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퇴사 부검을 처음으로 요청하고 받은 뒤에 쓴 답신
퇴사 부검을 처음으로 요청해 보았고, 처음으로 세션을 진행했다. 약간의 눈물이 있었고,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디저트를 구매하느라 지갑도 조금 아팠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해서 좀 피곤했다. 그 감정과 상황보다는 그냥 신체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행위 자체가 감정 호르몬의 정화에 도움이 된다는 글 혹은 유튜브를 본 기억이 있는데 그냥 시원하게 흘리도록 노력했어야 하나? 그것도 억지 텐션 아닐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눈물은 몸에 해로운 것이라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빨리 죽는다고 <눈물을 마시는 새>의 케이건 드라카가 말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말을 붙이면서. 남의 슬픔을 먹으면 그 사람은 죽는다고 단정적으로 그는 말했다. 그렇게 륜 페이가 죽었을까. 하지만 그가 ‘왕’ 은 눈물을 마시는 새 라고 정의하고, 사모 페이를 왕으로 만들었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륜 페이가 대속했기 때문에? 희생양으로의 대속자는 하나면 족한 것일까? 그럼 륜 페이는 죽었는가?
이영도 작가의 초기작인 <드래곤 라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표현을 했다. 영원의 숲에서 분열된 자기가 죽을 때, 우리는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니까, 내 기억이 곧 나이고 기억 속의 관계가 곧 나인 것이다. 나는 복합적인 존재이며, 누군가의 남편으로, 회사의 팀장으로 또 가족의 일원으로. 복잡한 과업을 수행하는 주체로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페어를 이룸으로 달성되는 것이기에.
따라서 샌슨 퍼시벌은 드래곤 로드가 네가 죽을 것이냐, 너의 소중한 이가 죽도록 할 것이냐의 질문에 내가 죽겠다고 말했다. 처음에 드래곤 로드는, 관계는 ‘나’로 시작하는데 왜 그렇지?라고 말하고, 후치 네드발이 ‘느리시군요’라는 말을 남기기 전까지 이해를 온전히 하지 못했다. 작중에는 종의 차이로, 일자로 오롯하게 존재 가능한 생명체의 종족으로의 한계를 보여주었는데. 이 말은 결국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핸드레이크의 말로 이어진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천원돌파 그렌라간> 은 성장 서사가 강렬한 작품이다. 본인의 멘토이자 형제가 죽고 방황하던 시몬. 그의 드릴이 천장을 깨부수는 순간들이 작중에 많이 나오는데. 그중 많은 팬들이 좋아하는 장면은 마지막 엔딩 장면이 아니라, 멘토이자 형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카미나는 죽었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라고 외치는 장면일 것이다. 몇 번이고 나도, 힘내기 위해 다시 찾아보는 장면이다.
카미나는 시몬에게 ‘너를 믿는 나를 믿으라’는 메시지를 전하여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었고 떠나기 전에 ‘너를 믿는 너를 믿으라’라고 말한다. 작중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드릴’을 돌리는 꾸준함 - 그 항상성에 관하여 카미나는 시몬을 믿고, 그가 아직 성장하지 못하였을 때 - 그러니까 자존감이 충분하지 못할 때 앞에 서서 나는 너를 믿으니, 너는 나를 믿으라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로 나가는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안정감이란 무엇일까. <두려움 없는 조직>을 읽으면서 반복적인 과학적인 근거와 방법론들을 고찰했고. 그 주제에 공감하면서도 어려웠다.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소설, 내러티브가 전해줄 수 있는 가치가 다르고, 그 몰입의 경험이 선사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래서 내가 생각한 내러티브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삶은 소풍이라고 천상병 시인이 말했지만, 사실 안전한 소풍이었던 적이 있을까. 결국 모두가 다르고, 세상은 변하기에 우리는 쏘아내어 진 상태로 그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언니네 이발관은 <인생은 금물>이라고 노래했다. 삶이 쉽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인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레퍼런스가 기억나지 않는데 ‘3루에서 태어나놓고 3루타를 친 것처럼’ 산다’라는 문장도 떠오른다.
<실리콘밸리의 팀장들>의 원제는 ‘Radical Candor’ 그러니까, 급진적인 솔직함이다. 저자의 철학은 결국 우리가 솔직하게 다가감으로써 - 연결됨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연결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오고, 따라서 조금 더 실험할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팀원에게 ‘꿈’을 물으라는 말을 했고 나는 수년만에, 오랜만에 본격적으로 꿈에 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꿈이란 무엇인가. 최소한 우리가 KPI에 적을 제한된 기간 내에 달성해야 할 분명한 태스크와 수치는 아닐 것이다.
<원피스-넷플릭스 드라마> 1화를 보면서 이 이야기를 상기했다. 사실 원작 만화책도 최근에 다시 보긴 했지만, 각색을 통해 강조된 내용이 어쩌면 과거 어릴 시절 이 이야기를 좋아했던 원래의 가치를 더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1화는 계속해서 꿈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루피’는 해적왕이 된다고 말하고, ‘코비’는 해군이 되어 약자를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조로’는 최강의 검객이 된다고 말하고. 이들을 잇는 것은 꿈이다. 꿈은 서로 다르다. 루피와 코비의 꿈은 종래에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피는 코비의 꿈을 응원하며 떠난다. 꿈이 뭐길래?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라이온이 말했다. “제 이름은 아실 테니 이름을 묻는 것은 아니군요. 그럼 후작님이 말하는 정체란 직업입니까. 인격입니까, 출생지입니까, 경험입니까. 부모의 이름입니까, 꿈입니까, 아니면 그 꿈을 위해 걷고 있는 길입니까?” 그래 꿈이란 무엇인가? 지향점인가, 소설의 제목처럼 북극성과 같은 지향점. 망망대해에 작은 세계에서 큰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 이정표인가.
보다 더 어린 꼰대이던 시절. 의무전투경찰순경으로 복무 중, 순찰 중이던 후임들에게 간혹 물었다. 꿈이 뭐니? 그때도 무언가 책을 읽고 빠져 있었던 테마였다. 숫자? 내가 왜 독서실에 연봉 1억을 걸어둔 친구를 비웃었을까. 일단 비웃음은 안 좋은 일이지만, 여전히 지향점이 숫자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중요하지 않나. 사람은 노동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노동이 즐거워야 한다고 믿는 철학을 세우고 싶은 자에게 숫자로의 인생의 목표를 설정한다는 개념이 썩 달갑지 않았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유해의 피라미드는 사모 페이에게 ‘자기완성을 위해 살아가는 자를 조심해’라고 말한다. 작가는 라수 규리하를 빌어 이렇게 답한다. 자기완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순간, 그 자는 자기부정에 빠지게 된다. 무언가를 완성하려면, 그건 아직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니까. 자기완성을 목표로 삼은 순간, 스스로의 인생은 완성되지 못한 것, 부족한 것으로 전락된다. 그리고 그런 자는 다른 이도 그렇게 판단하게 된다. 그것은 문제다.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가이너 카쉬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자 하는 자에 대한 독설인데, 만약 그 의문이 풀린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제는 의문 없이 살아야 하는데, 의문 없는 삶이 생인가?
다시 퇴사부검의 순간으로 돌아가본다. 나의 꿈은 성공이고, 그것은 정의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는 어떤 삶. 떠나는 이는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이 있고 저를 벗어난 바깥으로도 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 가 되는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오, 흥미롭다. 그것은 <원피스>의 루피와 같은 이야기이지 않을까, 루피는 ‘해적왕’을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믿는다.
글쎄, 자유는 단어를 놓고 보면 또 많은 생각을 해볼 여지가 있긴 한데. <폴리리스 랩소디>의 노스윈드 선단의 기함은 ‘자유호’이고, 저자에 따르면 복수의 반대말이다. 콩심은 데 콩 나는 것이 복수적 세계관이라면, 자유란 불확실성에 가깝다. 너무 복잡하게 세계관으로 가지 않고 비유적으로 보면, 애정은 속박이고 소유 역시 자유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존재에 잡혀 살게 되듯, 내 차가 소중하면 차에게 내 시간을 ‘뺏기듯’. 그래서 작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은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형태로 물화되어 나타난다. <무소유>가 법정스님이던가, 성철스님이던가.
관념의 세계와 공상의 서사를 빠져나오면 무소유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그럼 반대로 나에게 충분한 금전적 여유를 가지고 자유를 실천할 수 있을까? 그럼 얼마나 필요할까? FIRE 족(빠른 은퇴 설계자)과 같이 내가 필요로 하는 자금과 평균 이율 등등을 고려해서 설계하면 되는 것일까? 그럼 그 목표를 달성한 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살게 될까?
때문에 루피와 같이 말하는 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일체유심조’를 기억할 수밖에 없지 않니? 이긴 했다. 또한 꿈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으로 나아가는 삶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은 자유롭지 않다면 방법론을 다시 고민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공간과 관계 측면에서 자주 언급되는 <베르세르크>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가 시간축에서도 유효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현재 바로 꿈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실, 그런 측면에서 ‘루피’ 에게 할 잔소리는 없다. 그의 삶이 곧 그의 꿈이고, 자유이니까.
어려운 퇴사 부검을 요청하고, 몇몇의 눈물이라는 비용청구서를 맞이하였기에, 무언가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무언가 틀에 박힌 아무렇게나 하는 잔소리는 아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는 우리 팀원은 아니고, 앞으로 다시 보겠지만 매주 1:1을 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래서 하고픈 여러 가지 말을 눌러 담아 써볼까, 하다가 ‘꿈’에 꽂혀서 이렇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말로 꿰맨 글을 두들겨보았다. 세상사 요즘 다 TLDR인데, 어차피 GPT 가 요약할 글이라면 나도 나름의 요약을 하는 것이 의도를 가진 저자의 반항정신이지 않을까 싶은데.
굳이, 요약되지 않을 글을 한 문단에 요약해 보면. 꿈은 중요한데, 그 꿈은 측정가능해서는 안되고, 나의 상태여야 하며. 꿈은 또 거기로 가는 길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꿈으로 향하는 길이, 꿈을 달성한 상태와 동기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정체일 것이다. 나의 직함, 나의 연봉 혹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나의 길이 곧 내 정체일 것이라고 믿는다.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는 게 오랜만인데, 쓰다 보니 그냥 나에게 쓰는 글 같아서 민망하고, 전달할 생각을 하니 괴롭다. 비교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그렇게 피드백, 코칭을 했지만 여즉 남은 생각은 7천 자 넘게 퇴사 부검을 적어 주었는데 그것보다는 더 많이 해드려야지라는 얕고, 짧은 욕망. 그러니 그것을 거둬내고 마무리해야겠다. 이 글의 제목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퇴사 부검을 진행했으니, 그럼 이건 퇴사 진단서 (사망 진단서에 착안하여)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변사 사건 처리 규칙에 따르면 변사 사건이 발생할 경우, 수사하고 부검하여 명명백백하게 판정된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범죄 행위 등이 발견되지 않은 때 (증거로 기능이 없을 때일까) 담당 검사의 사인을 통해서 시신을 인계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글은 퇴사 요인이 퇴사자의 꿈으로 가는 길이 우리와 맞지 않음에 동의하고, 이를 인정하는 글로 ‘퇴사진단서’라고 부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