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결사회(Hyper connected world)를 맞이하며
애플은 그것 말고도 죽인 것들이 참 많다. 블랙배리가 열심히 해봤자 모바일 디바이스의 물리 키보드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이게 잘못된 처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좋은 디자인은 종종 '쓸모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 오디오 단자가 쓸모있냐, 없냐를 생각하다보니 옛 글과 생각이 떠올랐다.
한 공공의료원이 문을 닫으며 시작된 생각이었다. 당시 발행된 시사인 302호의 커버스토리는 진주의료원 사태로 붉어진 ‘공공의료원’에 대한 르포 기사였다. 파주 의료원을 취재하여 진주의료원과 비교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모든 글을 감싸는 문장은 ‘존엄을 돌보는 병원’이다.
초연결 사회에 대한 글(손재권 기자님의 점선 잇기 블로그)을 최근에 보았다. 토머스 프리드먼(세계는 평평하다 저자)의 강연에 대한 글이었다. 그리고 평평한 세계에서 초연결 사회(Hyper connectivity)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IT 분야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초벌 번역으로 인한 독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문장 하나하나의 가치가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초연결 사회. 이제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시대가 열리며 수년 전의 핫 키워드인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실현 혹은 그 전제가 되며 전 채널에서의 소통/통신(Omni channel communication)이 진행될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고, 인류의 사회는 다시 한번 변할 것이다. 이를 기술을 기반으로 분석하거나, 여기에서 사업의 기회를 포착하는 것도 유의미한 사유의 과정이겠지만 나는 왠지 이 개념이 낯설지 않다는 데에서 이 글을 쓸 결심을 시작하였다.
그 익숙함은 틱낫한 선사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예전 틱낫한 선사의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류시화 시인이 편찬한 책을 샀었다. 그 이야기는 바로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나온, '종이를 보고 구름을 떠올리는 사유'에 관한 것이다. 유사하게 내 머릿속을 비껴간 것은 카오스 이론이다. 카오스 이론을 빈약한 나의 머리로 이해한 것은, 불확정성, 불규칙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해석할 수 없는 규칙의 존재였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연관성 없는 것들의 인과관계로 파악된 것이 아니라, 내 사유의 범위 밖의 규칙의 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연결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불교의 업보, 카르마 모든 것이 이러한 사유의 바탕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교때 수강한 '동아시아 신화' 관련 강의에서 대칭성 사회의 인식, 자연과 인간의 대등함에 대한 신화적 사유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다수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류와 사물(동물식물 포함)이 한 신에게 창조되었다거나(하나의 알-우주란 에서 나왔다거나) 인간과 곰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만주 지역으로 한정 지어 그 신화를 바탕으로 ‘대칭성 사회’의 인식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연과 인간이 1:1 대칭 관계로 인식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단군신화의 웅녀의 경우 곰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는 신화가 기록되는 시점에서의 사회상에 맞춘 변형이라는 설이 있다. 만주 지역 민족의 신화에서는 곰 토템과 이를 관통하는 곰과 인간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이 경우에는 곰이 굳이 인간으로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사유는 과학기술의 한계, 문명의 발전 속도의 차이에 따른 자연환경에 대한 의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서구 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를 굳이 이에 비교하여 판단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회의 과학과 사회학적 성취가 ‘서구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뒤쳐져 있다고 하여 그들의 사유에서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카오스 이론이 나온 이후로는 어느 정도 겸허히 수용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적어도 지금의 인간의 사유체계와 과학기술은 자연의 모든 연결성은 ‘확실하게’ 분석해 낼 수 없다.
중국 남부 지역의 민족 중 하나는 ‘용수’를 일종의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고 한다. 제주도 지역의 당이나 한반도 지역의 서낭당, 일본의 신사와 같이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보존하고 있다. 용수는 앙코르와트에서 볼 수 있는 뱅골 보리수의 일종으로 독수성림(하나의 나무가 숲을 이루다)하는 나무로 굉장히 큰 나무이다. 하지만 경제적 가치는 대체로 그 민족에게나 자연의 활용도가 높은 선진국에게나 없는 나무이다. 열매도 없고, 펄프로도 활용 가능성이 낮다.
용수: 대만고무나무, Chinese Banyan(반얀트리 호텔 할때 그 반얀!) 앙코르와트를 침범하는 나무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대체로 한 민족의 성스러운 나무는 신화나 전설의 서사 맥락 속에서 읽히는 경우가 많고, 그 이전에 성스러움의 형성되는 시절의 민족의 경제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묘족의 경우 단풍나무가 약재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사용된다. (물론 건축에도). 그렇다면 이 용수는 어떻게 한 민족의 신성한 나무가 되었는가? 신화와 역사 사이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그들이 용수를 베어내고 농경지를 개척하지 않음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이다.
독수성림하는 이 나무는 넓은 그늘이 되고, 그 아래 소위 쓸모 있는 작물은 쉽사리 자랄 수 없다. 자연적으로도 과일을 맺는 나무는 용수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수풀은 우거지고, 벌들과 나비가 모여드는 꽃들이 피어날 수는 있다. 꽃가루 운반자로의 이 곤충들은 수많은 자연의 관계, 인과율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세계는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를 하였다. 이는 식물을 열매 맺게 하고 그를 통해서 모든 동물들이 먹고살 수 있는 것을 보고, 자연이라는 시스템에서 시대의 위대한 지성이 발견한 하나의 연결고리가 아닐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용수가 있음으로 그 민족은 단기간의 경제적 이점을 취할 수 없었지만 장기적으로 민족이 살아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경작하고, 살아갈 수 있는 데에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사실, 용수가 거추장스럽다고만 인식했다면, 고도의 기술도 필요 없이 화전의 방식으로도 경작을 시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들의 선조의 지혜 덕분인지, 단순한 우연인지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선택은 꽤나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나오는 쓸모없기에 살아남은 나무에 대한 고사는, 여러모로 씁쓸하게 이 지점에서 연결이 되고, 비슷하면서도 대조된다. 이 고사에서는 쓸모없기에 나무가 살아남았다고 이야기한다. 허나, 용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 지향점은 유사할 수 있다. 쓸모가 있는 나무는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쓸모는 인간들에게 결정된다. 그에 따라서, 그리고 그 인간들의 판단에 따라 자연은 변화해왔다. 어쩌면,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의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인슈타인의 예언이 틀렸다면 좋을 것이다. 적어도 벌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영국의 작가 더글라스 애덤스는 그의 대표작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지구의 멸망을 예고하는 동물들을 그려내며, 그중 다수가 인류보다 뛰어난 지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외계의 존재라고 묘사하였다. 이 멋진 블랙 코미디를 재현한 영화판에서는 그중 돌고래가 떠나며 부르는 노래를 그려내고 있다. 그 가사 중에선 말이 있다면 알려줬겠지만 당신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있지요.라는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어쩌면 자연이 말하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초연결 시대에는 모든 객체,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말을 하게 된다. 신발도 말을 할 것이고 옷걸이도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결 속에서 새로운 기회가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 속에서 우리가 끊어버렸던 연결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할 필요는 있다. 어쩌면, 수십수백 년이 지나도 가치가 있는 오랜 지혜의 근원은 그 자연 속에서 비롯되었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이미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그리고 감히, 돌아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보다 더 연결되어야 하겠지.
물론, 아직 갈 길은 너무나도 멀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해결되지 않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 그것을 초연결 시대에서는 어떤 해법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그 단초가 연결의 창조가 아닌 복구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잡설을 풀어 보았다. 이는 ‘공존’의 개념이다.
그리고 각설. 진주의료원 등 사태를 보며 위와 같은 사고를 거쳐, 2가지 관점에서 보게 되는데, 쓸모없어 보이는 그곳은 사실은 무언가를 지탱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 두 번째. 우리는 그곳에, 사회적 이슈 속에 말 그대로 연결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지근거리 사람,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사람들은 연결되지 않았거나 연결되었음에도 공감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게 된다. 사실 결국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나는 여전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는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초고: 2013 06 23
탈고: 2016 09 21
사족. 쓸모없다던 용수는 분재로 잘 쓰이고 있다. 검색하다 보니 나도 하나 장만하... 아니 분재 주제에 너무 크다. 그리고 잘 자란 녀석들은 요즘 관광자원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뭐. 나무란 오래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