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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 관하여

365 Proejct (079/365)

by Jamin

예전, 텔레비전에서 멕시코 마야 문명을 소개하는 관광 프로그램을 보았다. 고대 피라미드를 둘러본 뒤, 진행자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야 문명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을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중 특히 목욕 문화가 화제가 되었는데, 유럽인들에게는 생소했던 뜨거운 증기탕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마야인의 전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질문이 있다.


“목욕이라는 행위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가 흔히 ‘깨끗이 씻는 것’으로 인식하는 목욕은 사실 각 시기와 문화권에서 매우 복합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어떻게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 시설을 넘어, 문명과 사회 구조, 그리고 인간의 심리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1. 문명과 목욕탕의 관계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이 '과거의 영광'을 언급할 때 주로 떠올린 것은 로마였다. 로마 제국 시절에는 수도관과 공중목욕탕(테르마이)이 고도로 발달해, 시민들이 누구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호사(豪奢)가 아니라, 도시 인프라와 공동체 문화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로마의 몰락 이후, 유럽 사회에서 이러한 목욕 문화는 오래도록 계승되지 못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이 퇴보해서가 아니라, 권력 분산과 자본 부족으로 인해 대규모 공공시설을 유지할 동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나 일부 권력층은 하인을 통해 개인적 목욕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목욕은 다시 냇가나 물이 고인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이 되었다.


2. 공공 목욕 시설의 사회적 역할


역사적으로 목욕은 개인의 위생을 넘어 공동체의 안전망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선녀와 나무꾼’ 같은 설화를 떠올려보면, 과거에는 사람들이 흔히 냇가에서 목욕을 했다. 이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안전이었다. 특히 여성들은 개인적 공간이 보장되지 않는 야외 목욕 환경에서 다양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공공 목욕 시설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어떤 문화권에서는 목욕탕이 성매매와 연결되기도 했다. 몸을 씻을 수 있고 옷을 벗은 상태가 기본이 되는 공간의 특성이, 때로는 음성적 문화로 이어지기도 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한편으로 목욕탕이 ‘개인의 위생과 편의 제공’이라는 본래 기능 외에도, 사회 구조나 가치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현대 사회에서의 변화와 쇠퇴


시대가 흘러 가정마다 온수 시설이 보급되고, 개인주의적 생활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전통적인 공중목욕탕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최근 통계만 봐도, 전국 목욕업장 수가 과거 대비 크게 감소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 사태는 대중 밀집 시설에 대한 불안감을 키워, 목욕탕 운영 자체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뜻밖의 사실도 드러났다. 일부 계층에게 공중목욕탕이 ‘위생을 유지할 유일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사회가 아무리 발전해도, 목욕 시설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목욕탕이 단순한 편의시설을 넘어, 여전히 사회적 안전망의 한 축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마을 공동체의 장’으로서의 목욕탕 이미지는 거의 사라졌다. 위생 관념의 변화와 감염병 우려, 그리고 개인이 집에서 자유롭게 목욕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자연스레 목욕탕은 일상 필수 공간에서 선택적 장소로 바뀌었다.


4. 목욕탕이 주는 철학적·심리적 의미

그렇다면 목욕탕은 단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야만 하는 공간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한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권위가 옷 위에 있는데, 여기서는 옷을 벗었으니 권위가 사라진다.”


목욕탕은 사회적 지위나 권력, 자본 등을 상징하는 ‘옷’을 모두 벗는 공간이다. 누구든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특성은 목욕탕을 사회적 배경을 초월하는 평등지대로 만든다.


또 다른 특징으로, 목욕탕은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를 꺼내기 어려운 장소다. 대부분 사람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시대에, 목욕탕만큼 확실하게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은 드물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순간순간이 몸과 마음을 ‘리셋’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5. 새로운 시대의 ‘목욕재계’

과거에는 종교적 의식이나 큰 결정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는 의미로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했다. 현대에도 이 개념은 유효하다. 다만 그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디지털 연결 속에서, 목욕탕은 자신과 마주하는 명상의 장이 될 수 있다. 아무런 필터 없이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는 시간은 삶을 재정비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노출되는 ‘이상적인 신체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욕탕에서 ‘몸을 드러내는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목욕탕이라는 공간은 그런 외적 기준이 무의미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모두가 옷을 벗고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 목욕탕이 건네는 질문

결국 중요한 것은 목욕탕이 존재하느냐, 사라지느냐가 아니라, 그 공간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의미를 발견하느냐이다. 누군가에게는 목욕탕이 과거 마을 공동체의 정을 떠올리는 추억의 장소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홀로 사색하며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하는 명상실일 수 있다.


우리는 종종 현대 문명을 ‘편리함’만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목욕탕 같은 전통적인 장소도 지금 우리에게 소중한 깨달음을 준다. 옷을 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원초적인 행위가 오히려 가장 깊은 사유와 자기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요즘 일상에 지치고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복잡하다면, 한적한 목욕탕을 찾아 현대판 ‘목욕재계’를 경험해보자. 디지털로부터 잠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는 이 시간은, 어쩌면 당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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