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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스푼

피해자

by Jamin

어떤 피해자를 생각해보게 되는 날이 있다.


여자 친구와 노래방에 갔다. 오랜만의 노래방. 5곡의 기회 중 하나를 루시드폴의 <아직, 있다>에 썼다. 내 못난 솜씨에도 노래가 좋다고 하던 여자 친구의 말이 기억난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이 노래에는 진심이 담겨 있으니까.

이 노래는 세월호 추모곡이다. 가사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가사가 많지는 않지만. ‘노란 나비가 되어~ ‘라는 가사는 이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최근 이 ‘노란 나비'로 대표되는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는 일이 있었다.


어느 지하철 역에서의 일이다. 혼자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세상과 유리된 채 걷는, 평범한 날이었다. 계단에서 떨어진, 색이 바래진 노란 리본을 발견하였다. 누군가의 가방에 매달린 채, 어쩌면 2014년부터 계속해서 있었을 노란 리본. 그 바랜 색감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올해로 벌써 5년이 지난 일이 되었다.

2014년의 그 날에, 신입사원인 나는 팀 과장님의 말을 듣고 놀랬던 기억이 있다. 구조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점심을 먹는 그 날에 ‘저것도 개뻥일 수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한 과장님.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실 나는 처음에는 이 일을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많은 참사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참사가 지금 이 시점까지 이어져서 밝혀진 무서운 사실들을 보면서, 그리고 국가와 국민의 의무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면서 내 안의 세계관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월호보다 더 많이 지난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얼마 전에 방문한 용산역. 휘황찬란한 새로운 빌딩. 랩스타가 이사 간 건물.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용산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대통령의 장례식이 열린 날, 의무전투경찰순경으로 치안 보조를 위해 올라왔어던 남월당 건물 인근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건이 지나고 꽤 지난 시점이었지만, 카페 레아는 건재했고, 유가족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는 그 공간에 나는 그들과 대치되는 지점에 서 있었다. 나와 그들이 나뉜 거리에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왜 나는 여기에서 저들과 대치하고 있어야 하는가, 혹은 누가 이들의 죽음을 책임져야 하는가.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 이면의 것은 누가 책임지지? 나라는 발전을 해야 하고, 부동산은 거기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숫자로 변환된 자산들은 줄어들 수 없도록 고도화된 숫자 공장 속에서 돌아가고 있다.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후진을 모르고 나아간다.


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사회는 복잡계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의 몸도 복잡계다. 이렇게 많이 발전한 지금에도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체계인 경제 체계가, 국가 체계가 브레이크라는 것을 잘 모른다. 역행을 하는 순간에 무너지는 체계이다. 욕망을 불태워 달려 나갈 때에도 발맞추지 못하는 자들을 쳐내면서, 속도를 늦추면 3등석부터 잘라내고 달려 나가는 설국열차가 되어 버린다.


숫자의 세계에서는 그것은 굉장히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거에 꽤나 합리적인 보상을 주어도 된다는 숫자가 나왔을 수도 있다. 그 숫자를 지탱하는 법제도는 또 어떤가. ‘재산권' 은 근대 이후에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권리인데, 그 ‘재산권' 은 재산의 규모에 따라서 차등적으로 부여되는 권리가 되어 버린다. 합리성은 중요한 도구이니까,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사람이 죽으면 안 되는데. 하는 감상적인 말을 해서는 안된다. 뒤쳐지니까. <SKY 캐슬>에 열광한 사람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나는 당최 이게 왜 인기를 얻는지 모르겠단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연기가 좋고, 연출이 좋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불쾌한데. 왜냐면 그것이 실제 자신이 겪은 일의 연장선상에 있고, 거기에 꽤나 순응했기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보고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지는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서 학벌을 숫자로 바꾸고, 재산으로 바꾸면 꽤나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비교적 유한 느낌이기에, 나는 그 드라마가 별로 끌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대가 뭐 어때서. 어느 정도 돈이 있다면 다른 길로 돈을 벌 수도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똑똑한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오히려, 허위의식 혹은 계급의식으로 자신이 사회지도층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쓸데없는 과장으로 더 큰 문제를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학벌'을 블랙코미디 적으로 풀어낸 그 드라마. 2019년을 강타한 이 인기작 속에서 들어가 있는 것은 학벌 경쟁 속에 내재된 경쟁 논리이다. 그리고 이 경쟁 논리는 꽤나 만 연화되어 있어서, 그것 자체는 별로 문제시되진 않는다. 아니, 작가나 제작진은 그것을 의도했을지는 모르지만, 딱히 그렇게 전달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학벌' 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계급화된 사회와, 그것을 합리화하는 사람들 때문인데 우리 사회는 미국 흑인 레퍼가 그렇듯 ‘허슬 ‘하는 것에는 열광하면서, 그래서 경쟁에서 반칙을 저지르는 자들에겐 야유를 보내지만 경쟁 자체에 도태되는 사람들에게, 경쟁이 왜 나빠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진 못한다.


물론, 드라마를 다 보지 않아서, 그 안에서 경쟁의 구도를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정도는 보였지만 다 보진 않았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드래곤 사쿠라> 같은 드라마보다는 더 나은 지점의 논의를 하고 있을 순 있겠지 하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좀 더 큰 담론을 다룰 순 없는가 하는 아쉬움은 든다. 우리는 언제까지 경쟁하고 살아야만 하는가.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 ‘공산주의가 그래서 실패했다'라는 문장 때문에?


여러 가지 반론이 떠오르지만, 길게 말할 힘을 잃게 만드는 말이다. 어쨌든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라는 거랑, 세상이 원래 그래야 한다는 건 매우 다르다.’ 2017년에 발견한 이 문장은 요즘 나를 지탱하는 큰 축이 되었다. 그래,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고, 꽤나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때문에 협력 체계는 쉽게 변질되어서 공유지의 비극이나, 태업으로 이어지기 쉬운 것은 ‘팩트'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쟁'을 하는 사회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하지 않을까. 마치 ‘진화론'에서 자연도태, 약육강식 같은 것들을 사회학적으로 잘못 받아들여서, 우생학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세상을 전화로 불태운 나치즘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사람이 원래 이래, 라는 것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야 말로 꿈을 꾸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이 허무할 순 있어도 공허하진 않을 것 같다. 이뤄지지 못한 꿈을 꾸는 것이야 말로, 한 개인이 세계를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 안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것은 쉼세없이 해야겠지만. 선비의 마음가짐과 상인의 현실인식은 언제나 옳은 말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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