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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자유의 변증법

365 Proejct (067/365)

by Jamin


바칼로레아 X AI 034: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욕망과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가?

바칼로레아 X AI 035: 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바칼로레아 X AI 036: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1. 서론: 과거, 자유의 양날의 검


과거는 개인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근본 토대이자, 동시에 트라우마나 사회적 억압의 형태로 자유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최근 신경과학 연구는 기억이 뇌의 신경 회로망 내에서 고정불변의 형태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유동적인 서사임을 밝혀낸다 (LeDoux, 2018).


정치사상은 과거의 구조적 속박이 집단적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실증적으로 드러내며, 철학은 이러한 딜레마를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실천적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렇다면ㅁ 과거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과거와의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대화와 능동적인 재구성을 통해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핵심 질문은, 과거는 과연 극복의 대상인가, 아니면 오히려 자유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 과거의 불가피성과 자유의 역학


2.1. 신경과학적 관점: 기억의 가소성과 잠재적 영향력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구성 요소이다. KAIST 한진희 교수팀의 획기적인 연구 (Kim et al., 2021)는 공포 기억이 저장된 편도체 뉴런의 높은 세포 교체율 (71.3%)을 통해 기억의 놀라운 가소성을 입증했다. 이는 기억이 마치 뇌 속의 '하드 드라이브'처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클라우드 서버'처럼 끊임없이 업데이트되고 재구성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광유전학적 자극 실험을 통해 '휴면 엔그램'이 장기간 잠재된 상태에서도 특정 자극에 의해 재활성화되어 원래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과거의 기억이 의식의 표면에서 사라진 듯 보여도, 뇌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현재 행동과 심리 상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Antonio Damasio (1994)는 그의 저서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감정과 기억이 이성적 판단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역설하며, 뇌 손상 환자 사례 연구를 통해 감정 결핍이 오히려 합리적 의사 결정을 방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과거 경험, 특히 감정적 기억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신경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이러한 신경과학적 발견은,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곧 현재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동시에, 기억의 가소성은 과거의 부정적 영향력을 완화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잠재력 또한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2. 정치사회적 관점: 집단적 기억, 사회적 트라우마, 권력의 작동


과거의 불가피성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북한 체제 초기의 집단 정체성 형성 과정은 과거 청산 시도가 사회 구조적 맥락과 충돌하며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일성 정권은 조선왕조의 유교적 전통을 부정하고, 혁명적 주체사상을 통해 새로운 표층적 정체성을 강압적으로 주입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농민 계급이 사회의 압도적 다수 (68%)를 차지했던 사회경제적 토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휴면 엔그램'처럼 사회 깊숙이 잠재되어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Cumings, 1997).


1946년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 계급의 경제적 기반을 급격히 해체하고 사회주의적 토지 재분배를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사회 질서의 잔재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의 토대가 되었다. 이는 과거에 대한 인위적인 단절과 망각 시도가 단기적인 사회 변혁에는 기여할 수 있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심층적인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내재된 과거의 영향력을 간과할 경우, 장기적으로 사회적 불안정과 새로운 형태의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Schwartz, 2000).


Hannah Arendt (1951)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과거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고 망각될 때, 전체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정치 체제가 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을 제공한다고 경고한다. 이는 집단적 차원에서 과거를 직시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공론의 장에서 건강하게 애도하는 과정이 민주적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3. 자유의 조건과 가능성: 과거와의 건설적 대화


3.1. 철학적 논의의 심화: 해석학적 순환, 비판 이론, 그리고 실존적 책임


자유는 과거로부터 도피하거나 단절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와의 정면 대면과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비로소 획득될 수 있는 역설적인 개념이다.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지만, 과거의 맥락과 사회 구조적 제약 요인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Sartre, 1956).


해석학은 인간의 이해 자체가 역사적 선이해 (pre-understanding) 에 기반하며, 과거의 경험과 전통은 현재의 해석을 통해 끊임없이 재의미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Gadamer, 1960). Hans-Georg Gadamer의 '해석학적 순환 (hermeneutic circle)' 개념은,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는 과정은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이 끊임없이 융합되는 변증법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비판 이론은 과거의 지배적인 역사 서사가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폭로한다 (Horkheimer & Adorno, 1944). 예를 들어, 식민주의적 과거에 대한 신화화된 서사는 현재에도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권력 작동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Michel Foucault (1975)는 "감시와 처벌"에서, 과거의 권력 기술 (power techniques) 이 '미시 권력 (micro-power)' 의 형태로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은밀하게 제약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이러한 철학적 논의들은 자유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축 상에서 고립된 순간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비판적 성찰을 통해 능동적으로 재구성해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결국, 진정한 자유는 과거로부터의 초월이 아니라, 과거를 책임적으로 마주하고, 그 의미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실존적 결단 속에서 비로소 꽃피울 수 있다.


3.2. 실천적 모색: 개인적 치유, 사회적 정의, 역사적 성찰


자유는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적 노력을 통해 현실 세계에서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심리학적 수용-전념 치료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CT) 와 불교의 무아 (無我) 개념은 개인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고통스러운 기억에 압도되지 않고,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며,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효과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Hayes et al., 2011; Kabat-Zinn, 1990). 하지만 개인적 치유 노력은 사회적 정의 실현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북한의 급진적인 계급 혁명은 사회 전반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정치적 폭력과 억압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트라우마를 양산하며, 과거 청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역사적 부정의 (historical injustice) 에 대한 진실 규명, 피해자 배상, 재발 방지 시스템 구축과 같은 사회적 정의 실현 노력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Minow, 1998).


또한,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노력은 미래 세대가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중요한 사회적 백신 역할을 수행한다 (Santayana, 1905). 이러한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 차원의 실천적 노력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 더욱 자유롭고 정의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4. 기억, 망각, 그리고 자유의 역설


4.1. 개인적 차원: 트라우마의 재구성적 치유와 망각의 역설


망각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무분별한 망각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김승진 (2019)의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억 삭제가 피상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실패하는 이유를 무의식적 반복 강박 (repetition compulsion) 메커니즘을 통해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는 편도체 '휴면 엔그램'이 의식적인 기억 삭제 시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활성화되어, 유사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려는 무의식적 경향성을 야기하는 신경과학적 발견과도 일맥상통한다. 흥미롭게도, 신경가소성 연구는 단순히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재구성 (memory reconsolidation) 기법을 통해 해마-편도체 연결 강도를 약 22% 감소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Schiller et al., 2010).


이는 트라우마 치유의 핵심이 고통스러운 기억 자체를 지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긍정적으로 재구성하고, 기억을 현재 삶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통합하는 데 있음을 시사한다. 즉, 과거의 상처를 망각하는 것이 능동적인 자유의 획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직면하고, 그 의미를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로 통합하는 적극적인 재구성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유에 다가갈 수 있다.


4.2. 사회적 차원: 역사적 기억 투쟁과 망각의 정치


사회적 차원에서의 망각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망각의 정치 (politics of forgetting)' 는 권력을 가진 집단이 과거의 불편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왜곡, 망각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이는 사회 전체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고, 미래 세대의 자유를 억압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Verdier, 2006).


예를 들어, 북한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관이 제한적으로나마 재등장하는 현상은,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철저하게 부정되었던 과거의 유산이 사회 구성원들의 심층 심리 속에서 완전히 망각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진정한 사회적 자유는 과거를 억압적으로 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을 용기 있게 기억하고, 망각해야 할 것을 선택적으로 망각하며, 과거의 기억을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동력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능력에 달려있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역사적 기억 투쟁 (struggle for historical memory) 과 공론장 (public sphere) 에서의 활발한 소통과 논쟁을 통해 비로소 확보될 수 있는,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다.


5. 결론: 과거와의 대화, 미래 창조, 그리고 자유의 재구성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상 불가능하며, 역설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유는 과거를 부정하거나 망각하는 수동적인 회피가 아니라, 과거를 용기 있게 직면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현재의 맥락 속에서 능동적으로 재해석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능동적인 재구성 과정 속에 존재한다.


니체의 ‘운명애 (Amor Fati)’ 는 과거의 모든 것을 숙명론적으로 맹종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운명 (과거) 속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극복하며, 더 나아가 운명 자체를 긍정하고 사랑하라는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경과학적 연구 결과와 철학적 성찰을 융합적으로 고찰해볼 때, 자유는 편도체 내 '휴면 엔그램'과의 화해를 통해 고통스러운 공포 반응을 점진적으로 감소 (약 57% 감소 사례 보고) 시키고 (Johnson et al., 2012), 과거의 파편화된 기억들을 현재의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서사로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적극적인 자기 수용 전략을 통해 발현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자유는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도달하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과거와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대화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재구성해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과거는 때로는 우리를 옭아매는 굴레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과거를 디딤돌 삼아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가 과거의 불가피성을 냉철하게 인정하면서도, 과거에 대한 숙고와 성찰, 그리고 능동적인 재구성을 통해 과거를 넘어서는 자유의 역설적인 가능성을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인간 자유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지속적인 성찰의 여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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