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나눌수록 커지나요 정말?
<기생충> 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 속에서 천만이 넘는 관객은 무엇을 보았을까. 손쉽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것을 보았다는 감정 외에, 이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주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기생충> 은 내가 바라는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다. 나는 단순하고, 멍청하기 때문에 쉬운 결말과 헤피엔딩을 추구한다. 가상을 만드는 사람은 가짜 헤피 엔딩이라는 마약을 주는 것이 차악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현실 진단을 보여주되, 그럼에도 희망을 주는 것은 조야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런 것을 좋아한단 말이다.
그러나 작품의 말미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감독의 전작인 <옥자> 나 <설국열차>와 같은 느낌이 없었다. 블랙코미디처럼 끝나간 마지막 씬이 어렴풋이 다시 떠오른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기우가, 작중의 집을 사기 위해서는 사람의 수명을 넘는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한다는 계산을 했단 말을 했었다. 현실적이다. 엄청나게 현실적이지만, 그 이상으로 상징적이었던 작품의 말미의 그 계산은 갑자기 모든 생각을 현실로 고정시킨다.
작품은, 그렇게 갑자기 현실로 우리를 불러온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있을 법 하지만, 사실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그게 영화니까. 굉장히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안의 캐릭터들은 우화, 동화 속의 캐릭터처럼 현실과는 약간 붕 떠있는 모습이었다. 작중 충숙, 기택, 기우, 기정의 가족이 그랬고 연교, 동익, 다송, 다혜의 가족이 그러했다. 물론, 이것이 내가 그런 처지에 있어본 적이 없기에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겠지만... 스크린 속의 모든 모습은 기본적으로 가짜라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관객은 표를 예매하기에, 되게 현실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안에 몰입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 경험에 연결된 고리들로만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작품 속 전반부의 블랙 코미디는 웃프지만, 즐겁다. 이미 알고 있는 현실 속의 이야기를 조합하여 충숙 등이 박사장 네 집으로 잠입하는 과정 자체는 실소와 어이없음, 그리고 약간의 희망과 예견되는 파국을 두려워하는 종합적인 엔터테인먼트 경험을 제공한다. 많은 리뷰어들이 언급한 상징체계, 알레고리 뭐 이런 건 사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왜 저게?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저렇게 해야만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문광의 등장과 함께 극은 급작스럽게 전환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블랙코미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패닉룸의 등장은 보다 더 극을 가상의 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이럴 수도 있지, 이렇게 살아야만 할 정도로 사회가 삐뚤어져있다고, 왜곡된 거울로 현실을 비추는 느낌을 받는다. 근세의 모습은 내가 눈길을 주지 않았고, 외면했던 사회의 축약판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광-근세의 모습이나 기택 등의 모습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사회 속에서도 각자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그리고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는 가능한 서로가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는 것이 굉장히, 굉장히 낯설었었다.
예정된 파멸은 그렇게 다가오고. 영화는 종막을 향해 치닫는다. 기정은 잠겨가는 반지하 집에서 비상금과 담배를 찾고, 불을 붙여 피운다. 냄새를 빼기 위해 노력을 하고, 다송의 생일잔치로 가게 된다. 결론적으로 근세는 기정을 죽이게 되었고, 충숙은 문광을 죽였다. 그리고 기택은 박사장을 죽인다. 그렇게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기택은 근세가 머물던 패닉룸으로 숨어 들어가고, 근세에게 당한 상처를 치유한 기우는 기택을 구하기 위해 이제 근본적인 계획을 세워야겠단 말을 하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감독이 작사에 참여했다고 하는 <소주 한잔>이 올라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lGhO25fRQ
그리고 우리는, 아니 나는 영화관의 불이 켜지고, 청소를 하러 오는 직원들을 보며, 흐르는 노래 가사를 들으며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이 얼마나 불쾌한 상황인가.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가족 희비극'이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은 겪지 않는 가상을 매체를 통하여 겪고,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런데 갑자기 현실 세계에 묶여 버린 그 순간에, 난 이 영화를 다시 보진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영화가 별로기 때문이 아니다, 절대. 오히려 엄청 잘 만든 영화이고, 많은 유튜버들이 분석한 상징체계들은 찾아보면서, 영화감독들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재미있기도 했고. 그러나 수석에 무슨 의미가 있건, 계단의 수직, 하강의 이미지가 어떻건 아무런 감흥을 주진 않는다. 이미, 수백 년을 모아야 저 집을 살 수 있는 상황과, <소주 한잔>이라는 노래가 더 이상 영화 속 서사가 아닌 나와 내 주변의 서사로 나를 붙잡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서 사회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해보고 있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이십 대를 넘기면서 나 자신의 이야기에 천착하고 있었는데, 사회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이나 이번 탈북자 모녀 아사 사건이 떠오른다. 가수 승리와 YG에 연관된 이야기가, 김학의와 이건희가 떠오른다. 이태원에 회사생활을 할 때 본 어마 무시한 한남동 저택과, 내가 살았던 창 없는 고시원. 그 보다 못한 여러 공간들의 기억이 입 밖으로 나올 듯 말듯한 느낌으로 - 찝찝하게 내 속에 섞여 더러운 기분이 든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왜 무엇이 이들을 나누고, 싸우게 하고 누군가와 누군가의 차이를 만드는가. 마르크스의 저서를 단 한 권도 읽지 못한 내가 왜 공산주의 혁명 말곤 답이 없게 고민하게 하는가. 구글과 애플은, 다른 기업들은 왜 세금을 회피하는가. 이런 사회 속에서 개인은 어떤 답을 찾아야 할까.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봇 영상을 보면서, 알파고를 보면서 느낀 감정들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영화의 제목은 <기생충>이다. 가제는 '데칼코마니' 였다고 한다. 누가 누구에게 기생하는가? 자본적으로 충숙의 가족이 연교네 가족에게 기생하는 것인가? 스스로는 짜파구리도 못 끓이는 박사장 네 가족이 기택의 가족에게 기생하는 것인가? 그 집안에 원래 살고 있는 이들은?
'기생'이라는 단어에 가지는 한국 사회의 안 좋은 인식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기생충은 자신의 전략으로 숙주에게 빌붙어 산다. 그리고 그 빌붙어 산다는 것에 우리는 가치 판단을 내린다. 빌붙어 사는 것은 안된다, 자립해야 한다. 그런 문화가 이 땅에 자리 맺은 지 한 참이 지났다. 나 스스로도 그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가 많으니. 남에게 빚지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마인드셋. 그러니 기생은 나쁜 것이 된다.
하지만 기생이라는 것은 대체로 단순하게 주거나, 받기만 하는 관계 설정은 아니다. 생물 영역을 잘은 모르지만, 기생충은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존재이며, 특별하게 그 수가 많다거나 특수한 개체가 있지 않는 이상 함께 '공생'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연가시는 사마귀의 생존 전략에서 꼭 사라져야만 하는 것일까, 종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서 꽤나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생존과 진화의 방향이 의지와 서사가 아니라 우연과 반복에 의해서 결정지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결국 그냥 이렇게 되었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정도만 결론이 날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근대를 접어지는 시점부터, 면역이라는 것을 알고, 위생이라는 것을 안 우리는.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공생하던 모든 것들을 사람이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영역 까지만 남겨두고 모두 지워버리고 있다. 쥐도, 파리, 모기도. 우리는 정제된 상수도를 보고 살며, 하수구에는 눈길 주지 않고, 피던 담배꽁초를 던질 뿐이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다 이어져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다가 플라스틱의 대란이 나고, 거북이 목에 빨대가 꼽히고, - 붉은 수돗물에 기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면역 - 위생 체계가 그럼 과연 '비인간' 에게만 적용이 되었는가? 글쎄 아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흑인은 더러워서 싫어요' 하는 멘트를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언가를 배제하는 데에 익숙하다. 이것은 무엇이 아니다는 식으로 사고를 전개하는 것은 근대-현대의 과학 체계의 주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설과,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아닌 것들을 걸러내는 소거법의 반복에 의하여 지금 우리의 풍요는 만들어졌다. 그 세계에 대한 인식은 제국주의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 인간끼리 서로를 나누고 배제하는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민족자결주의, 민족주의부터 계급-계층 의식은 사회 진보에 좋은 연료였다. 국왕에서 국민-민족으로, 그리고 중상주의 와 제국주의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다. 그 안에는 자본주의 - 물질주의라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이후에서야 이제, 여자도 사람이다(투표권), 아이도 사람이다(아동 노동권), 흑인도 사람이다(흑인 인권) 식의 '통섭' 이 시작되었다. 모더니즘의 종말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와 맞물려서.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가 아니라, 이것은 저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시대가 되었고, 우리는 배제가 아닌 통합의 과정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지난한 이야기이다. 여전히 페미니즘의 이슈는 너무나도 크고, 흑인 인권은 아직도 밑바닥에 있는 듯하다. (미국) 민족 중심의 파시즘적 세계관은 다시 부활하고 있으며 이제는 알고리즘이라는 '객관적'이라는 허울 아래에서 디지털 세상에서 필터 버블을 만들어내고 있고, 우리를 유리 감옥 속에 가두고 있다. 우리가 보는 유튜브의 영상으 모두가 다르고, 우리가 읽는 페이스북 글이 모두 다른 시점에 우리는 서로를 서로에게 기생하는 존재라고 여기고 있으며, 그것들을 박멸하는 식의 전개 혹은 그들을 내 사고의 영역으로 돌려야만이 사회가 진보하거나 - 아니면 적어도 현상 유지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생은 없다. 기생은 숙주-기생충의 관계를 굉장히 위계적으로 나누는 식의 표현이다. 생물학 혹은 최소 이과를 나온 사람은 다른 정의를 내릴 진 모르겠다. 하지만, 생물 혹은 존재라는 것의 위상이 사회적인 관념이다 지위, 물질로 결정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특히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로지 공생만이 있다.
인류가 모듬살이를 한 이래로, 희생양의 서사에서부터 우리는 내외부로 서로에게 칼질과 총질을 해대면 서 살아왔고, 좋든 싫든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 종 외 '가능성'을 박살 내버린 제노사이더의 후손이다. 인류의 발전은 대체로 커뮤니티의 크기를 키우고, 소통 가능한 개체를 늘리면서 '인권'을 만드는 것이었고, 사람다움이라는 것의 최소한을 공유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과정이 역행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고 있다. 공생으로 나아가는 길에, 누군가를 나에게 빌붙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어떤 집단을 특정 물질, 관념, 서사에 기생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진정한 소통은 이뤄질 수 있겠는가. <기생수>(이와아키 히토시 작)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점에 가깝다고 말한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 우리는 결국, 우리 생에는 결코 서로를 나에게 기생하는 존재라거나, 내 밑에 있는 사람이라고만 여기지 이해하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결국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급작스러운 결론. 그러나 물질적인 부재도 해결해야 한다. 어렵다. 문광과 충숙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여도 그들이 나눌 수 있는 파이는 결국 제한되어 있으니까. 짜파구리에 채끝살을 넣는 이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들은 대화가 되지 않는 존재이니까. 그들은 그들의 선을 가지고 냄새가 넘어오는 것 마저도 '불쾌'해 하니까. <부당거래>의 대사가 생각나는 마무리이다. 그래, 그분들이 불쾌해하면 안 되지. X발.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불쾌했고, 다시 보진 않을 예정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영화는 매우 훌륭했다. 재밌고, 웃음 포인트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고. 영화 평론을 업으로 삼은 이들의 밥벌이가 되기도 하거니와, 근로계약서를 잘 지킨 제작과정까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시 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영화이다. 다만, 나는 영화 외부의 세계에 못을 박는 엔딩과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고 - 영화의 알레고리나 상징보다는 이런 쪽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지라 이렇게 졸문을 썼을 뿐이다.
2019.08.24
서울 모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