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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스푼

마음더드미

글스푼 #00001

by Jamin

이영도의 책 <그림자자국> 에서는 ‘마음더드미’ 란 단어가 나온다. 저자의 조어이겠지. 책의 내용으로 유추해보면 타인의 마음에 조금 더 민감한 사람을 뜻하는 것 같다. 저자의 의도야 책이 세상에 나오고 나면 절반 해석일 뿐이니, 적극적인 내 해석을 덧붙여야겠다. ‘마음더드미’ 란 공감능력에 대한 비유이며, 그 공감능력의 범위에 대한 묘사이다.


이런 정의 아래로 주위 사람들을 구분해본다. 마음더드미가 긴 사람들이 왕왕 있다. 짧은 사람도 있다. 가치판단의 영역은 아니다. 다만, 전자의 경우에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알아요’ 라는 표현을 연상케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마음더드미가 긴 사람들에게 냉혹하기 때문이다.


선한 의지 만으로도 괜찮을까. 그런 건 동화책 속에서나 가능해 보인다. 세상은 복잡하다. 또한 좋고 나쁨, 선하고 악함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이 사회에 엉켜사는 구성원이 다양해질수록 이 현상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다. 이해관계라는 것은 세상에 사고하는 존재들의 수의 제곱보다도 크다. 관계란 쌍방, 혹은 그 이상에서 발생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나는 마음더드미가 긴 사람들이 좋다. 5년전의 나라면 ‘병신과 개새끼’ 중에 택한다면 그래도 ‘병신’ 을 택해야지! 라고 답할 것 같다. 당시에 이 생각은 ‘4대강’ 사업 관련한 양심 발언을 한 연구원의 기사를 보며 떠올렸었다. 참으로 마음더드미가 길구나, 그런데 제 새끼는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저러다.


그 일이 있은지 수년이 지났다. 그 사람이 어찌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나는 마음더드미가 짧은 사람인지라, 관심을 오랫동안 끊었었다. 영화 <1987> 에 나오는 ‘의인’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도.. 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더드미’ 가 짧은 사람이 살아남는 쪽의 적자생존과정을 거쳐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획자. 상품을 판매하는 사람들. 어쨌든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공감’ 능력이 높거나, 지적 수준이 높아야 한다. 왜냐면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이해해야 파는 물건을 기획하고,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적어도 대량생산의 시대, 대중매체의 시대에 접어들기 전에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1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고, 매체가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이 관계는 ‘이해’ 하는 것 보다 ‘설득’ 아니 ‘세뇌’ 하는 쪽으로 바뀐 것 같다. 마음더드미가 긴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 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분석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것 같다. 광고와 선전, 알고리즘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아직도 디자인 사고라던가, 츠타야 서점의 성공기 같은 책에서는 공감 능력, 대상에게 얼마나 몰입하는지에 대한 능력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마 그렇겠지, 그 영역에서만. 대다수의 영역에서는 경쟁이 강력하기 때문에, 내가 설정하는 어젠다를 밀어붙일 수 있는 영역에 있는 개인 혹은 단체가 되기 전까지는 기존의 흘러가는 시장의 논리를 뒤집기가 어렵다.


정말로 그렇게 끝나 버릴까. 마음더드미가 긴 존재들은 바보 취급 받는 사회가 계속될까, 고민해보게 된다. 우선은, 마음더드미가 선천적(nature) 인가 후천적인 습성(nurture) 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가설은, 우리가 커뮤니티를 ‘지구촌’ 까지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마음더드미 길이를 후천적으로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정말 문제는 다시 ‘마음더드미’ 가 긴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마음더드미가 긴 사람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후천적으로 마음더드미를 늘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여기에서부터는 말문이 턱 막히게 된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세상에 선한 의지만으로 충분한 때가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은 평생을 가지고 갈 질문일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직까지는 마음더드미가 긴 사람들이 멸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설계하는 것은 나보다 더 나은 자들이 해주길 기도하며, 나는 그들이 멸종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함께 살면 즐겁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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