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고민해야 하는 것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라는 명제. '일하지 않는 자여 처먹지 말라'라는 가사. 노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가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들. 그것을 끝내야 하는 때가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이제, 굶어 주는 사람이, 돈 때문에 목숨과 인격을 포기하는 일을 멈추게 할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를 저자는 다양한 방면에서 옹호하며, 여러 사례를 통해서 이것이 괜찮은 대안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책의 논조에 공감을 한 것은 아니다. 재원의 조달에 대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며, 또한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외면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어떨까. 가출 청소년이 늘어날까? 월세가 올라가진 않을까?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답는 책은 아니었다.
또한, 기본소득제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과격한 상상도 별로 볼 수가 없었다. '기본소득' 은 내게, '가난'의 종말과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의 해방이라고 읽혔는데, 그로 인한 사회의 긍정 혹은 부정적인 변화에 대해서 깔끔하게 설명하는 책은 아니었다. 물론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태의 책이 최선이었겠지만, 내겐 아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기본소득의 목표가 '가난'의 종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난' 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하지만 빈곤선, 즉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돈의 부족함이 없는 영역이라고 하면 어쩌면 달성 가능한 영역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다시 <그것은 알기 싫다>의 언급 대로, 부자를 없애지 않되, 거지를 없애는 방식의 온건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모두가 '똑같아 지자' 가 아니라 아무도 굶어 죽지 말자, 얼어 죽지 말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일들을 할까. 물론, 지대 추구자들을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며, 폭력수단을 통한 강압을 억제할 수 있는 발전한 사회를 기준으로 생각해봐야겠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가난이 사라진다면? 수도권에 사람들이 더 몰릴까, 아니면 덜 몰릴까. 서울에 사람들이 더 모여서 새로운 것을 시도할까, <리틀 포레스트>처럼 고향으로, 지방으로 떠나게 될까. 잘 모르겠다.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의 해방이 이뤄진다면, 어쩌면 입시 학원들은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예전에 비해서 시장이 줄어들 거니까. 반대로 지금처럼 다양하게 퍼져나가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미래, 커리어의 관점에서 추구하는 지점들이 각자 달라지고, 그것일 중간에 변경하는 일도 잦을 것이로 예상된다.
확실하게 '러다이트'를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은 사실 기본소득이 어느 수준으로 이뤄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일자리' 가 더 줄어들 것임은 분명하며, '인간'이라는 오리지널리티가 필요한 지점에서 - 이를테면 예체능 - 사람들의 일자리가 파생될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가상현실의 세계가 온다면, 그러니까 <아이, 로봇>과 < 레디 플레이어 원>이 동시에 오는 현실에서는 차라리 <납골당의 어린 왕자>처럼 '사후 보험'과 같은 방식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현생은 그저 가상 세계에 나의 정보를 올리기 위한 노동의 수단이 되고, 사후에 내가 생전에 노력한 만큼의 가상현실을 즐기게 되는 미래. 그런 곳에서 대다수의 일들은 로봇이 대체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지점에서는 <월-E>의 미래가 더 그럴싸하다. '기본소득'의 철학이 퍼진다면 <엘리시움> 보다는 <월-E> 쪽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문제는 정치적인 쟁점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기에는 '기업'의 힘이 갈수록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실리콘밸리의 신흥 재벌들은 대체로 기본소득과 같은 방식에 찬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만을 믿을 수는 없으니까. '스카이넷'이 언제 나오느냐에 타이밍에 따라서, 우리는 '로봇'을 인류를 위해 존재하게 할 것인지, 특정 기업을 위해 존재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레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이스터에그에 자신들의 이름을 넣었지, '인류(humanity)'를 넣지는 않았다.
분명한 건 한 가지가 있다. '기본소득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 '개념'은 고귀할 수 있겠지만 그 철학을 따라올 만큼의 시스템을 인류는 구현해본 적이 없다. 어쨌든 인류의 진보는 시스템을 넘어서 스스로의 인식 영역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인류가 시스템의 붕괴 속도보다 빠르게 '진화' 할 수 있을까,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그것은 불가능한 상상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비해서 더 현실적인 '경제 체제'를 고민할 수밖에.
하지만 경제라는 것 역시 또한 사람들의 개별의 인식 체계 안에서 형성되는 시스템일 것이기에, 차라리 과학의 빠른 진보를 기대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은 든다. 이를테면, 모두의 사고를 한 데 엮어 버리던가, 무한 츠쿠요미로 사람들의 싸움을 멈추게 한다거나, '뉴타입'이 나와서 서로를 이해하고, 대화하게 하거나. 어쩌면 외계의 종족이 등장해서 인류가 한 데 뭉칠 수도 있겠지. '기본소득' 은 이런 상상만큼이나 굉장히 SF 적인 발상이다. 가능할까?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기본소득제'의 가능 여부 등은 결국은 전문가들의 더 많은 연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가난의 종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것은 나 같은 '비전문가' 도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우리에게, 우리 시스템에 진짜 '가난한 자' 가 필요한가?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의 시스템 - 복지국가로 가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면 나는,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이 내게 던진 질문은 이랬다.
아마 다른 이에게는 다른 질문이 던져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질문은 무엇인가? 답은 - 아무도 모를 것이다. 우리가 지금 찾아야 할 것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