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가짜노동을 읽었습니다. 꽤 괜찮은 책이라는 추천을 받고, 기대가 높았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이 수십 번은 넘었고, 생각 이상으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좋은 책이냐고 물어보고, 누군가에게 읽어봄직하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그렇다곤 답할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처한 상황에서는 공감이 별로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전 직장을 다닐 때 봤다면, 잘 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지금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엄청난 스타트업이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아직 네카라쿠배탕토 몰두센 뭐 이런 등급은 분명 아니죠. 우리는 우선 생존해야 하는 곳입니다. 요즘 자주 우리가 쇄빙선인지 타이타닉일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고 비유를 들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직장이나 다른 직장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곳간이 차있으니 다들 별 쓸데없는 짓들을 한다고 느낀 적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스타트업에서는 가짜 노동이 무엇인가? 일단 없어야 한다는 것은 책과 같이 동일합니다만, 어떤 게 가짜노동인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패가 일상인 곳에서, 실패 하나하나 쌓아나가면서 성공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외의 성공 방정식은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이라면 이미 다른 기업들이 다 시도했을 것이고, 우리는 가설이라는 노를 저어서 망망대해를 나아가고 있고. 그걸 매번 바꿔 끼우면서 가고 있습니다.
괴혈병처럼 알 수 없이 찾아오는 번아웃들이 만연하고, 동기부여가 떨어지는 시점에 저기에 지구는 둥그니까 분명 인도가 있다고 말하면서 가야 합니다. 선상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들을 지나는 이 시점에서, 사실 지금 이 일이 정말로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가짜노동을 하고 있는가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물론, 진짜 일을, 정말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맞는데, 끝까지 해보기 전에는 그게 정말 가치 있었는지 아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일해야 하는 마인드셋을 장착해야만 하는 시점 이후로는 늘 그래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는. 책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공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변호사나 의사들이, 회계사들이 과로로 쓰러져갈 때도 있지만 그만큼의 보상을 받는 것처럼 - 미국의 자본주의, 프론티어십과 같이 스타트업은 나가야만 하고. 사실 더 많은 노동을 투입하는 것 이상으로, Scalable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 외에 이 불확실성 속에서 베팅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하지만 정말 비효율적이고 비효과적인 일은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 자체는 공감합니다. 그래서 신뢰가 필요하고, 친절이 필요하다고 회사에서는 역설하고 있죠. 이상한 일이 있으면, 신뢰를 바탕으로 그건 아니라고 충돌해야 하고, 그리고 그 충돌이 신뢰와 친절이라는 에어백으로 감싸져 있어야 한다고요. 또한 의미 없는 일이 있다면 바로 이야기하길 팀원들에게 이야기하곤 있습니다.
회의는 대표적입니다. 의전이나 보여주기를 위한 회의는 아니지만, 당장 문제가 잘 안 풀릴 때 사람을 모아서 회의를 하고 싶은 욕구는 충분히 있겠죠. 하지만 적어도 회의의 목적은 분명해야 하고, 회의록을 써야 하고, 회의의 결과로 행동이 이어져야 합니다. 회의는 비싸기 때문에, 가능한 회의를 하지 않고 비동기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외에도 여럿 있겠죠. 멀티태스킹은 지향하되, 언제나 일석이조, 하나의 원씽으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레거시 조직을 다닐 때를 회상하며 생각해 보면. 사실 비효율까지 포함하여 시스템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실리콘 밸리의 팀장들>에서 나온 것처럼, 사람에 따라서 열정 모드 아닌 모드가 시기에 따라 나뉘기도 하고, 아닐 때는 어느 정도 일에 있어서 약간의 버퍼를 두는 것도 필요하겠죠. 최소한 우리가 주 30시간 혹은 그 이하로 일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닌 이상에요.
생각해 보면 책의 저자는 북유럽에, 레거시가 가득한. 예전의 해적, 제국주의의 유산 위에 세워진 문명 안의 체계, 시스템에서의 사고를 전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고, 우리는 우리 안의 가짜 노동을 잡아나가야 한다는 말이죠. 기존 기업 혹은 공공기관과 스타트업이 다르듯이, 문화권에 따라서 다른 것들이 있겠습니다. 가짜 노동 특집을 다룬 한국일보에서는 유교 문화와 군대 문화의 잔재가 한국의 특수한 가짜 노동의 한 켠이라고 지적하였고, 책의 저자는 책과 같이 또 한국의 교육열로 인해 양산되는 화이트 칼라의 과다공급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가짜 노동이라고 단정 지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노동은 무엇인가, 가사 노동도 노동이고, 감정 노동도 노동이고. 또한 한편으로는 쿠팡 물류센터나 예전 신안 염전 노예와 같이 착취되는 노동에 관심을 두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저 비효율에 대해서 단호한 대처가 당장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혹은 모든 개개인이 노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능감을 못 얻는 것도 고민해 봐야겠지만.
일하는 시간을 줄여도 된다, 혹은 청교도적 윤리가 꼭 답은 아니다는 말을 보면서 도교적 사상 같은 느낌이 읽히기도 했습니다. 저 스스로는 동의할 때가 많은 안빈낙도적 삶이죠. 그러나 대다수가 다른 노동자의 임금이나 부를 착취해서 달성한 게 인류의 역사였고, 이게 쉽사리 바뀔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유년기의 끝은 어떤 것일지 다시금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케이건 드라카가 과거에 꿈꿨던 "서로 사랑하는 삶". 우리의 범위가 충분히 확장되는 삶. 가능할까요? 다양한 정치적인 믿음과 종교들이 여전히 충돌하는 현시점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답하는 게 좀 더 현명해 보이는 답인 것 같긴 합니다.
스타트업에 이제 꽤 오래 몸담아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생각보다 체계의 문제보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물론, 권위주의적 문화에 갇혀있는 것도 있긴 합니다, 참 쉽게 쓴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왠지 오늘은 이게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긴 합니다. 사실, 일체유심조이고, 성당을 짓는 벽돌공도 내가 신의 성전을 짓는다는 생각을 할 때 기쁘다고 생각해단 일화처럼요.
책에서는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기법에 의거하여, 관리자가 늘어났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동의 가능하나, 불필요하게 관리자가 많이 늘어났는가 하는 부분은 대리인 이론과 함께 상호 감시의 시스템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으로는 관리자라는 직책의 인식이 이제는 바뀌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도 있겠네요. 호손 실험 (관찰자가 있을 때 생산성이 올라간 조직관리 관련 실험)이나 JIT(Just In Time. 린 생산기법에 관한 것들), 저자가 언급한 최근의 스타트업 문화들도 있고요. 물론, 여전히 거대한 레거시 산업을 중점적으로 본다면, 다시 -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물론 관리직인 제 입장에서는, 가치 있는 일을 구성원들이 할 수 있도록 하는게 제 임무입니다. 조직 문화를 만들고, 프로세스를 만들고, 규칙과 템플릿들을 만들고. 코칭을 해야겠습니다. 참, 이런 일들을 하다 보면 이게 의미가 있나, 이게 가짜노동인가,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1:1을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었고. 좀처럼 변하지 않은 것들에 계속해서 계란을 던지는 느낌이 들 때는, 뭐 사실 요즘도 있긴 하죠. 하지만 조금씩 변하는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요.
아무도 읽지 않는 보고서라는 사례가 책에 나왔었는데, 흠, 네 그렇죠. 별로이긴 하죠. 하지만 장자였나 노자였나, 쓸모없는 나무의 사례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 보고서가 정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죠? 인용수가 0 인 논문이라서 의미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 부분에서 저자는 가치 판단을 너무 폭력적으로 내린 것은 아닐까요? 효율과 효과성이라는 자본주의의 무기로 내려쳐진 그 아래에 무언가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영도의 <카와이판돔의 번역에 관하여>가 떠오릅니다. 아무도 쓰지 않게 된 방언들, 이를 연구하는 것이 있다고 치면. 그건 가치 없는 일일까요.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좋아한다는 <미스터 선샤인>에 나온 대사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어쩌면, 소승불교처럼, 명상, 마인드풀니스처럼 대책 없이 개개인의 성찰과 각성에 기대는 보수적인 기대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의미라는 것은. 진짜와 가짜라는 것을 가르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 읽고 나서는, 책의 구성이나, 문장이 딱히 나에게 맞진 않아서 대충 읽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뭐 어쩌란 것인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을 때의 느낌도 그랬는데. 좋아, 이상한 일들 많지. 공무원 사회가 특히 그럴 때가 있긴 하지. 그럼에도 그게 있는 것은 안정성을 위한 것인데? 그것을 없애는 것? 좋은데 그걸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잘 모르겠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도 일은 계속 하겠죠. 계속해서 고민할 주제인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