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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Sep 20. 2016

안녕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2016년 경주 지진 이후, 옛 글을 꺼내어 고쳐 씀. 


1. 진짜, 우리는 안녕할 수가 없었다.



정말 안녕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안녕하냐는 물음에 한국 사회는 2013년을 끝맺었다.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이 있었는가. 나는 모르겠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뿐, 답변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답변을 하지 않았는가? 원 질문의 대상은 누구였는가? 그대들은 안녕하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다양한 답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시민이라는 답변이 타당하다고 가정해보자.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럼 어떤 것일까? 안녕하냐는 질문에 예, 아니오 라고 답변을 해야 했을까. 안녕하냐는 질문에 들불처럼 일어났다던 그 많은 자보들은 예, 아니오로 끝나진 않았다는 점으로, 예/아니오 질문이 아니라고 추정해볼 수 있겠다.


사실, 엉터리 질문이다. 누구한테 묻는지, 안녕한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안녕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하나도 정의 내리지 않았으며, 의사소통 이전에 단어 정의에 있어서 많은 단계를 생략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답변을 기다리는 질문이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뉘앙스 자체는 우린 안녕하지 못하고, 안녕할 수 없다. 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가?라는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해) 식의 질문은 아니었는가.


사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안녕에 관계된 ‘요인’은 다양하며, 그 이해 관계자 역시 다각도로 형성되어 있기에 누구의 안녕은 누군가의 불안과 직결될 수 있다. 따라서 그 범위를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안녕함은 나뉠 수밖에 없었다. 최저시급이 오른다고 전 국민이 좋아할 순 없다. 그래서 만약 그 질문이 자신이 생각하는 특정 계급, 범위의 사람에게 던져준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안녕하십니까 라는 질문은 우리 모두가 어쩌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말 그대로 답정너. 정말 우리 사회 전반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그게 철도 민영화, 의료 민영화 이슈일까. 중요한 이슈이지만, 어쩌면 표면적인 일이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 라는 느낌이 2014년, 모든 것이 바뀐 바쁜 일상에서도 내게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마우나 리조트 사고와 세월호 사고에 있어서 나에게 분명하게 다가왔다. 시스템이다. 잘못된 시스템이 개인을 짓누르고 있다.




2. 큰 시스템은 어쨌든 희생양을 만든다.


정부는, 기업(법인격)은 실체가 없다. 우리는 그런 시스템(사회, 국가)을 만들었다. 유명한 말.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사회를 발명해내고 구성해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언제 죽일지 모르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규칙을, 법규를 그리고 처벌제도를 만들었다. 누가 책임질 지를 문서화하였고 책임자를 뽑는 방법을 얻기 위하여 유혈항쟁을 계속하였다.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하여 총칼을 들었고, 책임자를 바꾸기 위해 피를 흘렸다. 잘못된 책임자 아래에서 눈물을 흘렸고 가끔, 책임자가 죽거나 사라질 때, 눈물 흘리고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국가라는 시스템을- 사회의 자양분이 되었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적어졌다. 사회의 덩치가 커지고, 그 사이의 연결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위험사회’로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어찌할지도 무섭지만- 사회와 시스템이 나를 잡아먹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회를 우리는 — 발명하고 구성하였다. 그 어느 개인도 — 그 대단하시다는 미국의 대통령조차도 — 시스템을 바꾸는 데 있어서 이기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오바마케어와 관련된 미국 사회의 움직임은 단일 개체로 존재하지만,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증명했다. (그 많은 음모론을 차치한다면 말이다. ) 그래서 우리는 대중의 방향성을 사회학적으로 예측하고, 한 개인의- 종족의 발전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연구해나간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그 사이 미묘한 유기적 연결성을 우리 세대엔 규명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가위눌린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실체인, 시스템은 개인이 버틸 수 없는 무게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을 나눠주며 살아가는 존재로 진화해왔다. 내가 힘들어도, 혹은 내가 죽어도 남겨진 이들을 위하여. 한없이 이기적인 유전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위할 수 있는 선함을 키우도록 교육받는다. 시스템이 무거워질수록 우리는 우리를 나눠주도록 진화해왔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 나눔이 중단되는 순간, 우리는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믿음이 사라진 시 우리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아니다. 무언가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훈육된 사람들은, 남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나서 허상이 되어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사라진 시대로 가고 있다. 그래서,’ 팩트’라는 단어는 무서운 것이었다. 과학적 사고는 매우 훌륭한 도구이지만, 모든 일에 근거’만’을 요구하는 방식은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거나, 잘못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기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 숫자와 분명한 증거가 없이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과거 우리는 그 역할을 ‘미디어’, 언론과 뛰어난 소수에게 맡겨 버리었다. 개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류에서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라는 혁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정보의 전달 속도, 전파 속도가 급격하게 커지며, 개인의 의견이 대중에게 전파되는 시간은 극도로 단축되었다. 사람들의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 없다고 하여도, 이 빠른 속도는 결국 비극적인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답이 아닌, 최적의 길을 찾아야만 하는 집단의 이익 갈등의 상황은 연결사회에서는 이분화된 국민, 시민 집단을 양성하였다. 비록, 그들 개개인은 아닐지 모르나- 인터넷에서 의견을 표출하는 집단은 결국 양분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미디어는 다급해졌다. 언론은, 바빠졌다. 보다 빠른 개인에게 이기기 위하여 ‘신뢰’ 보다는 ‘속도’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결과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 ‘불신사회’의 재림이다. 사실 언론만은 아니다. 정부도, 위기 시의 시스템, 프로토콜도 실종되었다. 그리고는 결국 다시, 그 책임을 한 개인에게 전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스템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기에 희생양을 찾고 있다. 시스템을 믿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에는 제정일치 시대 고릿적 인신공양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하고,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실체가 없는 시스템을 믿어야만 했고, 그 시스템은 희생양을 찾아냈다.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나는 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한 개인이 잘못한 부분은 물론 크다. 그러나, 그것은 ‘시스템’ 속에서 야기된 수많은 문제 중, 제법 비중이 큰 하나일 뿐이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동작한다면 개개인의 역량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은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스템을 움직이는 모든 개인이 잘못되었거나 시스템이 잘못 구성되었을 때이다. 작금의 세월호 사건은, 슬프게도 두 개의 요소를 거의 다 보여주었다. 선박의 안전장치, 대피 프로토콜 무엇 하나 제대로 구성된 것이 없어 보였고,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은 모두 다 잘못되어 보였다.(그리고 이건, 더 큰 시스템의 문제를 의미한다.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더 큰- 예를 들면 법적 장치가 동작하지 않았다는 것의 방증이니까)




3.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다고 믿을 수밖에 없기에, 시스템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을까. <영웅본색 1>의 마크(주윤발 역)는,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한탕을 하러 가는 길에 관제묘에서 ‘난 신을 믿는다. 운명을 관장하는 자가 신이다. 난 내 운명을 관장하기에, 나는 신이다’라는 식의 대사를 내뱉는다. 유치하고,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오래된 영화의 대사는 이제 와서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에의 내 답변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운명은 없다. 시스템과 시스템, 시스템 내부의 상호작용들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인과관계 속에서 무엇인가 결정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운명인 것만은 아니다.


나무위키에서 겨우 찾은 실제 대사. 더 중2하긴 하다..


나도, 아직은 나를 믿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항상 믿고 있다. 그래서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 하나 만을 믿고 있다. 그럼에도 시스템에 짓눌려 많은 밤을 눈 뜬 채로 보내었다. <같은 꿈을 꾸다 in 삼국지>라는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아신아(我信我). 나는 나를 믿는다. 스스로의 선택에 흔들릴 때마다 주인공의 멘토는 단 하나의 메시지만을 남긴다. 그것이 비록 잘못되었을 지라도, 믿는 수밖에 없고 전심전력으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통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하는 것 같다. 변화를 일으킬지 못할까 두렵고, 나 혼자 피해를 입을까 두렵고. 그것이 나는 소시민의 모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용기가 없을지언정, 가장 착한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가만히 있으면 손해인 것 같고. 하지만 이들이 움직이지 않는 한, 그들이 스스로의 ‘선한 마음’을 믿지 않는 한 이 시스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결국 시스템의 실체는 이 보통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나는 안돼, 난 못해’가 이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이유니까.


이때까지 이 착한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비극적인 영웅의 죽음(고 김주열 열사, 고 박종철 열사, 고 이한열 열사, 고 전태일 열사….)이나, 끔찍한 참사(삼풍백화점 사고 이후 건물 안정성 점검, 스리마일-체르노빌-후쿠시마 이후 반핵 운동, 대구 지하철 사고 이후 지하철 내 안전 점검 등) 이후에만 이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제대로 작동하는 ‘언론’의 역할이 분명 컸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금에 와서는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강화되어 ‘언론’은 길을 잃고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4. 이미 늦었기에,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서로 믿을 수 있을까.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며, 함께 갈 수 있을까. 같이 갈 수 있을까. 어쩌면 너무 늦지 않았을까. <드래곤라자> (이영도 저)의 대사 중 하나는 ‘선한 마음 만으로 충분할까요’이다. 작중 칼 헨턴트의 이름을 빌어 작가는 ‘황소를 타고 마법검을 휘두르는 왕자가 있는 중에는 우리는 그럴 수 있다”라고 답한다. 그, 황소를 타고 마법검을 휘두르는 왕자의 사후, 너무도 현실적인 전쟁을 치르는 칼 헬턴트의 모습을 통해서 나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황소를 타고 마법검을 휘두르는 유쾌하고 즐거운 영웅이 필요하구나. 중학교 무렵 생각했던 것이었으나, 여전히 그 울림을 가진 생각이다. 영웅주의에 휩싸일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서로를 영웅으로 여겨주며, 믿고 사랑하면 된다. 그런 세상에서야 비로소 선한 마음만으로 충분하고, 선한 마음을 믿을 수 있지 않을까. 황소를 타고 마법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이미 늦었다. 죽어서야, 그들은 세상에 알려진다. 의사자로 추진한다 어쩐다. 그런 사람들이 눈물과 함께, 친숙하게 다가왔다. 이미 신뢰는 깨어진 것이다. 미국 영화 속이 아닌 이상 영웅은 대개 차가운 시신인 상태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들을 지키고, 함께 가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신뢰를 다시 되찾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남을 믿어주어야 한다. 누가? 우리 모두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스스로를 믿으라 말해 주어야 한다. 그래도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너를 믿으라고. 종종 오보에 휘둘리고, 선동에 휘둘릴지언정 그 마음, 어떡하 든 무엇이든 하고자 한 그 착한 마음을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고. 설령 잘못되어도, 난 비웃지 않겠노라고. 계속, 하자고 함께.


그래서 나는 현직 대통령이 당선되는 시점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의 대처가 충분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행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모든 보통 사람들, 그대들이니까. 그래서 Keep Angry 하길 원했고, 그 착한 마음이 실망으로 번져 포기하지 않기를 원했다. 비록, 이런 슬픔이 있고 나서야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처음엔 실망을 했지만, 짧은 생각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늦게나마 부칠 수 없었던 편지처럼, 서로 함께 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해보고자 글을 쓴다.


5. 다시 글을 고치는 이유.


나무위키 경주 지진 관련 항목 중

지진이 있었다. 비록 귀성길에 지쳐 이른 잠에 빠져서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찔한 침대 속이었다. 그래, 더 이상 이불 속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가 될 수 있단 거다. 잠을 깨고 나서, 어떤 물건을 챙겨서 나가야 하나 고민한 시간이 있었다. 물, 비상식량. 오늘 경주에 여진이 났단 소식을 듣고는 부모님께 외장 배터리를 큰 걸로 하나씩 선물해 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용법도 정말 친절히 알려 드리고.


이런 마음 가짐으로 남에게 다가갈 순 없을까. '있다'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나에게 집에 전화해보라고 카톡을 날렸을 것이다. 잘 소통하지 않는 단톡 방에서는 본인의 일이 아닌데도 큰일이 없어야 할 텐데 발을 구르는 듯한 메시지들이 남겨져 있었다. 


뭐,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갈 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옛글을 고쳐 써본다.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열풍 시기 찍었던 사진 중 하나


초고: 2014년 4월 28일

탈고: 2016년 9월 19일


사족. 처음 글을 쓸 때는 그래도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강했는데, 오늘 고쳐 쓰면서는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무슨 변화냐 이건. 


사족 2. 밤이 늦어서 수정 중단. 또 한 2년 뒤에 고쳐 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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