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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Dec 11. 2018

속물에 관하여

바보-개새끼론

 한때 나는 '속물'이라는 닉네임을 썼다. 닉네임을 '속물'로 정한 계기는 나의 크고 작은 경험이 축적된 하나의 기준, '바보-개새끼론'에 있다. 이는 세상에 사람들은 살아가며 언젠가 바보와 개새끼 프레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개똥철학에서 비롯된 하나의 가설이지만, 최근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지향점을 찾는데 기능하고 있는 방식이다. 


 바보-개새끼론. 의도적으로 격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를 일반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이기적 자신과 그 여집합 사이에서 자기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야 하는 때가 인간에게 반드시 찾아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인간은 정치, 사회적 활동을 영위하는 자들만으로 한정한다. 즉, 현대 사회에서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의 안위를 위하여 본인이 믿는 가치를 따르는 결정을 포기하거나, 혹은 그 가치를 위해서 자기 안위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은 '행복'을 찾는 존재이다. 때문에 행복에 기준에 따라서 사람은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행복의 조건들은 몇 있다고 생각한다. UN 산하 기관에서 나오는 행복도 조사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톨스토이의 격언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재각기 다르다." 때문에 <행복의 근원>에서 말한 것처럼, '불행'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 정도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체로 특정 상황에서 유사한 선택을 내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의 목숨과 너의 목숨 사이에선, 나의 목숨.


 인간의 영역을 정치,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한정하는 것은, 그 집단이 곧 자신의 행위와 그에 관련된 사회의 이슈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린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자신의 이데아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도 가정한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이 가설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작게는 정의라는 가치와 학점이라는 자기 안위 사이에서 부정행위(Cheating)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에드워드 스워든 같이 내부고발을 하는 문제까지 확장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주: 물론 여기서 에드워드 스워드의 경우 자기표현의 욕구와 같은 자기만족, 위안적 요소를 따랐다고 평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시의성이 적절하여 골랐지만, 이 사례가 적절치 않은 경우 4대 강 문제에 대해 양심선언을 한 연구원 등의 한국 사례를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론, <이기적 유전자>의 가설대로, 유전적인 근연도를 기반으로 하는 '이타성'의 발현을 이러한 프레임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유전자를 가장 많이 남길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는 것, 따라서 이 프레임을 얹어 버리면 '바보' 도 없고 '개새끼' 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통계적인 단위에서의 '사람'을 이야기할 때는 의미가 있지만, 개인의 차원에서는 - 특히 그 선택을 해야 하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딜레마 상황은 주로 내게 '유전적 근연도'가 높은 쪽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사람'을 지지할 것인가의 상황이다. 근연도는 낮지만 성공할 경우 낮은 근연도의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는 경우의 수. 즉, 이러나저러나, 딜레마적인 상황은 분명 닥쳐온다고 믿는다.


 물론, 여기서 이 프레임(Frame)을 부수거나, 뛰어넘는 특정한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이를 영웅이라고 부르며 숭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이 프레임은 고전적 딜레마와 연관 있는 문제이기에 신화 속의 영웅에게 주어진 난제와 유사한 양상을 띤다. 솔로몬 왕에게 주어진 판결의 문제와 같이 일반인에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의 영역이라고 본다. 때문에, 이들 역시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다고 판단, 내 사고 판단의 기준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주: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개인들 역시 개별 사건에서는 프레임을 뛰어넘고, 부술 수 있지만 신화적 서사에서 조차 인간이라는 한계를 지닌 존재는 종국에 유사한, 그러나 다른 가치 판단의 프레임을 뛰어넘지 못하고 자멸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건의 가치 판단에 있어서 이렇게 프레임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나는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프레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이 프레임을 아직까지 실재하는 무언가라고 가정한다면 나 역시 이 가치 판단의 상자 안에 들어가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혹자는 상자 밖에서의 사고(Think outside the box)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메타 시스템의 인식을 통한 세계관 확장과 관련된 내용이고, 가치 판단의 상자 안에서 나와 같은 한낱 일반인은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창업을 시작했다가 크게 공포를 느낀 것은 - 내가 가족을 만들지만 않으면 무엇을 해도 괜찮겠다고 느꼈지만 잊고 있었던 부모님, 외조부모님들을 명절에 만나고 나서 난 이미 가족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취업과 창업 사이의 갈등이 재점화되었었다. 하고 싶은 것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이 최근의 지상 과제로 최우선 하는 가치 중 하나로 삼고 있는 나에게 현실적 굴레가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무슨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물론 이는 바보-개새끼 프레임에서 조금 빗겨나간 주제이지만, 이를 겪으며 내가 그 가치 판단의 상자 안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개새끼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 개인적 견해로는 그 개새끼-바보 모두가 사람이고, 존중받을 만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대 강 문제에 있어서도, 진부할 정도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을 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바보'의 길을 선택한 사람을 더욱 가치 있는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개새끼'를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 격한 단어 선택으로 인한 비하의 느낌이 있을지언정 - 그들을 낮게 보고 싶지는 않다. 내 미래의 모습이라 생각하여 혐오하고 미워하는 때가 종종 있지만, 그것은 내 감정이 격앙된 증상으로 보고 있다. 다만, 내가 '바보'가 되지 못함을 너무도 잘 알기에 '바보'의 선택을 한 이들에게 경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편, 드는 생각은 이 프레임을 알고, 무엇을 포기하면 되는지 알면서도,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자신을 예견하면서도 마치 프레임을 보고, 그 밖에서 내다보듯 말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양 축의 프레임을 '어쨌든'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속물' 개새끼인 동시에 속물인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다.  


 아는데 행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가치 판단의 상자 아래에서 앎은 크게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거나, 모든 상황을 일소할 어떤 힘이 있지 않은 이상, 그것은 인간이 가진 숙명, 딜레마에 가깝다. 하지만 그 상자를 어떤 형태로 재단하고, 정의하여 마치 그 밖에서 파악하고 있고 - 그리고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여 나는 안될 것이다 판단하여 움직이며 - 그리고 자기의 이익, 안위를 생각하는 존재를 나는 속물 외의 다른 단어로 표현할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기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계산적인 이타적인 행위 혹은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며 이타적 행위를 반복하였다는 것을 잠깐의 회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크게 보면 '개새끼' 쪽의 판단을 조금 더 자주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러면서 스스로가 '바보'인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그러한 판단을 한 사람에게, 사람들은 경외감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타심을 발휘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성향과 별개로 부족한 이성 탓에 어쩔 수 없이 '바보' 짓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그 행위 이후에 그것은 나의 가치판단이었다고 포장하고, 기억을 미화하여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인 양, 포장하여 은연중에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피를 마시는 새> 속에 '엘시 에더리'와 '두이만 염사장'의 대사, "제국을 지키면서 자기 여자 한 명을 지키지 못하는 남자를 뭐라 부르겠나" "제게 질문하신 거라면 대답하지요. 그건 병신입니다. 제국은 다른 사람들이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제국도 아니죠. 하지만 그 여자는 그 남자가 아니면 아무도 지킬 수 없겠지요" 하지만 작품의 끝에는 이를 비튼 대사가 나온다. "대장군님도 제국인데요?" 상술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와 사회 구성에 대한 생각을 연결하면, 좀 더 재미있는 결론에 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뉴스룸>의 명대사로 할까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단계는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미국 드라마 뉴스룸을 보며 이를 다시금 떠올렸다. 때문에 바보이자 개새끼인 '속물'을 나의 사이버스페이스 상의 정체성으로 설정했던 2013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는 그 '속물'을 덜어내는 글쓰기를 해볼까 한다.


  

 

주: 병신이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임을 2013년에 몰랐고, 당시에는 병신-개새끼 론이라 이름 붙인 바 있다. 고쳐 쓰면서 매우 바르지 못한 표현임을 알아 전체 수정하였다. 


2013.07.07. 에 쓴 글을 

2018.10.19. 에 고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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