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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Oct 08. 2016

<아수라> by 김성수

왜?라는 질문을 회피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상황이 꼬이다 보면, 사실 이유가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기도 하고. 내게 <아수라>는 그렇게 '왜'를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한 형사의 삶이 일그러지는 과정과, 그 속에서 그의 고해성사 같은 독백만 남겨 주었다.


영화는 무언가 넘쳐난다. 이미지도, 감정도. 과장이 심하다. 재개발에 따른 폐해라던가, 검찰, 혹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있을 수 있는 부패와 비리들.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이미지도 그렇다. 액션은 과장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액션들을 모아 그 결과를 보고 있으면 이렇게 까지 갈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내겐 묘한 기시감 같은 게 느껴졌다. 있었을 리가 없는 일들인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만 놓고 보면 헌정 이래 저런 아수라판이 어디 있었겠나 싶다. 그렇게 판을 벌렸는데도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야기는 그 무엇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는 있지만, 이 아수라판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부연 설명이 부족하다. 영화 <밀정> 이 끝까지 감독이 의도한 바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비하면 참 불친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내가 고민해 볼 수밖에 없다. 영화의 이미지에서 과장된 부분을 덜어내고 한번 생각을 해보았다. 결국은 돈일까, 혹은 욕심일까. 황정민 이 연기한 박성배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었을까? 진짜 한도경(정우성 분)은 아내의 병환 때문에 이 아수라장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까? 문선모(주지훈 분)는 한도경의 무엇을 믿고 따랐을까? 그의 자격지심이 이 이야기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김차인(곽도원 분) 은 지방대 출신의 검사로 출세길에 오르기 위해서 이렇게 날뛴 것인가? 도창학(정만식 분) 은 왜 이렇게 거칠어졌을까?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더라. 삶은 전쟁이라고. 모두의 삶의 힘든 부분을 모아서 구성하면 이런 아수라장이 나올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결국 삶은 투쟁이고, 쟁취할 것은 언제나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기에 우리는 결핍 속에서 서로를 미워하는 존재일까 하는 점. 나도 그럴까?


붓다는 삶에 부수된 고통을 인정하고, 열반에 이르렀다. 죽음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자세는, 그와 같은 구도의 길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 그럼 우리 같은 일반인은 절대자에 기대어,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고작일까? 한도경이 영화 내내 왜 이럴까요, 혹은 영화 마지막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영화 속의 악인들은 모두 숨을 거둔다. 사실 비중 있는 모든 캐릭터들이 크거나 작거나 죄를 저지르고 있다. 원죄와는 달리, 그들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타인을 고통받게 하고, 착취하고 혹은 그들의 불행을 방치하면서 죄를 짓고 있다. 그게 좀 과장되게 표현되었지만, 우리 삶도 사실 모두 그렇지 않을까. 그럼 그 죄의 끝은 영화처럼 아수라장 같은 파멸뿐일까?


영화는 처음부터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지 않는다. 해결책? 그런 것 없다. 해결책은 오롯이 이게 '왜' 일어난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파악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왜' 가 없다. 사회라는 복잡계(Dynamics) 속에서 그냥 일어날 수 있는 극단의 사건들의 집합일 뿐.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죽일 수도 있는 동물이니까. 


다시, '왜'. 붓다처럼 우리가 열반에 이르는 구도의 길을 갈 수는 없다. 복잡한 연결고리들 속에서 우리의 삶의 태도는 우리의 목적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그것들이 꼬여서 최악의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우리의 불행에는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고, 그래서 이 사회의 불행에는 이유가 없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따라온다. 아니 둘이 따라오기도 한다. 끝이 없다. 행복은 순간이고, 버티는 순간들로 삶의 대부분이 채워진다. 


다만, 사랑하며 사는 삶을 꿈꾸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혼자 만의 삶의 태도는 찢겨지고, 발가벗겨진 채 벌판에 버려진다. 그런 그가 꿈꾸던 복수는 결국, 다시 '사랑' 할 수 있는 존재의 증명을 통해서 끝난다.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의 이야기이다. 


그냥 갑자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삶은 사실 멋있는 영화처럼 아름다운 부분이 별로 없다. 물론 <아수라>처럼 극단에 선 고통이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더럽고 아픈 일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더 나은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어찌 보면 삶의 의지 외에 다른 것을 꿈꿀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 아닐까. 


영화가 묘사하는 '안남 시'는 절대로 한국의 축소판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각자의 삶에만 몰두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가상의 세상에 대한 시뮬레이션 시스템이다.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려고만 들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감독은 그려냈다. 


그래서 영화는 하나도 통쾌하지 않고, 액션의 결과들은 처참하기만 했다.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보기에는 불친절하고. 등장인물들의 의도는 묻혔고, 그냥 몇몇의 나쁜 의도가 모여서 최악의 결과를 내놓은 것만 같다. 근데 진짜 그럴까?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악인들이 모두 모여서 처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모두의 죄는 죽음으로 사하고 선인들은 그 아수라판에 떨어진 곳에서 그저 벌벌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까? 은실장은 사람을 미워해서 박 시장이 지시한 대로 마약을 운반하고 있었을까? 김자인은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서 그랬을까? 그들에게 정의감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까. 좋은 의도라는 것은...


영화를 보고 난 내 머릿속도 아수라장이라서 무얼 말하고 싶은지 정리하기가 어렵다. 근데, 하나 분명한 것은 어쩌면 우리의 결말은 <아수라> 보다 처절하진 않지만, 더 끔찍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를 긍정할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할 체력을 기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피곤한 일이다. 난 생선 비린내를 싫어하는데 누군가는 그걸 너무나 좋아할 수도 있다. 매운 것을 먹으면 설사에 시달리는 사람이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 매운맛을 즐겨 그런 집만 돌아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을 감내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호의를 유지하는 것은 체력을 소비하는 일이다. 정서적으로 혹은 진짜 몸뚱이의 힘으로 건.


그렇게 노력해도 어쩌면 아수라장은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건 신의 주사위 노름에 가까운 일이니까. 우리가 맞이한 민족적인 비극이나 국가적인 비극의 대다수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이다. 그럼에도 견뎌내고, 함께 살기 위해 손을 맞잡는 세상이라면 적어도 그 아수라장을 치우고 새 판을 깔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얕고, 어린 생각이 들었다. 


뭐, 아마 그런 세상은 내 평생 찾아보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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