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글쓰기 002
목적지 없는 게 쏘아져 나온 삶에 특성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틱낫한 선사의 글, 지금에 집중하자는 이야기를 마음에 새긴 이후로, 이영도 작가가 가이너 카쉬냅이었나, 우르술라 사르마크였나, 삶의 목적을 찾는 삶에 대해서 비웃을 때. 주퀘도가 삶이 일필휘지임을 깨달은 순간을 보며 더욱더. 목적지가 없는 게 딱히 의미 없음을 뜻하진 않는다고 살아왔다.
그러한 태도가 만들어온 현재가, 특별히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다는 평을 하는 게 바람직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흘러가는 삶에 대한 버릇을 키우며 어쩌면,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는 습성을 익혀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최근에 들기 시작했다. 문제를 돌아가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니고.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게 호인의 태도이며,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이룩하진 못할지언정 내 안의 테두리에서는 안정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떠한 문제들은 해결해야 하는데.
주어진 문제를 풀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흘러가고 나서, 그래서 문제를 피하고 피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 경쟁하던 시절이 끝나고 나서, 경쟁에 피폐함에 문제풀이라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과 그 결과물의 달콤함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나아가던 삶의 한 단편에 지난 직장이 있었고, 소중한 인연들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문제는, 정의하길 현재 상태와 바람직한 상태의 차이라고 한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알아보진 않았지만, 요즘 문제라는 주제에 대해서 탐독하며 얻은 하나의 결실이기에, 조금 여기에 천착하여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다. 문제 풀이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놀이의 특성과 같이, 혹은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해 오면서 코딩된 유전자, 호르몬의 무엇인가 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를 통해서 이룩할 것을 바라고, 소망하기 때문이지 않는가.
소망한다, 욕구한다는 것은 나와 세상을 분절하여 인식한 뒤, 그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인지하는 게 수반되어야 한다. 나의 현 상태의 다음 단계를 생각하는 시간 개념 혹은 인과 개념까지도 익혀야 할 것이다. 나의 실존은 어쩌면 내가 욕망하고 욕구한다는 것 그 안에 모두 담겨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고함으로 존재하는 건, 바라는 게 있단 것으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런 소망으로 인해 현재와의 차이. 여전히 유효한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인식에서 포기할 수도 있고, 그 문제를 더 풀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는 것이고.
비즈니스는 문제풀이의 과정이라는 정의가 기억난다. 누구의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가 비즈니스이다.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직무에 격언으로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를 사랑하라'라는 게 있는데. 해결책은 수단이고, 이게 목적지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게 많은 문제풀이에 도움이 된다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붓다였나, 불교 이야기에 강을 건너고 나면 나룻배는 잊어라라는데,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요즘의 나를 다시 돌이켜본다.
너무 많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 문제의 정의가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을 때 더욱 이게 많고, 힘겹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밥벌이, 먹고사니즘이라는 문제만 가지고 있기에 남의 문제를 풀면서 돈을 번다는 사실 아래에서 그 문제의 가짓수와 무게에 짓눌리는 느낌. 워크-라이프 밸런스란 어쩌면 여기서, 하모니도 그렇고 다 여기서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문제가 연결되어 있고, 내 문제를 확장하고 남의 문제를 확장하여 공통의 해결책을 떠올리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말. 그러니까, 꼰대 스타일로 주인의식, 사장처럼 생각하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꼭 그럴 필욘 없겠지만 주어진 문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긴 시간 - 대체로 주 40시간,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것이 불행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요즘 생각하는 다른 테마 중 하나, 멀티태스킹은 환상이고 불가능하지만, 하나의 스파이크, 일석이조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부분. 무언가 공통적인 원인들을 고민하고 해결함으로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더 낫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나의 문제, 나라는 존재가 가진 결핍, 취약점으로 이어질 것이다.
문제, 상황 그리고 남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게 어렵고 버거운 것은 '나'의 제약조건에서 나온다. 능력, 나의 시간, 재력 혹은 여러 가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거울 속의 사람부터 바꿔야 한다고 마이클 잭슨이 노래했듯, 시작점이 나여야 하는데, 남이 이러지 않아서, 사정이 좋지 못해서 라는 무덤을 파고 들어가면 도망치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미우라 켄타로 선생이 말했듯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물론, 문제들이 '개인' 에게 귀인 한다는 건 아니다. 개인은 제약조건이지, 원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사람이, 한 사람이 바뀌는 것만으로 해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또 반대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구조 만으로 사회가 변화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공산주의적인 구조 변화를 이룩한들, 공산주의 혁명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 문제를 직시하고, 스스로 해탈하고 득도하지 못한 채로 공수표를 남발해 봤자 변하는 것이 드물 것이다. 스스로 산 증인으로 문제를 해결함을 보여주지 못하면 남이 바뀌길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스스로 더 나아가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증명하고. 지치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한 밖으로의 문제 제기, 피드백을 받으며 나아가는 방향성을 증명해야지만이 변화를, 진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성장이라 부르는 것이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