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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Apr 01. 2024

두 번째 퇴사진단서

네 번재 퇴사를 겪고 다시 꺼내어본

요즘 가끔 최태성 씨의 국사 강의를 보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아내가 머리 비울 때 보기 좋아해서 같이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이제는 까먹은 모든 것들을 다시 꺼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최태성 씨가 한국 역사의 변혁기를 이끈 사람에게 비전이 있었다~라는 표현이 와닿았습니다. 여말선초에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가지고 있었고. 보다 전에는 불교라던가, 서경천도운동에 있었던 풍수지리학이라거나.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고 뭐 여하튼 비전.


그래서 최태성 씨는 여러분의 인생에도 비전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프 베조스가 어떤 강연에서 말하더군요. 일을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구요. 그런데 왜 일을 하지 않을까요?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이 너무 어려울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하기 싫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보통 일은 하기 싫은 걸 일이라고 하고, 즐기는 것은 보통 논다고 하죠. 일을 하는 상태와 노는 상태는 꽤 다릅니다.


제현주 씨의 책에서, 내리막 세상의 노매드 뭐 이런 느낌의 제목의 책이었는데 여하튼. 노동의 어원이 고통이라는 식의 표현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하기 싫은 건 고통이죠. 물론 저 어원은 육체적 노동에 기반해서 생성되었다고 짐작하지만, 다른 노동, 일도 마찬가지겠습니다. 뭐, 대충 그렇겠죠. 하기 싫은 일이 있으니, 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는 스트레스가 생길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게 사라지는 행위를 할 때는 기쁘겠죠. 뭐 아무래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하이브 의장 방시혁 씨가 모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일과 삶은 조화가 되어야만 한단 말이지요. 일하는 시간을 대충 생각해 봐도, 이게 엄청나게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말이지요. 아, 그럼 우리가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일이 사라진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포인트 중에는 공허함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생각해 보면 이지 모드로 게임을 깨는 건 또 재미가 없고 - 오히려 더 '노동'처럼 느껴지던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온전한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상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노동 해방이라는 게,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에 종속적인 노동, 필연적일 수 있겠지만 자유의지가 박탈된 상태의 사회가 올바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최태성 씨가 역사를 보다 보면, 참여하는 사람, 자유를 가지고 의사결정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보였고, 진보가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그렇죠. 그래서 마르크스 이후에도 공산주의는 자본에 종속되지 않아도 되는 참여자를 늘리는 데, 민주주의만큼 기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지금 사회에서는 메커니즘보다는 그 비전 자체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은 해요.


그렇게 보면,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는 게 참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한 변호사 친구가 있는데, 대충 계산해 봐도 주에 딱! 일하는 시간만 90시간 가까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중에서 돈벌이에 관련된 일이 70% 정도지만, 이 만하면 쉬고 싶겠지만 그 친구는 그 이상을 다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더라 이겁니다. 뭐 분명하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에게는 무언가 비전이 보이고 있겠죠.


요즘 다시 되새기는 박진영 씨가 한 말. '왜'가 중요해가 다시 떠오릅니다. 물론, 이때 박진영 씨는 일종의 신앙이나 사고 체계로 말하신 것이긴 합니다만. 바르게 사는 것, 열심히 사는 것에는 너무 힘이 든다. 그래서 왜가 있어야 하고, 왜라는 걸 깨닫고 나니까 모든 게 편하다. 수년 전에 유퀴즈에서, 매일 하루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배고프다, 죽겠다'라고 하는 것과 상반되어 보였는데 또 그렇진 않겠더라고요. 힘들지만, 죽겠지만 그래도 한다, 나에겐 이유가 있으니까. 뭐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50이 넘어서도 댄스 가수로 계속 나아가는 그게, 저는 멋지더라고요. 양군은 사업가가 되었고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그 YG) 이수만 선생도 딱히 다르진 않았습니다. 현장을 계속 뛰는 그 이유를 찾은 그 사람이 - 저는 이해가 안 되는 신앙의 영역이었지만, 여하튼 멋졌습니다.


제현주 씨의 언급한 그 책인지, 알랭 드 보통의 일에 관련된 그 책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 일에 관한 것을 기독교 신앙 체계에서는 소명(calling)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회사로 치면 사명(mission) 이 되겠지요. 무엇을 하겠다! 이런 것. 요즘 이게 우리에게 부족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말고도 부족한 것 참 많지요. 그러나 몰입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들 중에서 제일 부족한 게 뭐냐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저 비전과 그 비전으로 가는 프로세스, 로드맵인 것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인지 누군인지의 글을 <팀장의 탄생>에서 줄리 자오가 2번쯤 언급하는데. 배를 만들려고 하면 사람들에게 배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기 이전에 드넓은 바다를 상상하게 하라!라고 하더군요.(찾아보니 생택쥐페리 인 것 같아요) 참, 뻔하고 말은 쉽다 싶지만 그래도 울림이 작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고민을 나름대로 하고 살았는데, 그게 충분하다고 생각이 꼭 들지는 않습니다. 뭐, 자학적인 성찰이기도 하지만, 늘 이런 비전과 왜! 에 관한 답을 넘치도록 해야만 하고 잘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렇지만 저도 이런 걸 주도하는 건 처음이라, 쉽진 않았습니다.


좀 계속 뜬구름처럼 적고 있습니다. 이 글은 퇴사 진단서입니다. 퇴사 부검을 퇴사하시는 분들께 요청드렸고 - 처음 그걸 받은 다음에 제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그 일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지요. 시간을 내어야 하고, 생각도 해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공개함으로 노출되는 피드백의 무서움도... 그렇지만 저는 이미 그 길을 거쳐서 제게 퇴사 부검을 제출한 분에 대한 염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제가 이 퇴사 부검들을 받을 때마다 고민하고 결과를 내는 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조금 힘들지만 하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즐겁다,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매번 불편합니다. 매니저로 이제 3년 차, 언제 누가 퇴사하면 어쩌지.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마냥 즐겁지는 않습니다. 원래 딱히 여러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성격도 아니었고요. 그렇지만 DNA나 혹은 MEME으로 형성된 있는 우두머리 성향이 있는 것일까요. 자리에 앉고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내 사람, 나의 울타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어떻게 이들이 즐겁게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계속하면서 공부도 하고, 실험도 했지만 아직 제 스스로도 개인적인 한계 속에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이 짧은 글이 무언가 영감이나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적어도 이 퇴사 부검에 진단서를 발급하는 행위가 퇴사자와 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이란, 그런 거니까요. 물론 뭐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메시지가 온다!라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고 봅니다. 한쪽으로 쏠려있지 않다는 뜻도 되고, 뭐 여하튼 대충 글이 구려도 이 행위 자체는 나쁘지 않지 않겠냐는 뜻으로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각설. 퇴사 부검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지난번 퇴사자의 퇴사 부검과 제가 쓴 진단서를 보고 그리고 다시 금번 퇴사자의 부검 문서를 보고 기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딛고,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쉬는 시간을 가지시는 결정을 지지합니다. 필요한 순간입니다. 퇴사 부감에 제 생각 이상으로 현재 퇴사자가 겪고 있었던 문제들이 묘사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솔직함이 필요한 데, 그것을 요청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꺼내드는 모습을 보며, 기존에 퇴사자 분이 가지고 있던 강점들이 떠오릅니다. 그 강점들이 여럿 있었고, 팀에 큰 도움이 되었지요. 그중에 선 구두로 충분히 전하지 못했던 친절함, 다정함이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라는 종이 공통의 서사, 미래를 상상하고 나눌 수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인가, 최초로 부상자 혹은 장애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담긴 유해를 발굴했다고 한 기억이 나는데. 그 순간이 인류의 가장 큰 진보의 순간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내가 아니라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 순간부터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가장 번성한 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게임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신뢰의 게임'이라는 글과, 인터넷의 시뮬레이터가 기억납니다. 모두가 신뢰를 하는 사회가 긍정적이지만, 개인이 최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신뢰보다는 배신에는 보복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라는 식의 실험 설계가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신뢰를 충분히 쌓을 수 없는 건가 우리는?이라는 불만도 있긴 했습니다. 친절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데 이게 맞아?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는 거야?


다시, 비전이 필요하고, 왜가 필요합니다. 최태성 씨가 삶에 비전이 필요하다고 한 것만큼이나, 우리가 모두 같은 목표를 보고 가는 동료라는 감정이 중요합니다. 퇴사자의 퇴사 부검에는 팀 간의 조화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피드백이 충분한지 잘 모르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하고, 그 문제를 야기하는 여러 가지를 해결하는 데 힘을 쏟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비전과 왜가 필요합니다. 대충 생각해 보아도 정말 힘들기 그지없는 일처럼 보이거든요.


변화의 순간입니다. 최태성 씨는 역사의 진보가 자유의 확장이었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럼, 회사, 조직 문화는 어때야 할까. 저는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같은 방향을 보고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팀 안을 넘어서 팀 간에 문화, 소통에 관해 더 고민하고 실행해 봐야겠습니다.


물론 체계가 중요하지만, 체계는 신뢰의 게임에서 처럼 배신자들이 등장하는 - 친절이 친절로 보답받지 못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기능해야 합니다. 시작은 서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신뢰를 만들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퇴사자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없진 않았겠으나, 지금은 조금 더 견고합니다. 퇴사자의 감사한 부검 문서를 통해서 무엇에 더 신경을 써야 할지, 내가 이번에 먹어야 하는 개구리가 무엇인지의 해상도가 높아졌단 느낌이 듭니다.


제가 이번에 - 다시 우두머리의 성향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제 생각을 잠식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퇴사자가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 것이. 어쩌면 우리가 가져야 하는 강력한 무기인 친절함을 잃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뭐 매번 잘할 순 없는 것이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무엇이 중한지 좀 더 고민하고 나아갔어야 하는데, 또 내 안의 동굴을 파고들면서 주변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게 아닌가 후회의 감정도 듭니다.


변화의 순간이 회사에만 필요한 건 아니겠지요. 퇴사자 분의 미래도 바뀌어야 할 것이고요. 무엇이 올 지 모르는 게 어떨 때는 두려움이고 어떨 때는 기대일 수도 있습니다. 벌을 기다리면 두려움이고, 선물을 기다리면 그건 기대가 될 것입니다. 퇴사자의 미래가 선물처럼 여겨지길 바랍니다. 저는 그렇다는 확신이 있는데요.


다정함은 모두에게 있지만 그것이 특성으로 발현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리고 퇴사자는 그 역량을 더욱 키울 수 있어 보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게, 최근 업무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한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여하튼 그 증거를 통해서 한 발짝 나갈 수 있는 적극성이 생긴다면 더 안정적으로 퇴사자의 친절함의 울타리를 넓혀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누구에게라도 필요한 것입니다. 필요할 때 작은 행운은 누군가의 친절일 것입니다. 그 행운이 행복이 되겠지요. 그러니 퇴사자가 가진 다정함은 행복을 만드는 원료로 기능할 것입니다. 이영도가 <행복의 근원>에서 행복의 근원이 불행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었었는데요, 반대로 그 불행에서 사람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다정함일 것입니다. 


<레 미제라블>에서 한 신부가 장발장에게 건넨 친절이 가져온 사람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가 떠오릅니다. 뭐 극 중에선 좀 비싼 친절이긴 했는데요(은식기랑 은촛대였던가...) 사실 다정한 사람이 미리 건넨 친절이 있었다면 - 장발장이 수감되기 전에 빵을 건넨 친절이 있었다면 더 나은 세상이었겠지요.


퇴사자 분이 남겨주신 말처럼, 이게 우리의 영원한 안녕은 아닐 테니, 

글을 너무 길게 적진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좋아한 책의 인사말 두 개로 마무리할게요.


필요할 때 작은 행운을,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길.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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