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min Oct 12. 2016

Like-inflation Society

우리 모두 좋아요를 좋아하지 않는가

그렇다. 나는 페이스북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걸 두려워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좋아요'버튼에 대한 조악한 분석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다른 자료를 정리하다가 그 글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움에 떨며, 고쳐 써 보았다.




페이스북은 아주 간단한 버튼 하나로 쉽게 페이스북 친구 간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를 확장하여 특정 개체에 대한 호불호를 좋아요 버튼 한 번으로 판단하게 하여 쉽게 개개인의 취향을 특정, 구글과 오버추어 등의 온라인 광고 모델과는 상이한 새로운 광고모델을 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결국 페이스북은 이 좋아요 버튼을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누를 수 있도록 사용자들을 훈련시켜야만 했다.  


개인의 호불호는 그야말로 개인적이고 어쩌면 그로 인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 영역이다. 특정 사상에 대한 호불호를 생각하면 이 이치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이를 자신과 광고주가 제공하는 개체가 아니라 사용자가 생성하고 공유하는 모든 개체(콘텐츠)에 적용하여 이를 매우 가벼운 행위로 인식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불호에 대한 감정적인 판단은 굉장히 격렬한 것이라서 '누구누구의 글에 라이크를 누르는 사람은 차단하겠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기도 한다. 

(반면 트위터의 경우 팔로우/팔로잉 관계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미 충분히 팬 관계가 아닐 수 


그리고 이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과거 신한은행의 광고에서도 이를 활용했을 정도로 좋아요!라는 단순한 감정 표현은 빠르고 널리 퍼졌다. 온라인의 트렌드가 오프라인 술자리에서 활용되는 것은 가장 조악한 예시이지만, 가장 체감하기 좋은 예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특별히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서로의 좋아요를 기반으로 형성된 '페이스북 취향' 은 내가 보고 싶은 콘텐츠만 타임라인에 올라오도록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페이스북은 알고리즘을 개선하고, 또 개선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당연히 타임라인에서 시선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그들에 대해 이제는 '따봉충'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SNS는 집단지성을 각성시키고 활발한 의견교환을 발생시키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술적으로는 더더욱 선동과 프로파간다가 작용하기 쉬운 구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 혹은 유사한 서비스는 사용자를 만족시켜 서비스에 체류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서 광고 수익 및 기타 수익을 얻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때문에 쉽게 믿을 수 있는 콘텐츠가 내 타임라인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재스민 혁명이 소셜 미디어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의 힘과 자금력, 의지로 그 혁명을 분쇄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닐까.

(물론 뭐 꼭 그렇게 Vice versa는 아닌 것 같긴 하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은 사람의 넓고 깊은 감성을 '좋아요'라는 버튼에 축약시키고 그 외의 상호작용은 댓글을 통하여 작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언제나 댓글로 상호작용하기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의외로 페이스북 친구 가운데에서도 의외로 서먹서먹한 사이가 있다는 것이다. 댓글을 달기는 뭣하고, 해당 콘텐츠(페이스북의 경우 업데이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게 된다. 


현재로서는 이 조차도 제한된 범위의 사용자끼리 허용하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페이스북이 제공하는 친구 추천의 기능 등을 통하여 확장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좋아요 라는 것이 굉장히 흔하고, 자주 이뤄지는 상호작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광고에서 사용 가능한 개체에 대한 좋아요의 활용은 크나큰 변화를 겪지 않으리라 예상하지만 사용자 사이에서 공유되는 콘텐츠의 경우, (해당 사용자의 친구가 충분히 많은 경우) 페이스북이 제공하는 인기글이라는 콘텐츠 제공 화면을 기준으로 junk information으로 뒤덮이거나, 특정 프로파간다로 채워질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로 이걸 '좋아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크게는 페이스북은 '좋아한다'라는 단어 자체를 가볍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뭐, 어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 버렸고, 이 안에서 의미와 앞으로의 전략을 찾는 수밖에 없긴 하다. 좋아요로 뒤덮여서 페이스북은 나를 매우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돈을 주는 사람들은 내 이름을 특정하진 못해도 내가 어떤 범주에 반응할지를 쉽게 테스트해보고, '고객군'으로 묶을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정당운동을 한다면? 사회 운동을 한다면? 마찬가지. 


좋아요의 범람 속에 사실은 '내' 가 아니라 피상적인 내 '좋아요' 들이 군집하며 만들어낸 내 캐릭터는 나도 모르는 내 본능적 니즈를 함께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겟(TARGET)이 부모보다 자녀의 임신 사실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처럼. 뻔하게 데이터 시대에 개인정보의 가치라던가, 서비스를 설계할 때 너무 징그러운(Scary) 서비스를 만들어서 사람을 질리게 만들지 말자 라는 이야기를 하고픈 것은 아니다. 


그냥 다만, 좋아요가 넘쳐나는 만큼 더 좋은 세상이 되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생각을 길게 늘어뜨려만 보았다.  (원래 내 글에는 소재도 주제도 없는 게 제맛이지)



그리고 수년이 지나서 페이스북은 좋아요에 화나요, 슬퍼요 등의 버튼을 추가했다. 그 사이에는 페이스북이 감정 실험을 하기도 했다. 논문을 검색하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울증을 진단한다거나 자살을 감지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의 '좋아요' 정보를 페이스북은 가지고 있고. 


.... 결정적으로, 무슨 생각으로 저딴 글을 자신있게 써댔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물론, 무슨 말을 하고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저것도 프리스타일이었겠지. 


초고: 2011. 10. 11

탈고: 2016. 10. 12

매거진의 이전글 쓸모없는 것들의 아름다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