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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Jun 09. 2018

진보는 분열해도 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더 다양해져도 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순 없지만, 꽤나 널리 퍼진 이야기이다. 보수가 집권한 시기에 야권 단일화 실패에 이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정치라는 수싸움에서 진보의 패배 요인을 잘 짚은 말이다. 하지만, '망한다'는 표현 자체는 그리 맞는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진보는 분열해서 패배할 수 있지만, 망하진 않는다.


 애초에 진보와 보수라는 구분 자체가 모호하다. 정치 세력을 크게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인식이 없다면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라는 말이 의미를 많이 잃는다. 사실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또, 정치 공약으로 나눠보면 시간대에 따라서 진보의 공약이 보수 집단의 공약이 되는 경우도 많다. 특정 선거의 결과에 대해서 저 말을 인용할 순 있겠지만, 그것이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특히,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진보는 분열하기 때문에 진다, 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진보는 분열해서는 안된다'라는 인식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 '진보는 분열로~'라는 표현이 인용될 때엔 주로 선거전략을 짜거나, 선거 결과를 분석할 때 나온다. 따라서 전술한 것처럼 후보 단일화의 명분, 혹은 후보 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물을 때에 사용된다. 87년 체제 이후, 노태우의 당선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것을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분열이 원인이라고 분석하는 것과, 분열해서는 안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노태우의 당선을 막는 것이 지상과제라고 믿는 집단에게는 유의미하겠지만,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노선 차이를 생각해보면 둘은 '분열' 하는 것이 맞았다. 


 분열은 진보적 성격을 띤 진영에서 필연적이다. 진보는 이름 그대로 미래의 가능성에 베팅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현실이 아닌 더 나은 현실을 갈망하는데, 그 결과물이 하나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물론 1970년대처럼 유신을 반대한다거나, 1987년의 호헌철폐 같은 큰 목표가 있을 때도 있다. 노회찬 의원의 말처럼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싸우던 사람들도 힘을 합쳐 대항' 해야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외계인이 쓰러지고 나면, 그다음엔 자신들이 믿는 가능성을 가지고 서로 분열해야 하는 것이 진보 세력이다. 다시, 직선제라는 목표가 일단 달성되었으니 새롭게 자신들의 목표를 잡고 DJ와 YS는 분열해야만 했다. 


 또, 분열하지 않는 진보는 부패한 보수보다 더 위험한 정치 집단이 될 수 있다. 분열하지 않는 진보 집단은 파시즘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진보는 기존 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집단들이다. 그런데, 그 대안이 여러 가능성을 검토한 것이 아닌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이 되는 것이 올바른 일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극단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나치를 선택한 것과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 


 NL, PD 같은 구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선투쟁은, 자신들이 중시하는 가치관을 반영하고, 그 노선들은 충돌도 일으킨다. 충돌이 나는 노선들은 갈라서야만 한다. 예를 들어 환경을 중시하는 진보 집단은 기업들에게 환경부담금을 더 내라고 요구해야겠지만, 노동자에게 더 집중을 하는 경우에는 그 돈을 노동자를 위해 쓰도록 요청할 것이다. 자원이 충분하다면, 두 요구를 모두 충족하는 결과를 위해 힘을 합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두 노선이 함께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거대한 진보의 흐름이 요구되지 않는 때에는 분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왕정 철폐, 독재타도 같은 큰 목표가 없을 때에는 진보는 계속해서 분열하고, 또 어떨 때는 합치는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그래야, 더 많은 가능성을 검토하고, 가능한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서로의 논리를 다툴 수 있다. 그 결과, 어떤 선거에서는 보수가 범진보 세력을 압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어떤 진보의 논리도 보수의 논리를 뛰어넘어 유권자에게 다가가지 못했단 말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쌓여서 문제가 된다면, 다시 또 상대해야 할 공통의 목표가 생긴다면 또다시 진보는 합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진보의 모습이다. 


 때문에 자신이 지지하는 노선이 있는 진보 성향의 유권자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사표'는 없다. 당선이 투표의 유일한 결과물이라면, 당선되지 않은 사람을 지지한 모두의 표는 사표이다. 하지만, 선거의 결과는 당선자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당선되었지만 아슬아슬한 결과일 경우, 당선자는 자신 상대방 진영의 의견을 조금 더 귀담아들을 것이다. 비록 당선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투표율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사람을 더 모아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는, 진보의 방향에 대한 점검의 역할을 할 수 도 있다. 


 그러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투표해야 한다. 정치는 수싸움이다. 이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더 많이 있는지를 가리는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1~2년마다 반복되며 일어난다. 지방선거로, 총선으로 그리고 대선으로. 반복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을 걸고 누가 더 많은지 확인한다. 여기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당선되지 않은 투표에게 던진 '사표' 나, 의도적인 기권표가 아니다. 투표하지 않은 표들, 그것들만이 이 선거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아직 충분히 널리 퍼지지 않은 가치관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선거라도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몇 프로도 나오지 않는 투표율,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하지만 '민주주의'를 선택한 이상 다양성의 다이내믹함을 얻음과 동시에 개혁의 속도가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보수는 부패하기 위해 기존의 시스템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니까. 어떠한 가능성이라도 보수를 뚫어 인정을 받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급격한 변화의 흐름으로 사회를 와해하거나, 충분히 흔들어 그 안의 구성원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을 무시하게 되니까. 


 따라서 자신의 노선을 위해서 우리는 당당하게 자신이 믿는 가능성을 들고 투표소에 가고, 실망하지 않는 자세로 개표 방송을 보면 된다. 좀 더 빠르게 변화를 원한다면, 시민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방향도 있다. 아니면 직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피선거권자로 등록을 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민주주의 시민은 지난 수십 년간을 피, 땀, 눈물을 흘려가며 가능성의 시험대를 만들고, 유지해왔다. 아직은 멀었지만, 결국에는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미래를 만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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