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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Oct 03. 2018

한국에 관한 열 가지 (옛)생각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고, 쓰다.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중국과 위화에 관한 책이다. 그것을 다루기 위해 위화는 10가지 단어를 선정하였다. 그 단어들로 에피소드와 단상을 범주화하여 쓴 글들은, 묘하게 글 쓴 당시의 중국을 잘 보여주었다. 물론 중국은 거대한 나라니까, 다뤄지지 않은 모습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10개 정도의 단어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재밌어 보이는 일이었기에, 나 역시 한번 도전해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10개로 한정 짓고, 이 단어들 만으로 나를 둘러싼 사회를 묘사한다고 생각하니,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를 둘러싼 이 나라, 대한민국을 최대한 자세히 표현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기로 하였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생각나는 단어들과 그것을 둘러싼 모습들을 묘사해보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10개의 단어/개념을 써 내려가 보았다. 열정과 냉정 / 중도와 중용 / 분단과 통일 / 김치 혹은 불고기나 비빔밥 / 광장과 밀실 / 노래, 방문화 / 신파와 한 / 온정과 마녀사냥 / 줄서기와 새치기.



열정과 냉정

  

열정적인 사람들. 광화문의 2016, 7년을 떠올려본다. 조용한 열정이었다. 생각보다 조용한 수십만의 사람들.


한국은 열정적인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 같다. 영화 <1987>을 보면서도 느꼈다.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서 싸움 나는 걷고 그렇다. 속에 화가 가득 차서 생기는 '화병' 도, 어쩌면 화를 참는 게 문제가 아니라 화 자체가 많아서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찌나 열정적인지 남들은 100년 200년 걸릴 것들도 순식간에 해치우곤 한다. 느린 것은 참질 못한다. 라스베이거스 한식당도 패스트푸드 점보다 빨리 음식을 내놓는다. 공항에선 또 어떤가. 당신이 빠르게 환승을 하고 싶다면 무조건 한국인을 따라가라! 열정적으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내놓을 것이다. 


비트코인에서 이어진 작금의 코인 열풍도 그렇다. 빠르다. 관심도, 투자 결정도 빠르다.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 같은 건 전 지구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빨리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 가상화폐가 자리 잡은 것은 한국에서 '사다리' 가 걷어차 여진 상황이 분명히 영향을 끼쳤을 것이리라. 부자가 될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식!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르다. 역시,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열정은 냉정으로 빠르게 이어진다. 뜨거운 물이 더 빨리 언다고 하던가. 한국 사람들의 열정은 빠르게 식기도 한다. 관심이 무관심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래서 '냄비근성'이라고 하던가. 물론 나는 냄비 근성이 사실이래도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본다. 빠르게 끓는 것을 잘 활용해 온 것이 우리네 인생과 삶, 역사였다. 


그러나 그 대상자가 된다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내가 열정의 시선에서 냉정의 시선으로 넘어가는 객체라면? 많이 아프지 않을까. 그 아픔이 어떨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중도지향/어중간       


열정적인 사람들인데, 참으로 가운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실제로 자신이 거기에 없다고 해도, 자신이 가운데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의 경우에도 그렇다. 의견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이 중도라고 믿는다. 가운데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경제적으로는 어떨까.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대답하는 비중이 높았던 걸로 기억한다. 예전에 본 통계여서 정확하지도, 지금도 들어맞지도 않을 순 있다. 하지만, 힙합 허슬러들을 제외하고는 자기 돈을 자랑하는 이도 딱히 없고, 없는 이들은 그래도 이 정도는 이라며 자신을 가운데에 가까운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한다. 


세계적으로도 그럴까, 잘 모르겠다. 전수조사, 아니 샘플 조사도 할 여력은 안되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당히 해라라는 식의 격언들이 좀 있는 것을 보면 동아시아 권의 문화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나 뭐라나. 


가운데를 지향하는 것은 아마, 튀는 사람들이 냉정에서 열정으로, 열정에서 다시 냉정으로 끌려가는 것을 많이 봐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보통 사람입니다 라고 말한 노태우 씨를 생각해본다. 


중간, 중도라는 것은 상대 값이다. 양 극단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중간자는,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외교도, 친구 관계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이 나라의 사람들은 언제나 가운데적인 위치를 견지하는 것이 더 나은 거시적인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 않았을까. 


<남한산성>을 떠올리고, CES 2018에서 본 미국과 중국 기업을 떠올려본다. 

 




분단과 통일      

  

이 나라는 분단국가이다. 흔하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란 말을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민족국가 개념과 역사적인 맥락이 이어질 때에나 가능한 말 아닌가. 그러나 이산가족이 생존해있는 지금 까지는 그 말이 틀렸다고 선언하기는 이르단 생각이 든다. 어쨌든, 열강에 의해서 나눠진 국가로는 마지막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통일에의 열망이 강하기도 하고.


분단은 무엇을 낳았는가. 일단 분단이 통일을 낳았다.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북한이라는 카운터파트의 존재로 인해서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는 통일된 사고와 생활양식의 습득이 있었다. 독재의 논리가 되기도 했다. 독재에 반항하는 논리가 되기도 했다. 북한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슬픔이 되기도 한다. 언급한 이산가족에서부터. <JSA>가 떠오른다. 처음으로, 북한이라는 대상을 '교과서' 밖에서 마주하게 되었던 영화. 이산가족 상봉 방송이 몇몇 떠오르기도 한다. 6.25에 참전한 외조부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성주와 싸드가 떠오르고, 영화 <강철비> 가 또 떠오른다. 분단국가의 국민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이용하는 자들에게 더 괴롭힘을 받는다. 글쎄, 그런가. 그것을 때 놓는 것도 참 웃긴 일 같긴 하다. 분단이 분단을 이용하는 사람을 낳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분단 때문에 되는 일들, 생겨나는 수많은 내러티브가 있다. 아픔은, 그 자체로 콘텐츠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아픔을 정당화해주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분단 때문에 통일되어 있어 보인 시민들은 분열되어 다투는 사회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 역시도 분단 때문이다. 분단이 또 다른 분단을 낳은 것은 아닐까? 아니다. 다름이 꼭 사람을 가르는 것은 아니다. 정반합. 가능하지 않을까? 어쩌면 분단은 하나의 가능성을 거세하여 한쪽으로 쭉 나가게 해 준 것은 아닐까도 생각은 해본다. 위험한 상상이다. 





김치 혹은 불고기나 비빔밥        


한식은 무엇인가. 정의는 분류에서 시작된다고 해보자. 그럼 다른 음식과 구분되는 한식의 특징은 무엇인가. 2018년에 와서는 잘 모르겠다. 많은 부분에서 식문화는 외래의 것을 흡수해서 변해왔다. 자장면은 한식이냐 중식이냐? 한국에서 만들고, 즐기는 것이니 한식일까? 짜파게티는 어떤가 그렇다면.


발효음식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한식으로 분류해도 무방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음식의 저장이 어렵고, 4계절이 구분으로 인해 음식을 구하기 어려우며 '보릿고개' 가 나올 수 있는 나라에서는 저장이 용이한 발효음식이 많이 날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알쓸신잡>에서 나온 국밥과 비빔밥을 언급했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사실 한상차림이 한식에 가까운 것 - 쌀밥을 맛있게 먹기 위한 상차림들이었다면 국밥과 비빔밤은 그에 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기도 하다. 쌀밥을 다르게 해 먹는데, 그것을 간편화 한 것이니 뭐. 


불고기는 그럼 어떨까. 야끼니꾸의 변형 아닐까? 원형을 좇는 학문적인 연구를 하진 않았지만, 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적어도 소고기를 그렇게 소비할 만한 상황이 한국 땅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중세 이전까지 문화가 중국 본토에서 일본으로 흘러간 것이 맞을 순 있지만, 중세 이후로는 일본은 해상 무역길이 열리면서 독자 문화 발전이 더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비빔밥과 불고기를 뉴욕에서 광고한 것이 떠오른다. 음식이란 한 나라의 브랜드고, 아이덴티티일 수 있다. 그러니 광고하겠지. 왜? 일식당은 많은데 한식당은 없으니까. 일본을 이기기 쉽다는 열정이 또 한몫했을 것 같다. 


식구란, 같은 밥을 먹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음식이 이렇게 나뉜 지금에서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음식으로 문화권을 나누는 것이. 베지테리안 미국인 보다, 햄버거를 사랑하는 한국인이 햄버거를 더 많이 먹을 텐데. 물론 이건 극단적인 사고이긴 하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고기와 비빔밥을, 김치를 아느냐고 묻는 것은, 우리 아느냐, 우리 민족 아느냐, 우리 잘났다 하는 것 같다. 거기에는 열등감과, 자존감이 뒤섞여 있다. 또한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이 토핑 되어 있다. 





광장과 밀실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다시 2016년이 기억나고, 2008년이 기억난다. 사실 2008년이 더 강렬하다. 광장 위의 단상에도 올라가 보았으니까! 놀라운 경험이었다. 학교 정문에서 시청까지 행진도 했었고. 친구들은 사진이 찍혀 신문에 나기도 했다. 


<광장>이라는 이름의 소설이 있었다. 다 읽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수능 준비하면서 읽었었겠지. 광장의 대척점에는 '밀실' 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론장'의 개념이 있었다. '만민공동회' 같은, 개념어. 모두가 모두의 이야기를 하며 조율을 해나가는.


인터넷은 그런 기능을 할까. '필터 버블'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알고리즘은 끼리끼리 묶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왜냐고? 사람이 그걸 좋아하니까.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니까. 어쩌면 우리는 분단을 통해서 우리 서로의 다른 지점을 감출 수밖에 없는 사회였기에, 밀실 같은 광장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주머니의 송곳들이 항상 튀어나온다. <송곳>의 구고신이 말했듯, 누군가 한 명 튀어나오고, 그 구멍으로 쏟아져 나온다. 4.19 때도 그랬고, 87년 6월이 그랬다. 그러나, 4.3 같이, 5.18 같이 정을 맞고 구부르고, 쓰러진 날들도 있었다. 밀실과 광장은 계속해서 같은 장소의 이름을 대체해왔다. 

 

다시, 그러니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송곳들만 남게 된다. 한국의 인터넷 지형은 분단국가의 그것처럼 생겨먹었다. 정치적 지형만으로 보면 그렇다. 인터넷은 광장이 되기보다는 서로의 밀실에서 서로에게 포격을 할 수 있는 기능을 더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거리의 광장은? 글쎄. 그것도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곳이 아닐까. 그 와중에 교집합, 아주 작은 교집합이 있기에 나왔던 것이겠지. 사실 그게 당연하다. 그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광장이 필요 없단 말이 아니다, 광장은 그 교집합을 찾기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 광장이 투쟁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한국의 인터넷 진형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가끔 그런 광장이 페이스북 댓글 스레드로, 트위터에서 아니면 네이버 댓글란에서 열리는데 참 보기가 그런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더 문제는 그 이전투구의 장이, 어떤 기업의 소유이며 그들이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쓰고 나니 한국 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긴 하다. 특별히 한국 네티즌에게 적용될만한 것이 있을까, 글쎄. 국민성, 민족성이 그나마 거세되는 곳이 인터넷이다 보니, 찾기 어려운 것 같긴 하다. 




노래, 방문화.


흥의 민족이 아닌가 싶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가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노래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가 싶다. 사실 그건 분석 가능한 영역이긴 한데도, 가끔은 진짜 이 나라 사람들의 유전자에는 노래 잘하는 것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긴 한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자수성가라는 말이 굉장히 소수에게 적용되는 나라가 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때문에 신체 자본을 가지고 자수성가를 할 수 있는 길 - 연예인에 사람들의 욕망이 투사되는 것이 자연스럽단 생각이 든다. 


3S 정책 이후로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돈이 모이니, 산업이 생겨난다. 레코드 산업은 또한 이 나라의 방문화와 더해져서 '노래방'을 만들어내고, 확장시켰을 것이다. 그 밀실은 심지어는 더 발전해서 혼자서 들어갈 수 있는 부스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이런 것도 일본의 그것과 같은 방향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딱히 놀 것이 없으니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닐까. 춤도 - 비보이 크루나 유명한 댄서가 태어나는 것에 비해 한동안 밀실 속에 갇혀 있었다. 요즘에야 클럽에 이어서 밤사 같은 곳도 생겨났지만, 흥이 어떤 방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페스티벌은 어울리지 않지. 흥은, 내 아주 가까운 지인이거나, 가까워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 같다. 어떤 근대 작가의 글에서 모 잔치에서 춤을 추는 아버지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있었는데,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갇혀있는 흥을 드러내는 곳이 모든 방들이었단 생각이 든다. 





서두름과 바쁨, 그리고 데드라인.  


한국 사람들은 서두른다. 왜 서두를까. 먼저, 서두름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서두른다는 것은 그럴 필요 없는데도 일찍, 먼저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네이버 국어사전의 1번 항목은 '일을 빨리 해치우려고 급하게 바삐 움직이다.'이다. 2번 항목이 '「… 을」 어떤 일을 예정보다 빠르게 혹은 급하게 처리하려고 하다.'로 나오고 있다.


그래도 다시, 2번 항목부터 생각해보자. 예정보다 빠르게! 란 설명은, 서두른다는 것은 기준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결혼을 서두르는 것은, 결혼할 시기가 늦었지만, 결혼을 하는 '행동'을 서두른다는 의미가 있다. 결혼 준비 같은 것들. 또 어떤 것들을 서두르고 있을까, 무언가의 준비를 서두르는 것은 항상 거기에는 '데드라인' 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국 사람들에게는 데드라인이 여럿 있는 것 같다. 전술한 결혼도 그렇고. 모두의 선은 다르지만, 사회적으로 그 선들이 엉켜서 '이 맘 때에는' 하는 생각들이 공유되는 것 같다. 그러니 서두르란 말을 자주 하게 되는 문화권이 되지 않았을까. 


한편으론, '서두르다'의 사전상 1번 항목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일을 빨리 해치우려고 급하게 바삐 움직인다.' 왜 일을 빨리 해치우려고 하는 것일까. 더 일을 해야 하니까. 산업화 시대의 논리만 넣는다면 이게 정답일 것 같긴 하다. 급하고 바쁘게 움직여야만 하는 어두운 시대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도 그럴까? 물론, <그릿> 도 그렇고, 스마트하게 일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게 일하는 것의 중요성 자체는 공감하지만, 나라 사람 전체가 이렇게 일하는 게 과연 생산적인 일인지 고민이 되긴 한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바쁘게 움직일 일일까 이게? 회사나 다른 큰 조직에서 모두가 느끼는 고민을 이 단어들을 보면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신파와 한   


한민족을 '한'의 민족이라고 하는 때가 있다. 역사 속의 아픔이 많아서 그런지. 그래서 신파가 발달한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일까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신과 함께>를 보면서, 잘도 저런 신파를 만들었구나 싶지만 한편으로 또 눈물이 나긴 했다. 그러면서도, 저건 반칙이지!라는 마음의 소리를 질렀다. 저런 신파는 반칙이지! 안 울 수가 없잖아!


위키피디아와 나무 위키에 따르면, '신파' 란 '신파극'에서 나온 용어이다. 신파극은 기존에 일본의 '가부키'와 다르다는 의미의 극 공연을 의미했다고 한다. 당시 연극은, 지금 보다도 더 과장된 톤과 표정으로 진행되었고, 그 전통이 이어진 영상 예술 장르가 '멜로' '로맨스' 적인 내용과 연결되면서 '눈물 코드'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특히 '한'과 연결되면서 '신파' 가 곧 아픔을 건드려 눈물을 자극하는 형태의 것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신파'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애초에 시작이 과거의 것과 다르고,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의 단어였단 걸 생각해보면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만들어내는 변화상이 얼마나 극적인 것인지 상기하게 된다. 새로운 것이 고리타분해 보이는 데에는 100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는 시대가 된 지금에는 이 사실이 더 크게 다가온다. 


또 신파극이냐!라고, 반칙이라고 외치면서도 우리는 그 코드를 소비한다. 다시, 거기에는 '한'이라는 민족단위에서 공유하는 개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영화 <신과 함께>는 가난한 가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을 신파로 풀어내어 눈물샘을 자극한다. 비평가들은 싫어했지만, 영화는 천만이 넘는 사람이 본 흥행작이 되었다. 고리타분! 고리타분! 외치는 낡은 것이라도 여전히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한' 이 있기 때문이다. '한' 은 보통은 회한의 정서, 후회의 정서이다. 이랬더라면, 이럴 수 있었더라면 하는 정서이다. 과거가 바뀔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을 자꾸 찾는 것은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진 고난은 '한' 이 되고, 그것을 건드리는 '신파극' 은 그래서 고리타분한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과거의 향수와 아픔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니까. 기억의 하층부에 숨겨져 있는,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사건들. 그러니 '부모님'이나 '고향' 같은 것들이 다시 재현되어야 하는 것 같다, 신파극에선.






온정과 마녀사냥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다. 그런 표현들이 많이 보인다. 과연 얼마나 정이 많은 것인가? 글 쎄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적어도 현대 한국 사회만 보면 말이다. 여행지에서도 낯선 이에게 기꺼이 인사하는 문화도 아니고. 미담 기사가 많다는 것은 그것이 특별한 일이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TV 동물농장의 사연들에 눈물짓는 이들을 보면 온정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뭐, 꼭 한국이 다른 나라 사회보다도 정이 강한 문화라는 증거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다른 나라보다 덜하진 않다는 증거는 되는 것 같다. 


이런 정들 이 있기에 아름다울 때도 많지만, 또 많은 경우에는 '온정주의'로 갈 때도 있긴 하다. 관계에 기반하여, 옛정에 기대는 사람들. 엄청 냉철하게 합리적일 필요는 없지만, 과도하게 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도 현대 사회에는 어울리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사실 이런 '온정주의'는 이제는 많이 사라지고 있긴 하다. 갈수록 차가워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현대화된 사회일수록 지역 커뮤니티가 붕괴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 반대급부는 아니지만, 이렇게 '감정적'인 판단에 기대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다. '마녀사냥'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인터넷에서 자주 보이는 그런 행동들에는 익명성에 기댄 장난 외에도, 자기감정을 투사하여 인터넷 기사나 커뮤니티 글 속의 사연에 몰입하여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향성을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온정주의와 함께 이런 식의 몰아가기, 마녀사냥이나 희생양 찾기가 함께 사라질 수 있다면 기꺼이 조금 더 차가운 세상으로 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의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온정주의적인 봐주기, 혹은 따뜻한 미담이 줄어드는 것과 마녀사냥이 횡행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부정적인 감정만이 남아서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줄서기와 새치기


줄을 잘 서는 편이다. 한국 사람들은. '라인'이라는 개념은 아직까지 잘 쓰이고 있다. 서열을 매기고, 순서를 따지는 것은 만국 공통의 것이긴 한데, 지인끼리의 정에 기반한 커뮤니티의 힘이 아직 강력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라인' 줄 서기가 크게 의미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친목에 기반한 커뮤니티는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해 온 것이었다. 그래도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관계가 다른 관계나 항목을 씹어먹는 상황으로 간다는 것과 그 관계가 세속 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는 관측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냥 나랑 당장 친하다거나, 아니면 같이 나온 학교가 없을 뿐인데 배척하는 식의 모습이 있고, 지역과 학교는 갈수록 세습되는 형태의 것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 


줄서기를 잘한다는 것은 또한, 권력 위계에 순종적이라는 말이 되긴 한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새치기도 잘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게 권력 위계에 순종적이지 않단 말로 이어지진 않는다. 다만, 공식적으로 주어진 줄 보다도 더 높게 생각하는 권력 위계질서가 있을 뿐이다. 메타 줄 서기라고 해야 할까? '강원랜드' 입사 부정청탁을 보면서 그런 것을 느꼈다. 


새치기. 줄의 기준에 따라서 '강원랜드' 사건은 새치기가 아닐 수 있다. 모두의 정치권력에의 가까움이 선발이 기준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은 정당한 줄 서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를 빼고 나면 선발의 편의성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란 생각도 든다. 게다가, 정치권력에게 호의를 얻어 두는 것은 나쁠 것이 없는 사회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것을 새치기라 부르고, 제대로 줄 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는 늘어나고 있다. '라인'에 부정적인 어감이 들어간 지도 꽤 오래되었다. '어쩔 수 없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는 남았지만, '원래 그래야 한다'는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아직 한참 남았지만, 제대로 된 줄에 서고 싶은 사람은 늘어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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