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소스 텍스트로 신화의 가능성에 관하여
본래 '신화'는 종교였다. 토테미즘, 애니미즘 혹은 어떤 형태라도 '종교'의 이야기였다. 자연히 신화는 소설의 원형이 된다. 종교에서 문화 콘텐츠로 넘어오는 것은 우리가 익히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신화는 동북아 지역 근대시기의 급격한 사회 변동에 학문의 대상으로, 그리고 이용의 대상으로 변모되기도 하였다.
동북아시아에서 신화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근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때문에 시작부터 동아시아 신화학은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중국, 일본 즉 동아시아 삼국에게 근대라는 시기는 모두 외부적 위협 속에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해가고 근대국가를 수립해가던 시기였다. “개국(開國)이란 자신을 바깥, 즉 국제사회에 여는 [開] 동시에 국제사회에 대해서 자신을 국가[國] 즉 통일국가로 선을 긋는다는 양면성이 내포되어 있었다”라는 표현처럼,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정의하는 시기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동아시아의 신화는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면서 그들을 결속시켜 강한 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기제로 작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본래 한 집단에게 진실로 믿어지며 전승되는 신화는 그 자체가 민족에게 동질감을 심어준다. 특히, 그 민족이 위기에 부닥쳤을 때 신화의 동질감 형성의 기능은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신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응하여 동아시아 근대 신화학자들이 신화 정리와 연구 작업에 열중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 에서 민족 집단 내에서 공유되는 상상을 말한 부분이 이 지점과 연계된다고 본다. 분명하게 대칭관계를 이룬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믿는 평등, 인권 혹은 생명 존중 등이 '사상' 은 이 시점의 '신화' 와 기능 측면에서 확실히 유사하다.
즉, 동아시아에서 신화가 연구되던 시기에 신화학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기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중국’의 사례로 보면 ‘중국’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황제’라는 신화적 대상에 접속을 시도하는 행태에서 잘 보인다. 청나라 말기에 혁명을 도모하던 지식인들이 그들의 시조로, 황제를 소환한다. 또한 “우리 중화민족은 황제의 후손이다, 따라서 5천 년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에서도 역시 단군의 이름을 불러내면서 반만년 - 유구한 역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하여 신화는 서구 열강이나 일본 제국주의자 침입에 맞서 민족을 통합하고,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때문에 동아시아 3국 신화학 단어의 등장부터 역사와 관련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진술이 성립된다. 신화와 역사, 그리고 민족주의의 화학작용은 지금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부작용을 수반하게 된다. 다만 이를 현재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는 없다. 당시 사회의 상황을 기준으로 신화는, 동북아시아 3국에게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서구나 일제에 맞서 하나의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러한 신화의 기능은 필요하였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문제는, 이 인식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점에 있다.
작금의 일본 교과서 문제나 동북공정의 문제, 혹은 멀리 갈 것도 없이 국내의 재야사학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환단고기'외 같은 형태의 그릇된 역사인식이 바로 이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전히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신화와 역사를 밀접하게 보며, 이를 연구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문제는 지금은 근대 시기와 달리 국가와 민족의 총체적 위기 상황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은 G2로 진입했고, 한국 일본 모두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황이다. 신화의 그릇된 사용을 통하여 민족을 단결할 필요성은 어디에 있을까? 과잉 민족주의에 찬성하는 입장이라고 하여도, 역사와 신화를 혼동해가며 이야기를 날조할 필요성까지 있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북아시아 삼국은 현재 G2로 접어든 중국, 여전히 그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하는 일본과 새로운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가는 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의 협업을 통해 세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현재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현대 국가들에게 이웃 국가가 친교의 대상으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 여전히 세 국가 간 수 개의 영토 분쟁이 진행 중에 있다. 또한, 그 보다 더 분명한 역사 논쟁 역시 진행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근현대사 부정뿐만 아니라 중세, 고대사에 대한 각국의 해석이 다른 지점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사실보다 더 오래된 역사서 ‘사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왜 예(羿)를 언급하지 않았는가? 이는 중국 신화의 역사화 과정의 취사선택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신고학파(의고와 신고란)의 경우 역사의 신화화를 주장하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지배적인 신화에 대한 인식과 연구는 하상주 단대공정 및 동북공정 등으로 대표된다. 더불어 현재 중국은 중국 내 모든 민족의 신화를 통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쉰 개가 넘는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의 자구책에 대해서 우리가 그 당위성을 논의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와 같은 논리로 한국과 일본 역시 신화와 역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게 당위성을 묻는 것을 보류한 것과 같이 한국과 일본의 행태 역시 일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영향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성은 있다. 치우가 악마적- 황제와 이항대립 구조상의 악당으로 그려진 시기가 지나 염황치지손(염제 황제 치우의 자손)으로 중국 내 사람들을 칭하게 되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치우에 대한 인터넷 민족주의에 의한 숭배와 새로운 신화화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같거나 유사한 신화에 대해서 각국이 가진 해석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 쉬이 이뤄질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특히, 삼국의 이해관계가 다른 시점에서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작금의 국가들은 독립된 존재들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전인류의 발전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는 극복해야 할 현상이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신화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학자들의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콘텐츠의 형태로도 이어져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특히, 하위문화 중 10대 20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것은, 그릇된 인식을 형성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경우 이우혁 작가의 ‘치우천왕기’ 등 주로 장르문학에서 이러한 것이 진행되고 있다. 주로 재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콘텐츠로 만들어내고 있으며, 특히 ‘환단고기’를 원전(Text)으로 삼기도 한다. 이렇게 생산된 콘텐츠는 종종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대중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을 뿐만 아니라 인접한 국가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같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신화가 단편적으로 활용되며 한국과 같은 신화의 활용 행태를 보인다. ‘견신’과 같은 만화 등에서는 일본을 인류의 근원으로 묘사하며 자국의 신화를 차용한다. 즉, 신화를 활용하여 자기 나라의 우월성, 존재 당위성을 입증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근대 시기에 신화를 가장 선구적으로 활용한 국가답게, 타국의 신화를 백과 형태로 배포하여 콘텐츠 창작시 활용할 수 있도록 배포하고 있다. 문제는 타국의 신화를 자국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에 더해 단순히 신화의 활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3국의 경쟁, 갈등 상황을 연장하여 재현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성경' 의 텍스트에 기반한 상징들을 가지고 새로운 신화 문학을 써내려가고 있다고 본다. 히어로 코믹스(그래픽 노블) 의 기원에 가까운 '슈퍼맨' 은 니체의 사상 보다는 예수의 구원자적 상징을 이용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은 미국, 서양의 기원적 역사와는 괴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 변형이 '우리의 뿌리' 라는 식으로 사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서구 국가의 다수는, 역사적 정통성, 우월성 보다는 백인의 인종적 우수성을 강조하거나, 제국주의나 냉전 시기의 강대국에 대한 향수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우월함' 을 신화 영역에서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100년전으로만 돌려도, 5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되는 나라들이니까.
근현대사만 놓고 보아도 동북아시아 3국은, 더 나아가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이상으로 깊게 연관되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 있다. 태평양 전쟁 등의 문제, 6.25, 월남전 등 극단적 상황 역시 얽혀 있다. 티벳이나 위구르만 하여도 중국에 편입된 역사가 길지 않으며 여전히 갈등을 빚어내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을 반면교사 삼는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동북아 지역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현재 동북아시아 삼국의 신화 사용의 행태는 근대 시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국제 분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작금의 행태를 단순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상을 넘어서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우리- 동아시아 삼국의 신화는 자민족을 위한 것이며 경쟁의 도구로 이용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동아시아 삼국의 신화에 관련된 문제를 잠시 제쳐두고, ‘신화’에 관련된 다른 이야기로 가 보자. ‘신화’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여성주의적 논의로 여신의 신격 하락에 대한 이슈가 존재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심리학적 해석에 대한 이야기도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로 돌아와- 우리의 아이들이 왜 TV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고 커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또한 왜 우리는 반지의 제왕을, 나니아 연대기를, 왕좌의 게임을 수입하여 즐기고만 있는가? 우리나라의 장르 문학계에는 왜 북구 유럽의 신화가 녹아 있는가?
이미 근대 시절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체계적인 신화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물론 이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며 그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였다. 체계화된 신화가 필요하며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우선 가져보자. 현재 광범위하게 소비되고 있는 ‘판타지’의 영역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상징들은 유럽 신화에서 이어진 지점이 있다. J.R.R 톨킨 이야기, D&D 룰에 대한 이야기, 이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들의 기원은 유럽 신화이라 볼 수 있다. 심지어 해리포터와 같은 최근 작품에서도 유럽 신화의 틀 안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도 체계화된 신화를 통하여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먼저 동북아시아 삼국에서 신화가 콘텐츠로 사용되는 행태를 대표적인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면서 논의를 진행시켜보겠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적인 판타지에 대한 논의로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영도’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처녀작 ‘드래곤 라자’를 통하여 ‘반지의 제왕’이 묘사한 것과 유사한 북구 신화의 파생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최근 작품인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연작을 통해서는 인도 신화의 ‘나가’나 한국 전설인 ‘도깨비’, ‘두억시니’ 등을 소설의 형태로 풀어내었다. 또한 ‘이우혁’ 작가는 언급한 ‘치우천황기’를 통해 치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처녀작이자 대표작인 ‘퇴마록’을 통하여 현대에서 무속신앙, 무술 등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대표적인 작가를 빼면, 대다수가 중국에서 파생된 ‘무협’의 형태나 D&D 에서 파생된 유럽 지역의 신화 형태를 답습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온라인 게임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의 경우 주로 만화의 형태로 재현되는 경우가 많다. 만화 대국인 일본의 경우에는 ‘블리츠’ ‘나루토’ 같은 인기 만화를 통하여 신화는 지속적으로 콘텐츠에 녹아들어 있다. 게임으로 재현되는 경우도 있다. 중국의 경우 탁록대전 등을 바탕으로 다양한 온라인 게임을 생산, 신화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화를 원형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덧붙여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일본 신화의 ‘스사노오’ ‘구미호’ 같은 존재들이 ‘나루토’에서 그려지는 모습은 신화 본연의 이야기와 꽤 다르다. 특히, 일본의 만화 ‘봉신연의’의 경우 중국의 이야기인 ‘봉신연의’를 크게 비틀어 표현한다. 여와나 복희와 같은 존재가 외계인이었다는 설정 같이 작가 자신의 상상력이 크게 더해진다. 우리가 역사 문제와 자국의 신화- 특히 시조 신화 등에 대한 타국의 시선을 비판하는 관점으로 이러한 콘텐츠 사용에 대해서 비판할 필요성이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열린 세상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이를 이용하는 많은 영화들이 나왔고 또 나오고 있다. 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를 기반으로 형성된 영화들은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동북아시아 3국, 더 넘어 아시아의 영화 시장은 그 보다 더 클 수 있다. 이를 위해선 ‘그리스 신화’처럼 체계화된 원전(Text)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처음 가진 질문에 대해, 동북아시아 3국이 체계화된 신화를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결론을 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전에 상업적인 콘텐츠화를 배제하고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현대에 ‘신화’ 가 다시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신화는 인류 최고의 철학으로 기능해 왔다. 신화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히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지역의 법률, 안전장치 등으로도 기능한다. 만주 지역의 신화의 경우, 수렵에 대한 금기 등을 통해 대칭성 사회의 인식을 전달하며 안정적인 생태계를 위한 노력을 사람들이 자연스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여 준다. 제주도의 경우, 자청비, 가믄장아기 등의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의 규범 등을 전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가 널리 퍼진 동아시아 대다수의 나라에서 신화가 다시 이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가능성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최근 서구 신화 중심의 하위문화가 널리 퍼진 동북아시아 3국의 하위문화가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하다.
우리가 ‘신화’를 현재 사회에 다시 등장시킨다는 명제에 동의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다. 다시 동북아시아 3국 문제로 돌아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신화를 누구의 것이냐 따지는 것이 그 대표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 또한 민족의 자존심과 같은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장르 문화에서 종종 인류의 기원에 관련된 것을 일본의 것으로 해석하는 풍토가 있다.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는 문제로 보일 수 있다. 자국에서 해당 콘텐츠를 가장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고양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콘텐츠 제작자의 성향을 떠나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 ‘치우’에 대해 해석하는 모습은 굉장히 상반된다. 이런 대표적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신화를 넘어서 이야기들, 그 형태소(모티프)는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동북아시아와 같이 서로 영향을 많이 끼친 사회의 경우 이는 물론 그 차이는 존재한다. 그 원류를 따지고 연구를 하는 것이 신화학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를 활용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기대는 것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신화’가 민족주의에게서 독립하기 위해선 필요한 영역이다.
스스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때, 신화 연구는 국가에 독립적일 수 있다. 동북공정과 같은 주요한 역사, 신화 관련 프로젝트는 국가나 민족주의에 기반한 재단의 지원 아래에 이뤄진다. 물론 재정적 독립을 이뤄냈다고 하여도, 민족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하는 여론 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학문 주체들이, 보수적 색채의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지녀야 한다. 때문에 현재로는 신화의 가능성은 콘텐츠화를 통한 국가 중심 연구에서의 독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콘텐츠는 중요해지고 있다. TV 시장의 경우 콘텐츠가 중요해지고 있다. 물론 이는 시장 구조에 대해서도 깊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콘텐츠 소스는 어디에서 오는가? 주로 일본 및 미국의 콘텐츠를 모방하는 형태가 있다. 일본 만화에서도 등장하는 신화 이야기. 이러한 하위문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활동은 신화에 대해서 깊게 공부하지 않는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퍼진다. 때문에 우리는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신화의 원형에 대한 변주는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그 원형을 기록하고, 일반 대중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애초에 신화의 역사를 보면 이야기는 단순히 원전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시대 상황에 맞게 변형된다는 점을 되새겨보자. 하지만 구전으로 전해지던 시대를 넘어 우리는 문자 문화를 넘어 IT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원전을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원전을 어찌해야 하는가? 이를 ‘오픈 소스’의 형태로 만들어 내야 한다.
오픈소스란,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로, 누구나 공헌하여 원형을 수정하고, 재배포하며 이를 통해 부가가치를 활용할 수 있도록 원형을 공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화와도 일맥상통한다. 신화는, 그 기원은 누구의 것일 수 있지만 그 활용에 있어서 그 누구도 저작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특히, 우리가 세계시민으로의 자각을 할 경우, 민족주의에 기반한 소유권도 무의미해진다. 세계 시민이 멀다면 적어도 아시아 주민으로 공통된 인식이 필요하다. 신화는 이렇게 오픈소스로 기능할 수도 있다. 이 오픈소스 원전(text)은 – 따라서 단순히 중립적인 원전의 기록을 넘어 콘텐츠 제작자에게 새로운 이야기의 원천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야기는, 단순히 연구하는 사람 만으로 살아남지 못한다. 학문으로 연구되기만 하는 신화는 이야기로의 생명을 잃게 된다. 널리 퍼져야 한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그 형태가 원전의 것일 수는 없다. 이 현실에 밀착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네이버 웹툰에 연재된 주호민 화백의 ‘신과 함께’처럼 변주되어, 계속 노래되어야 한다.
신화는 날조되었다. 대다수의 신화는 날조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대칭성 사회의 기록 등 모든 기록물들은 – 실제로 신화적 사건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에 의한 날조이다. 그리고 이 날조를 통하여 사람들은 사회를 구성해왔다. 하지만 그 순기능은 당시 사회에 필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21세기에도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환단고기’나 일본의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하는 임나일본부 같은 이야기의 소비와 재생산이 어떠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새로이 나아가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동북아시아 3국의 평화화 화합 및 협업은 단순히 해당 지역의 발전을 넘어서 세계의 안녕을 위해서 중요하다. 그 미약한 도움으로 신화는 기능할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날조가 아니라 실제로 기능할 수 있다. 신화가 콘텐츠로, 이야기로 흐른다면 다른 기능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흘러 널리 퍼지면,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면 사람들은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말이 통한다. 반지의 제왕의 팬들은 중간계의 평화와 그에 대한 가치를 공유할 수 있었다. ‘스타워즈’ 나 ‘스타트랙’ 등 이야기의 팬덤은 그 이야기의 가치에 몰입하여 있다. 우리는 신화를 통하여 만들어낸 콘텐츠를 바탕으로 ‘대칭성 사회’의 가치에 몰입한 팬덤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언젠가 같은 이야기를 즐기는,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아시아를 더 넘어서 세계를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신화는 장기적으로 오픈소스 텍스트로 기능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하여 단순히 모두가 신화의 원전을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에 덧붙여, 소프트웨어 영역에서 ‘오픈 소스’를 위해 모든 참여자가 공헌하듯, 이러한 ‘신화의 원전’을 재해석한 콘텐츠가 창출되고, 이를 통해 경제적 가치 창출이 원전을 보존하고, 지켜 나가는 데에 쓰일 수 있는 시스템 역시 필요로 하다. 그리고 그렇게 독립적으로, 그리고 현시대와 공유하는 이야기로 나가면서, 전술한 바와 같이 시스템이 아닌 사회 전체가 신화를 통한 가치를 공유하도록 나아가야 할 것이다.
2013 봄학기 연세대학교 동아시아 신화기행 보고서
초고: 2013-05-29
탈고: 2013-07-31
재수정: 2016-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