다고 김학준은 지적한다. 나는 정상인, 평범한데, 너희들이 반칙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 반칙의 대상들 중에는 '정치'를 하는 이들이 있다. 기존 정치에의 환멸에 덧씌워진 혐오의 이미지느 그 행위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데, 너는 왜 게임의 룰을 바꾸려고 하는가? 같이 신자유주의적 심판대에 올라야 할 것 같은, 그래서 내가 이겨야 할 대상들이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다. 강원랜드의 입사 비리 보다도 더. 왜냐면 인맥을 통한 행위는 오히려 정상적이라는 학습의 과정이 있었을 테니까. 또한, 그들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 강자이니까.


여성 혐오, 혹은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운동' 에의 혐오는 이 논리를 그대로 가져가게 된다. 다마 다른 지점은, 지금의 '현대적인' 이 '여성주의' 활동은 가끔 보이는 미숙함 만큼이나 거대해서 다른 약자에 비해 가장 '강한' 상대이라는 점이다. 특히 육체적인 우위를 가져가기에 현대사회는 두뇌를 사용하는 다른 행위에서 부가가치가 더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나 남성들이 가진 무기는 기존에 수천 년간 만들어놓은 구조 자체에 있기 때문에 - 여성은 약자 중에서 강한 거지, 사실 승리의 길로 가기에는 아직 미약하기 짝이 없다. 허윤은 이런 지점에서 '성차'를 정치적 의제로 가져와야 함을 역설하지만, 그 길이 지난할 것이라는 점은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위근우가 지적한 것처럼,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여러 '여성 혐오' 적인 장치들은 '허윤'의 주장을 강화해주다. 미러링에 대해서 '순수하지 않은 페미니즘'이라 매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이 방식이 '효율' 적이거나 '효과' 적일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허윤이 말한 것처럼 약자들의 연대를 이루기 위해선 좋은 방법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여성 혐오적 내용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프로불편러' 혹은 만물~설 식으로 매도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기도 어렵다.


적어도 최소한으로, 과도한 혐오발언에 대한 규제장치로 법이 있다면 어떨까. 이준일은 '아나운서' 혐오적 발언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가지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을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음을 들고, 외국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사회에 필요하다면 일정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입법활동을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해준다. 필요한 일이지만 그러한 법이 있다고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서구권 국가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상술한 한국의 힙합의 이야기. 블랙넛에 대한 비판과 인맥 힙합에 대한 비판 - 유교 힙합에 대한 거부. 이런 이야기가 떠오른다. 흑인들의 게토 탈출 서사(혹은 에미넴의 디트로이트 탈출?)는 한국을 헬조선이라는 '게토'로 묶는 로컬라이징이 되었지만 - 제도 그 자체에 대한 고민 없이 '탈출' 그리고 '솔직함' '순수함' 만 남게 되었다. 일리네어를 부러워하고, 그 멤버를 가지고 말장난을 하는 블랙넛을 통해 해학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 안에서 소수자는 도구화, 대상화될 뿐이다. 나는 평범하고, 너무 힘든걸.


우원재 역시, 자신을 평범하다고 정의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가사만 쓰진 않는다. 그러나 소수자를 적으로 삼거나, 스스로의 성공을 빌미로 노력-과잉 능력주의적 서사를 답습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나' 임을 이야기할 뿐. 구조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지만 어찌하라는 말은 아끼고 -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음을 고백한다.


릴 디키는 <Professional Rapper>에서 현재 힙합신을 만든 주축 '스눕독' 에게 'Anti-rap'을 제시한다. 나는 다른 길을 걸어보겠다고. 평범한 중산층에서 나고 자랐음을 고백한 릴 디키가 엄청나게 진보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쩌면 필요한 무브먼트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하며 좋아요를 눌렀었다.


영화 <청년 경찰>과 <범죄도시> 가 외국인을 다루는 모습은 다르다. 전자에는 범죄자로의 모습만, 후자에는 생활인의 모습도 담겨 있다. 때문에 두 영화에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마땅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외국인 집단이 <범죄도시> 에도 그 혐오적인 표현을 중단해 줄 것을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두 영화를 같은 범주로 보는 것은 우리 안의 진보적인 행태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혐오 혹은 다른 혐오에 대한 우리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현실에 가까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준일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법적인 조치를 통하여 우리가 심각한 혐오적인 표현에 대해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안에 평범함에 대한 처사 혹은 과잉 능력주의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타자화, 더 본질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경쟁 상대가 되는 상황을 바꾸지 않는 이상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다. 


 혐오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사랑뿐이라는 말은 굉장히 낭만주의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혐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다분히 정치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원재와 릴 디키가 완전히 다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단초를 제시해주었다 고생한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우리 안의 편견 혹은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더 나은 우리가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공격해야 되는 상황에 쳐했다.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범의 서사에 대해서 나 역시 일정 부분 공감이 되었던 지점이 없지 않다. 일종의 본능적인 동질감을 느꼈다. 경쟁사회 있어서 스스로를 스스로를 인정하여 자존감을 높이지 않는 이상 그러한 논리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자존감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자존감에 관한 심리학 책이 아무리 많아도 한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혐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소수의 선각자들이 행동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치적인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여성 혐오의 문제만 해도 모든 여성이 동참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으로 계급의식을 자각하는 것만큼이나 소수자들이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자각하는 부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페이스북에서 각광을 받았던 <며느라기>라는 웹툰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우원재가 그랬듯 릴 디키가 그랬듯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정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혐오는 박권일이 지적한 것처럼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에게 있는 그 문제가 타자로 인한 것이라고 오해할 때 강화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은 나와 그들이 다르지 않다는 연대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 첫 단계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서 자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스스로를 둘러싼 상황을 인지하고, 그 안에 함께 고생받는 타인들을 인정할 때, 혐오의 감정이 극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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