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매일 글쓰기 (026/100)
두 개의 단어가 아침에 떠올랐다. 감정. 요즘 내 감정 조절은 어떨까.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고, 배움이 조금이라도 늘어난다고 감정이 정제된다거나.. 그러진 않는 것 같다.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해서,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도 되면서. “안녕”을 묻는 대자보의 시절의 기억도 떠오른다. 당시는 사회비판의 대자보였지만, 그 질문 그 자체가. 나는 안녕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속마음과 겉마음이 일치하는 것이고, 따라서 감정도 표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첫 문장은 <드래곤 라자>에서 타이번이 한 말인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모순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나를 숨기고, 꾸미지 않아도 되는 삶. 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로의 나. 그럼에도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럴려면 나를 우선 알아야겠지.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나의 생각인가, 존재는 사고에 기인한다고 데카르트가 그랬나. 내 몸을 분해하면 탄소가 제일 많이 나올 것일 텐데, 분해하지 않고 본다면? 내 세포가 내 삶이고 존재라면 내 안에 있는 미생물들이 나보다 더 많은데? 부피로 의미가 있나. 나는 무엇일까, 이것저것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건대, 존재는 관계 맺음에서 나오니까. 네가 없이 나는 없고, 꿈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것일까? 여기저기서 수집한 생각들이 뒤섞이는 순간들이 있다.
자아라고 함은 세계와 나를 구분 짓는 것이니, 존재는 관계이다. 나는 언제나 1인칭이고,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나를 정하는 것은 관계이다. 거울? 나와 빛의 반사를 다시 반영하는 물성과의 관계지 뭐. 이영도 작가의 <키메라>에서는 이렇게 존재의 규정을 욕망할 수 있다는 문장을 기반으로 자기 인식과 자신과 세상과의 구분으로 나누었는데. 독자로 오롯할 수 없는 모든 존재는 관계 맺음으로 규정되고. 그렇다면 관계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여러 가지가 있고. 물질적인 연결 등등. 하지만 존재가 사고라던 데카르트로 돌아가보면, 내 존재는 내 손가락이 아니고 내가 이러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리고 욕망이란, 감정이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감정. 무언가를 꿈꾸는 감정. 사람으로의 존재는 사고이고, 그것은 육체적인 필요를 넘어선 무언가일 것이고 그 재료는 감정이라고 생각된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을 매번 떠올리면서, 이게 맞나 싶다곤 생각하는데. 어쨌든.
감정으로 놓고 보면. 또 결국은 호르몬 작용 아닌가 해버리면 할 말이 없다. 뉴런의 반응이라거나. 그렇지만 이렇게 놓고 그냥 떠오르는 것은 <원피스> 1권의 이야기다. 샹크스가 한 산적에게 모욕을 당하고, 술을 뒤집어쓰고 나서도 웃는 장면에 어린 루피는 화를 내고, 샹크스는 왜 화를 내야 하는지 되묻는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저런 일을 당해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멋있는데’라는 투의 말풍선이 등장한다. 흠, 그래.
오다 선생이 큰 의도를 가지고 배치한 장면일까? 아마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글쟁이, 작가, 모든 이야기를 자아내는 사람의 시작은 그럴 것이니까. 그럼 그 의도는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루피가 해적왕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했을 때, 이 장면을 떠올랐다. 샹크스는 산적과의 불쾌한 관계에서 자유로웠다.
(아래부터 여러 작품의 스포일러)
검미성의 <망겜의 힐러>에서 뱀파이어 오크 전사, 오행복은 게임으로 변한 세상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충동에 휩싸인다. (사람이었는데 어찌어찌 오크가 되고, 또 뱀파이어가 되었기에) 뱀파이어로 변하면서 생기는 성욕과 같은 흡혈욕구, 미에 대한 집착과 오크라는 종족으로의 한계인 자제력의 부족으로 계속되는 내적, 외적 갈등에 휩싸인다.
작중 설정 상, 오행복이 이끄는 집단과 대척되는 집단이 뱀파이어로의 항렬이 높기 때문에, 지배의 위험에도 노출되었고, 결국 규칙에 따라,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규칙을 넘어서 되돌아온다.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본능을 넘어서. 자신과 관계맺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 새>에서 치천제는 “짐은 그런 식으로 정신억압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라세오날의 말을 아직도 생각해보고 있다. 너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하도록 했는데? 자유 의지란 그런 게 아닌가? 아트밀은 재미있는 산공부사와 율형부사를 구하고, 아라짓 제국을 다시 세우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얼어붙은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그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자유의지인가? 나의 삶은 , 당신의 삶은 자유가 얼마나 있었나? 주어진 상황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어쩌면 관계 속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장군이었던 엘시 에더리는 죄를 되찾기 위해 이라세오날에게 간다. 죄란 무엇일까, 규칙을 넘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규정을 벗어난 것. 순리대로 살라는 <더 킹>의 대사와 “세상이 원래 이런 것과 원래 이래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라고 말하던 퉁구스카의 <납골당의 어린 왕자> 속 한겨울이 떠오른다. 죄가 없던 엘시 애더리는 정우의 몸에서 나온 꿈에서 자유로웠다. 욕망하지 않으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사랑한다고 말해서 사랑하는 것일까. 순서의 문제. 주어진 주사위를 던지는 게 자유인가. 욕망함이란, 지금의 관계를 바꾸고 싶어 함이 아닐까. 따라서 자유와 죄는 꽤 닮아있고, 넘어가게 되면 방종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핍박하는 이들의 논리고 휩싸이기 쉬울 것 같기는 한데.
자유와 복수의 랩소디,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자유로운 자는 소유하지 않는 자였다. 자유호 간판 위에서 복수를 휘두르는 키 드레이번을 오스발은 ‘인간’ ‘사람’이라고 칭했다. 어떤 의미에서 복수자로 돌려주는 자 키 드레이번과 엘시 에더리는 닮아있다. 관계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죄, 자유, 욕망 그리고 감정. 나는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해 감정이라고 하겠다. 무언가와 관계 맺고 싶고, 어떤 것과는 관계 맺지 않고자 하는 느낌. 감정. 위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떠올린 것은 생각의 정리를 위한 리프레인이었고. 지금은 조금 정리가 되어 가는데, 각설하고.
그러니까, 감정이 곧 자아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나의 행동, 나의 사고 이런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이 나이고 그 느낌 자체도 감각 기관으로 센싱 하는 것이 아닌 내가 ‘감정’을 가지는 순간이야 말로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 삶의 철학이란, 나의 감정을 어떻게 쓰는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내 감정을 어떻게 쓸까? 언제 화내고, 언제 즐거워할까? 물론 호르몬 작용이 있으니 이런 것이 의지만으로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세상에 의지만으로 되는 게 어딨 나. 다 흘러가는 중에 관계가 형성되고 그 안에서 느끼는 것이니까. 어느 정도의 조절은 가능하겠지.
뉴스를 보면 화낼 일이 많다. 쇼핑몰에 가면 가지고 싶은 것이 많고. 또 책을 보면 재밌어 보이는 것,ㅡ 넷플릭스의 나중에 보기는 쌓여만 간다. 어떤 것과 관계를 맺고,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이냐. 그게 나이다. 그러니 그 선택과 반응 모두가 내 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고: 2023.09.14
탈고: 202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