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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Aug 15. 2018

정의

이 나이 먹고도 ’ 정의’를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

 영화 <내부자들>에 ‘정의? 대한민국에 여적 그렇게 달달한 것이 남아 있는가’ 하는 대사가 나온다. 과연 이 나라에 ‘정의’는 남아 있는가. 엄밀히 ‘정의’를 측정할 수단도 없고, ‘정의’를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것이 실제로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누구도 함부로 ‘정의’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한 편으로는 사람들이 ’ 정의 구현’ 이 되는 영상물, 텍스트를 찾아 보고, 읽는 이유는 그것이 달달하기만 해서일까.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판타지에 살고 있는 것뿐인가.  권선징악이 뚜렷한 콘텐츠는 구조적인 안정감, 피곤하지 않게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징한 메시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에 좋은 구조이긴 하다. 하지만 그만큼 진부해지기 쉽고, 평면적인 인물과 전개로 지루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블의 현대 영웅 신화가 흥행하는 이유가, 단순히 발전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화면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판타지가 소비되는 이유는, 그것이 충족되지 않은 현실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달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절실하기 때문이 아닐까. 


https://www.youtube.com/watch?v=wfLOt5P6nSk



 즐겨 청취하는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의 진행자 UMC는, 정의라는 것이 위험하고 , 무섭다는 식의 비평을 한 적이 있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 정의는 무서운 말이다. 왜냐면 이 세계에는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침략자’는 없으니까. 심지어는 요즘 10대를 타깃으로 하는 만화에서도 악당은 태생적으로 나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혹은 복수를 위한 인물로 많이 그려지고 있다. 


  중동의 역사, 현재의 상황을 알면서 무작정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그들 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고. 시스템이란 한계를 알고 있는데, 사장 한 명, 악당 한 명의 문제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읽고, 보아온 콘텐츠 속 악당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태. 그래서 봉준호의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과연 우리는 ‘정의’라는 말을 가지고 열차를 세울 깜냥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히어로’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하늘을 날고, 바다를 걷는 영웅은 세상에 아직 발견되진 않았다. 그리고 ‘정의구현’이라는 말은 대의에 쓰이기보다는 자신의 논리와 이익에 부합하는 결과물에 붙이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참교육', ‘정의구현’이라는 말에서 ‘참’과 ‘정의’ 가 놀랍게도 편협하게 사용되는 모습을 보면서  놀랄 때가 많다. 


https://www.youtube.com/watch?v=KOZMxMYK2s0


 그럼에도 ‘정의’를 명함에서 새긴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수십 년을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왔었다. 그들에게 영웅적이 능력은 없었을 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영웅적인 업적을 이뤄내기 위해서 노력해왔다고 생각했었다. 나라면 못할 일들. 독재 정권에 맞서고, 당선되지 않음이 보임에도, 알리기 위해서 수십번 수백 번 외쳐야 하는 이름들. 


 그들 중 한 명이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사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니다. 내가 가슴이 아팠던 이유는, 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가,이였다. 그 잘못이 사실이라고 할 지라도, 훨씬 큰 잘못을 한 사람도 잘 살고 있는데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런 답답함에 친구 몇몇은 글을 썼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내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보낸 며칠이 있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정치자금법’ 문제 말고도, 세상을 바꾸고자 하기 위한 사람은 도덕적인 무결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 사회, 정의를 외치는 사람에게는 흠집 하나 남아있어서는 안 되는 이 사회에서 ‘진보정치’를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느끼게 되었다. 불가능한 일에 계속해서 도전해오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이름 '정의'.


https://www.youtube.com/watch?v=8eXzKuRsmrI


 정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의’와 같은 단어들을  나이를 먹으면서 말하기 부끄러운 이유는 하나이다.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것을 이야기하기엔, 어른은 해결해야 하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보다 가능한 것들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운 것, 찾기 힘든 미지의 것은 비웃음을 산다. 그것을 돌파해야 새로운 발견을 하고, 색다른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지만 일반인이 그것을 감당하기는 쉽지가 않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당장 5년 전으로 돌아가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면? 100년 전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달에 갈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렇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감수하고, 일을 한다. 새로움에 도전하는 과학자들이 있고, 편견에 맞서는 개혁가들이 있으며, 미래를 당겨오는 선지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먼저 가서 깃발을 꼽고, 우리를 유도하는 등대가 된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라카 대륙으로 가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콜럼버스가 성공한 이후로는 많은 이들이 도전하고, 항로가 개척된다. 왜?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dvOqgtnrPAw


 그래서 세상에 정의를 확고하게 믿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 한 나 역시 ‘정의’를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의 실존의 여부는 우리가 거기까지 가기 전에는 알 수가 없지만, 그곳을 먼저 탐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두렵지는 않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없다고 말하는 것들을 이름으로 삼은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침몰하는 배를 들어 올려 사람을 구하는 영웅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지 않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밤새 법안을 발의하는 영웅은 있을 수도 있다. 버스보다 빨리 달리는 영웅은 우리에게 없겠지만, 버스에 함께 타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영웅은 이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쳐 알지 못했을 뿐.


 어쩌면 영웅을 너무 큰 무언가로 상상했던 것처럼, ‘정의’ 도 너무 대단한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계란 바구니를 던지면서도 절벽으로 향하는 아이를 붙잡기 위해 달려가는 것,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마음,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자는 포스트잇 하나하나가 모두 ‘정의’인데. 


https://www.youtube.com/watch?v=0IA3ZvCkRkQ


철들면 지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이십 대 후반부터 살아가고 있다. 왜냐면 철들면, ‘정의’를 이야기해서는 안되니까, 라는 식의 생각이었다. 세상은 바뀌지 않겠지만 나는 나대로 살아보자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이 원래 그런 것과, 세상이 그래야 하는 모습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어른으로서 철이 들어 ‘세상이 원래 그렇군’이라고 인정해도 좋다. 강호에 도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한탄해도 좋다. 다만, 그것을 부정하고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숲을 옮기기 위해서, 슈퍼맨이 필요할 수도 있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중장비를 들여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씨앗을 찾아 지키고, 보듬는 것만으로도 매년 열매 맺는 시절에 벌과 나비가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것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PivWY9wn5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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