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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Jul 23. 2019

<천애협로> by 촌부

협객불망원: 협객은 은원을 잊지 않는다. 

불빛이 꺼지기 전에 새벽이 올까요


 예전에 무협에 관한 애정을 담은 글을 썼습니다. 그때 떠오른 책이 바로 촌부 작가의 <천애협로> 였습니다. 그 글에서 장르의 특징으로 무武, 주제로 협俠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장르 간의 경계가 불분명한 현재 한국의 장르문학 시장에서,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가 중 한 명은 '촌부'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천애협로> 의 시작은 전대 최고수의 실종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가 흥미롭습니다. 전대 고수가 무협 소설 속에서 주로 하는 역할은 주인공을 길러내는 것이지요. 클리쉐를 넘어 이제는 장르의 규칙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천애협로> 에서는 이 전대 고수를 다루는 방식이 몹시 색달랐습니다. 먼저, 전대 고수는 늙은 여인입니다. 헤테로-남성 독자가 절대다수를 이룰 것으로 추정되는 시장에서 몹시 새로운 시도였죠.


거기다 더해서 이 사람의 실종 사유는 대마두와 싸우다가, 아니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치매'. 치매에 걸린 전대 최고수의 실종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고아였던 주인공을 만나게 되지요. 그래서, 본래 무협의 클리쉐를 깨부숴 버립니다. 아이가 자질이 특별해서, 아니면 죽기 직전에 어쩔 수 없기에 주인공을 거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여워서 라는 설정은 제법 쓰이긴 합니다만, 이 경우에는 가엽기도 하거니와, 전대 최고수의 기억이 잘못되어 고아인 주인공을 자신의 손주로 착각하여 거둬 드리는 설정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다른 촌부 작가님의 이야기처럼, 천하를 재패하는 꿈을 그리지 않습니다. 절대악에 맞서기 위해서 홀연히 일어난 고수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복수가 등장하지만, 복수극의 형태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이고, 그 가족의 중심에 선 이가 '협객' 이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무'는 무엇인가, '협' 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시작할 내용은 책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기에, 책의 느낌을 온전히 받길 원하시는 분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읽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소개드립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촌부 작가님의 <천애협로> 입니다. 작가님의 이전작, <화공도담> <우화등선> <마감무림> 등 모두 즐겁게 읽어서, 신작이 완결이 나자마자 손에 쥐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중심으로 하는 스타일은 여전했습니다. 플롯이 특별하다거나, 반전이 있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유사한 주제와 이야기, 하지만 소재를 달리 함으로 약점이 될 수 있는 자기 반복을 극복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작은, 전대의 고수의 실종. 그 고수는 여성이며 노년. 거기다 치매를 앍고 있다는 설정에 처음에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촌부 작가의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초반에 답답함을 앉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하고요. 빠르게 기연을 통하여 강해지는 느낌, 최소한 한 회 한 회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야 하는 연재 기반의 현재 시장에서는 동떨어진 전개입니다. 빠른 호흡이 아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지루함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웃음이 계속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작품 초반의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전대 최고수가 고아였던 주인공 남매를 보살피는 내용입니다. 그들에게 무武가 무엇인지 협俠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장면들입니다. 약간 여기서는 불편함을 느낄 만한 내용도 있을 순 있습니다. 남녀 간의 성역할 등에 대한 '노파'의 인식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세 즈음의 중국 배경에서의 이야기임을 감안하면 그리 불쾌하단 인식을 받진 않았습니다. 그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도 종종 보였었고요. 


다시, 이야기는 전대 초고수가 잠깐의 '기억'을 되찾으며 급전개가 됩니다. 전대 초고수인 주인공의 '할머니'는 전대 최고수들의 싸움에 끼었었고, 그 당시 할머니의 남편에게 패퇴한 '혈마'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할머니'는 본능적으로 현시대를 이끄는 자신의 본래 자식들 (무림맹주, 대장군 등의 지위를 가진) 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혈마를 처단하기 위하여 사천으로 떠납니다. 


문제는, 치매로 잃었던 과거의 자식들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 사이 보살펴주었던 주인공 남매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억을 내놓은 채로, 세상을 - 무림을, 강호를 위해서 보다는 자신의 가족들 - 자식들의 안위를 위해 할머니는 혈마를 찾으러 떠납니다. 고전적인 가족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런 이야기 구조 속에서, 촌부 작가님의 문장을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해진 눈시울을 한 번은 겪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가는 길은 옳으나, 분노하며 갈 필요는 없다.
웃으면서 가거라.
사랑하며 가거라


잠깐, 할머니는 왜 치매에 걸렸을까요. 그는 세계관 최강의 무인인데, 역시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작품 말미에서 이에 대한 해석이 나옵니다. 촌부 작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경지에 이른 무인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천애天崖, 즉 하늘 끝에 다다른 사람들은 하늘을 오를 것이냐, 지상에 남아 있을 것이냐 하는 선택을 하는 거죠. 도가 무협을 쓰는 촌부님의 세계관에서는 이 선택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등선을 할 것이냐, 사람으로 남을 것이냐. 할머니는 등선을 포기합니다. 그의 남편이었던 절대고수는 등선을 선택하고요. 성별의 차이일까요. 그 차이가 작품 <천애협로> 내내 등장합니다. 


작품 속에는 무의 끝이자 하늘의 끝, 즉 천애에 도전하는 무인들이 나옵니다. 작중 악당으로 등장하는 혈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십 년 만에 등장한 혈마에게는 천하 일통도 특별히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하늘 끝에 오늘 수 있느냐이죠. 무협의 무, 그 끝. 그 끝으로 향하는 길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혈마와의 결전에서 할머니는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할머니는 혈마를 이길 수 없었을까요? 작품이 주는 뉘앙스는 이렇습니다. 하늘 끝에 도달하여 등선 하여, 지상에 남은 인연을 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그 뒤를 잇는 존재가 바로 진소량,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고아로 태어나 전대 최고수의 사사를 받은, 그러나 하필 그 최고수가 매병(치매)에 걸려 강호에서의 일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시골 청년. 주인공은 처음에 할머니의 발자취를 좇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할머니만큼이나 중요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작품에서 항상 있는 고질적인 문제이죠. 정의의 편이 약합니다. 사람들이 죽습니다. 주인공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할머니를 찾아야 한다는 큰 과제를 떠맡은 존재이지만, 이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의 할머니에게 받은 가르침이 그러하고, 사람이 사는 것이 그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땅을 딛고 있으니 땅에 대해 감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 보듬어주니 하늘에 대해 감사하라 하셨습니다. 

협로. 협행의 길일 수도 있고, 좁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 <천애협로>만 보면, 무학의 측면에서는 그 끝, 하늘 끝에 다다르는 좁은 길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작중 행적을 따르다 보면 그 외의 해석을 지지하게 됩니다. 하늘 끝에 다다르는 협행을 하는 길. 주인공은 사마천의 <사기> 속 자객열전과 같은 협객이 됩니다. 왜냐면 세상에는 악이 많거든요. 그리고 그 악이 착한 이들을 너무 앗아 갔습니다. 그들의 뜻도 있습니다. 그들은 복수를 한 것이니까요. 작중 혈마를 따르는 세력은 마교로, 과거 정마 대전에 피해를 입었고, 어쩌면 그들의 침략은 그저 세상에 많고 많은 권력 다툼에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힘없는 이, 죄 없는 이가 희생당합니다. 촌부 작가의 작품에서는 이런 식으로 정/사/마를 가르는 기준이 뚜렷합니다. 작중의 정의관은 단순하고, 고전적입니다. 어쩌면 자유주의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뜻도, 이들의 뜻도 옳지만 상대를 힘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것이 어겼을 때에는 누군가 나서야 합니다. <어벤저스>와 같습니다. 누군가는 '복수'를 해야만 합니다. 


협객의 이야기가 다른 복수극과 궤를 달리 지점입니다. 협객은 개인사에 의한 복수를 행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대의를 위하여. 혹은 누군가를 대행하는 존재입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 팔다리에 지닌 힘이 남들보다 약한 자. 그들이 그들보다 더 강한 누군가에게 짓밟혔을 때 대신 나서는 자. 대행자이자 복수자이며, 현대 극의 '히어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촌부의 작품, 특히 이 <천애협로>는 현대 영웅극과 같이 영웅의 일상성에 대해 주목하진 않습니다. 고전적인 딜레마 상황과 갈등 속에서 각성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런 플롯만 놓고 보면 고전 신화, 서사시의 플롯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딱히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촌부 작가님의 작품이 약간 고풍적으로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현시대에 이런 답답할 수도 있게 우직한 영웅담이라니, 시대착오라고 부를 수도 있단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가면 뒤에 숨은 아이언맨이 아니라 '내가 아이언맨'이다라고 외치는 존재이니까요. 여담이지만, 이런 면에서 <배트맨>의 시대가 가고 <아이언맨>의 시대가 온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듭니다. 



모든 태어난 것에는 가치가 있으니 다만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홍정훈 작가의 <발틴사가>라는 작품에, 영웅에 대해서 '딜레마를 극복하는 존재'라는 묘사가 나옵니다. 인상 깊은 설명이었습니다. 힘이 강력한 영웅일수록, 시련이란 힘의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정의관이란 모두에게 다르고, 따라서 서로 다른 정의가 충돌하는 지점. 그 지점을 쾌도난마로 해결하는 것이 현대 영웅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콘텐츠에서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히어로라면 그렇지요. 


주인공, 진소량은 그런 맛은 없습니다. 고민하고, 고뇌합니다. 하지만 그는 잊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희망과 애정을 벗어던지지 않으나, '원한' '은원'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협로를 뚫습니다. 협객은 원한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협객불망원 俠客不亡願) 왜냐하면 그 원한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이 순간까지 민초의 대변자여야 하며, 따라서 그는 기억해야만 하고, 기억한 대로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천지불인天地不人. 작중에서 하늘 끝에 도달한 사람들이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치에는, '사람' 이 없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도, 가을이 와 겨울이 오는 것 속에서 피고 지는 것에는 '마음' 이 없습니다. 하늘은 그저 흐르는 대로, 순응하라 말한다 합니다. 그렇기에 협로에 오르는 이들은 미련을 버리고, 탈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잊으라고 말합니다. 원한도, 원망도. 어떤 즐거움도. 어? 그런데 잊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더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품의 말미에 등장한 할머니는 퇴행에 퇴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를 본 주인공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그는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고민합니다. 천지가 불인한데,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협객이 필요하지 않도록, 사람들은 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늘 끝에 오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모두 비우라고 주인공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협객행은, 세상 사람들을 기억 속으로 끌어 모으는 행위였지요. 남들을 대행하는 자로, 그들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다만,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는 경지에 오른다고 작품 말미에 나오지요. 


이재일 작가의 <쟁선계>가 떠오릅니다. 앞을 다투는 싸움이야 허망하기 이를 데 없겠지요. 누가 잘못했냐를 수대를 반복하여 서로 묻는 세계 속에서 사람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협객들은, 그 대행자들은 누군가를 대변하지만 결국은 그 또한 불인한 세상의 순환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의 연쇄작용의 하나일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촌부 작가는 믿으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 도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할 것이리라, 토미노 감독의 <기동전사 건담> 세계관 같기도 하네요.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너무 작품의 주제문을 드러낸 리뷰인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읽은 지 시간이 지나서 다시금 찾아보면서 쓰다 보니 중구난방이기도 하네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부끄러운 부분이 덜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작품이 이상해 보였다면 그것은 작품의 탓이 아닌, 리뷰를 쓴 제 탓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강호에 도의가 떨어졌다. 제가 좋아하는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 1편의 대사입니다. 그 장면 이후에 마크 (주윤발 분) 은 그의 형님의 복수를 행하러 떠나지요. 도의란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는 미장센으로 보이기만 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협객이라면 응당 잊지 않아야 할 도의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에 대해서 쉽고 재밌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풀어낸 무협소설, <천애협로> 였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촌부 작가의 다른 작품들, 그리고 이 작품도 다시금 읽고 새로이 써보고 싶네요. 반복해서 읽어도 곱씹어볼 만한 장면이 꽤 많은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촌부 작가님에게 이런 식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오늘의 작품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반복적으로 두서없이 제 감상을 늘어놓은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다음번에 뵙겠습니다.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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