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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Sep 06. 2016

<월드워 Z>  - 리뷰

<부산행>을 보고 나서 예전 리뷰를 조금 손보았다. 

본 글은 2013년에 쓴 리뷰를 수정, 보완한 글이다. <부산행> 을 관람하고 나서 말이다. <부산행> 이전에 마지막으로 좀비영화를 본 기억을 되새기면서, 수정하였다. 오랜 리뷰를 꺼내 수정한 것은, <부산행>에 서 연상호 감독이 보여준 연출에 대해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뭐 다른 리뷰가 이미 많을 것 같아 딱히 남기고픈 생각이 안들었기 때문이다. 




관람일시 2013.07.13~14

관람 장소 신촌 메가박스


리뷰를 통해 원작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었는데, 영화는 원작과 (리뷰에서 말하는 것처럼) 차이(엔하위키:월드워 Z 항목) 가 많이 있었다. 원작은 일종의 인터뷰 방식으로 과거 월드워 Z 생존기를 취재하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영화는 주인공이 좀비 바이러스의 발병 원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차이가 많이 있다. (자세한 항목은 위 엔하위키 링크 참조)


질병(바이러스)에 대한 영화였기에, 작년에 관람한 컨테이젼과 많은 측면에서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영화의 초반에 보여주는 구성도 비슷하고, 애초에 질병 영화, 범유행 전염병의 성격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컨테이젼이 여러 시점에서 질병으로 인해 황폐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또한 그 질병의 원인이 결국은 사람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끝나는 것에 반해서 월드워 Z는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애초에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짚어 주지 않는다. 때문에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류의 영화와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왜?'에 대해서 추적하는 방식으로 영화는 전개되지만 '어떻게?'로 끝맺는 영화이다. 물론, 좀비 바이러스의 원인을 찾아 어떻게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기에, 적합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원작, 좀비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내가, 또 컨테이젼을 보았던 내가 보기에는 이 문장으로 요약되었다. 그리고 이 리뷰도 '왜'와 '어떻게'의 기준으로 전개가 된다.




영화에서 좀비는 청각에 반응한다. 시각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휴면 상태에서 활성 상태로 전환하는 장면들을 보면 모두 청각이 발달되어 있음을 묘사해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고편에서도 등장한 예루살렘에서 거대 벽을 넘는 좀비 떼들 역시 큰 노랫소리에 반응하여 폭발적인 힘을 발휘,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 구조물을 정복하게 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확성기나 스피커를 통해 소리가 증폭될 때 발생하는 고음역대의 잡음이 하나의 신호(Signal)가 되는 모습이라 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왜'는 당연히 빠져 있다. 


외계 침공이나 미스터리 공포물 등에서는 종종 이런 식으로 주인공 집단이 상대하는 대상의 특징에 대해서 묘사하면서 '왜'에 대한 서술은 빠진 경우가 많다. 2시간에서 3시간 안으로 제한된 러닝타임의 한계상, 긴 서사를 풀어내어야 하는 감독의 노고가 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업영화에서 - 또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에서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인 '왜'를 깊게 파고드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나, 좀비가'소리'에 반응한다는 것을 너무도 크고, 길게 묘사되어 있어서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문화 비평 시리즈 등을 읽다 보면 좀비는 반복 노동을 하는 현대인의 풍자라는, 혹은 그렇게 볼 수 있고 그것이 좀비 신드롬의 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한 글을 읽었다.(인터넷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읽은 글이라, 이 시점에서 링크를 찾을 수 없었다.) 월드워 Z의 좀비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람을 사냥하여 무는 것 말고는 다른 행위를 할 수 없다. 근처에 사냥할, 전염시킬 사람이 없으면 좀비들은 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존재의 의의 자체가 자기 확산 밖에는 없는 존재들은 분명히 쓸쓸하게 비취지기도 한다. 영화를 보며 옆자리 커플이 휴면 상태의 좀비들을 보면서 자주 피식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을 은연중에 파악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로테스크한 외양과 별개로 인간이 없는 좀비들은, 노동의 대상이 없는 좀비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방황하고,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는 - 지능이 없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좀비들이 인간이 아는 다른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청각' 적 자극 밖에 없다. 영화의 말미에서 보면 좀비가 반응하지 않는 상태로 변한 주인공이 자판기의 탄산음료를 쏟아내어 좀비들을 유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맥락상, 좀비가 사냥 대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주인공이기에 좀비는 사람이건 아니건 '소리에'반응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주인공의 아내에게 온 전화 때문에 좀비에게 노출되는 건을 보아도 이는 분명해진다. 일단은 공포물에 있어서 '청각'을 활용한 영화적 장치가 활용되기 좋은 상태로 좀비의 능력을 설정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약을 하면, '특정 자극'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상태에 높인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서 중요하게 본 지점은 그것이 실제로 그들의 소구 하는 대상이 아닌 그것을 연상하게 하는 자극만으로도 좀비는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즉,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나오듯 '음식'에 반응해야 할 침샘이 '종소리'에 반응하는 것과 같은 형태인 것이다. 




영화 초반에 급격한 공포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일관된 반응들을 보면서 이와 같은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분석은 아니겠지만, 특정 자극에 대해서 과도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충격 고로케 서비스는 이러한 '자극'을 과도하게 활용하는 인터넷 언론사들을 비판하기도 했었다. 혹은,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본인이 원하는 자극만을 기다리고, 자극이 주어지면 과도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좀비'들의 행태가 그저 알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 12초인가?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좀비에게 물린 사람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시간을 12초라 파악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장치를 활용하여 좀비의 피에 감염되었다고 생각한 주인공이 옥상 가장자리에서 12초를 세거나, 이스라엘 장면에서 같이 도망치던 이스라엘 여군의 좀비에게 물린 팔을 자른 후 12초를 기다리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나 평택의 미군 기지의 초기 감염자의 경우 10여분을 기다렸다는 장면도 나온다. 반면 이는 소설과 다르게 굉장히 빠른 감염으로 보인다. 소설에서는 좀비에게 물린 사람이 좀비가 되기까지 30여분~1시간 까지도 감염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시간의 단축을 통해 보다 빠른 바이러스의 확산이라는 무서운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반면 전염병, 질병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누가 감염자인지 모르기에 서로가 경계하는 사회적 모습을 그려내지는 못하고 있다.(물론 하루 내에 감염 결과가 판별되는 것 역시 무척이나 빠른 속도이기에 이를 그려내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좀비 영화 및 관련된 작품들에 무지한 관계로 기존의 좀비에 대한 묘사에서 감염 속도가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짐작컨데, 종전에는 감염 속도가 느리거나, 죽은 후 변하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형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감염 속도는 원작 소설에서도 굉장히 앞당겨졌고, 영화에서는 엄청나게 앞당겨져 있다. 영화 도입부에 들려주는 '아침 방송'에서 등장하는 카운트다운 목소리(12초), 그리고 그 안에 빠르게 전염되는 질병이라는 점은 분명 영화적 장치로 다방면에서 보여주기도 하고, 빠른 확산을 통한 공포, 거대한 좀비 떼라는 스케일을 영화의 서사 시간 내에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왜 특정 자극에 반응하는가와 마찬가지로, 초연결사회에서 급격한 속도로 '무엇이든' 퍼져 나가는 시대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왜 바이러스, 전염병 형태로 그려지는가. 좀비의 초기 형태에서는 주술로 인한 시체의 부활(Undead), 실제 부두교의 약물을 통한 반가 사상태 형태의 좀비가 좀비 바이러스의 형태로 오기까지는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검색 결과 초기 부두 술에 의한 부활의 개념과 별개로 감염 설정이 본격적으로 확립된 것은 1970,80년대 이후로 넘어가면서 영화에서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좀비'의 전염은 80년대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설정으로 볼 수 있다. 질병의 전파, 특히 전염병의 전파에 대해서는 언급한 컨테이젼과 같이 여러 가지 형태-영화나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고 이에 대한 분석도 여러 가지로 있었다. 과거 동양문화사라는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위생학, 병리학의 역사에 대해서 어렴풋이 접하면서, 이러한 인식의 잣대의 위험성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단선적 진화론, 문명의 우생학적 접근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전쟁 당시 성병의 근원을 서로에게 찾는 것이라거나, 스페인의 마야, 잉카 문명 지역의 점령기 당시에 몰이해로 인한 질병의 전파와 그것이 문명의 선진, 후진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았던 작태들을 보면서 '병리학'과 '위생학'이 그 인류에 공헌함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시대에 자국과 자 문명권의 '타자'들을 구분 짓고, 침략 혹은 수탈의 당위를 찾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에서 시행된 위생 경찰과 같은 제도들은 자국민 외, 자국보다 국력이 강한 나라를 제외한 사람들을 '좀비'와 같이 전염병의 창궐 및 확산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 관리하였다는 것이 보인다. 이러한 '바이러스' '전염병'을 통한 바람직하지 못한 세계, 문명에 대한 인식은 이 영화에서도 언뜻 보이는 지점이 있다. 이미 다수가 지적한 북한과 한국의 상황에 대한 묘사와 같은. 


그러나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접근은 최근에 읽은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책의 앞단에서 그는 면역학적 인식의 세상에 대해서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의 - 이항대립구조에 해당하는 사회 구조를 보여주고 이에 반하여 자기 긍정, 성과 사회의 지금에는 자학적 자기 착취에 대한 신경병에 가까운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부족한 지적 능력으로 인하여 완벽하게 독해하지 못하였으나 면역학적 인식에 대한 설명은 흥미로웠다. 스스로와 타자를 구분 짓고 타자를 배제하는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넘어왔다고 저자는 말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대조해 보면 '좀비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이나 '거인의 침공'(진격의 거인) 이야기가 여전히 소비되는 것은 분명히 배제하고자 하는 타자가 존재한다라는 인식에 근원 하는 것은 아닐까? 시사인의 지면을 통해 장정일 작가는 외부의 착취구조는 실재하고, 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피로사회를 비평한다. 한병철, 장정일 두 인식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장정일 작가의 인식에 있어서 결론적으로 구조에 대한 인식과 분노를 통해 연대를 해야 할 것인데 그것이 쉽지는 않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격 높은 인식과는 달리, 이 글에서 재미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분노는 상황을 중단시킨 자리에서 현재와 미래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어야만 생겨나는데, 활동 과잉과 속도에 전 현대인에게는 순간순간에 대응하는 짜증과 신경질만 는다."는 것이다. 기존의 '좀비물'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재빠르고, 파괴적이고 - 그리고 분노에 깃들어 인류를 공격하는 것처럼 비치는 월드워 Z의 좀비와 유사해 보였다. 




영화 초반에 바이러스 학을 전공한 박사가 바이러스를 - 대자연, 연쇄 살인마로 비유하며 꼭 그 흔적을 남긴다고 한다. 영화에서 그 흔적, 해법은 다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에 대해서는 - 약자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리고 영화 끝에서야 본격적으로 세계대전 Z가 시작이 된다. 그리고 인류는 단결하여 좀비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의 성벽 아래로 팔레스타인이나 기타 아랍 계통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받아준다. 왜? 그래야 상대하는 좀비가 적으니까.


부기팝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의 카도노 코우헤이 작가는 나이트워치 시리즈를 연재, 출판한 적이 있다. 유사한 방식의 전개다. 우주로 진출한 인류, 그리고 심연과 같은 우주 저편에서 다가오는 알 수 없는 막강한 적. 그리고 그것을 상대하기 위해 인류는 그에 필적하는 최후의 병기를 꺼낸다. 반면 여기서는 어렴풋이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우주로 진출한 인류에게 적이 필요하였고, 그래서 인류의 수준에 맞추어 적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결말에 가까운 부분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패배, 월면까지만 진출한 상황에서 인류 간의 싸움에 몰두한다.(물론 이 시점에서 적은 등장하지 않는 상태였다). 월드워 Z에서도 이처럼 거대한 타자. 손쉽게 무시, 배제할 수 있는 타자의 등장으로 인류가 '어느 정도'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점을 보여주지 않기에 나이트워치 시리즈처럼 다시금 인류 안의 다툼에 대한 묘사가 보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원작을 읽진 않았지만 원작에는 묘사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묘사는 선 악의 이항대립구조를 보이는 대다수의 작품에서 당연하게 등장하는 코드이다. 또한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유행한 '진격의 거인'신드롬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작품이 진행되며 지능을 가진 '거인'들도 등장하지만 초기에 '거인'의 모습은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보인다. (전염 안됨, 거대화를 제외) 그리고 이 작품을 일본의 우경화와 맞물려 섬나라라는 상황과 잃어버린 20년 등의 코드와 함께 읽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우경화-민족주의, 그리고 재특회로 상징되는 일본의 현재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럴듯한 해석이라 탄복했었다. 그리고 전술한 피로사회에서의 '면역학적 인식'과 월드워 Z, 그리고 카도노 코우헤이의 나이트워치 시리즈를 떠올리면서 타자로 인한 내부 집단의 결집에 대한 이슈를 떠올리게 되었다.(예루살렘에서 좀비들이 벽을 넘는 장면을 '진격의 거인'에 비유하는 리뷰도 있었다) (물론, 진격의 거인 같은 경우에는 압도적인 타자와, 그에 맞서는 내부 집단에서의 집단내 갈등도 그려내고 있다)




결국 전체적으로 인류의 전체적 결집은 - 중간의 시행착오를 제외하면, 절대적, 압도적 타자의 등장으로 가능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남게 된다. 전술한 좀비들의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과 격한 전염 확산 속도가 현대인들의 거울, 거울 속 타자로 보이는 것과 맞물려서 우리에 상응하는 타자를 통하여 인류는 한 발 더 진보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진격의 거인'에 대한 한 해제와 맞물려서, 결국 현재 그 방향이 자연과 신자유주의 구조를 제외하고 찾을 수 없고, 그것들은 장정일 작가가 피로사회에 대해 지적한 실존과 별개로 내 사유에서는 대중에게 '인지' 되기 어려운 타자인 관계로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른 인류의 집단 간의 '타자화'를 통해서 결집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쉽게는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파시즘에서 찾을 수 있다. 언급한 일본의 재특회나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 조선족들에 대해서 쉽게 낙인을 찍고 판단하는 작태에서 볼 수 있다. 혹은, 한 나라-민족 내부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은 이념적 대립, 정치 성향의 대립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8년의 촛불에 대해서 '좀비'라고 표현하는 모습은 그 증거 중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희생양의 논리는, 내부자와 외부자가 있을 때, 외부자 중 소수를 희생양으로 삼으면, 외부자 집단 중 다수가 내부자 집단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공범 심리, 동조자의 심리 효과로 인하여 외연적으로 내부자 집단으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이 희생양으로 선정되는 자들은 소수, 약자들이며 선택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대립되는 집단 - 국가와 국가나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격렬한 대립에서는 쉽게 성립되기 힘들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타자'로 인식하는 가운데에 자기 집단 내부에서는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배제'하는 방식으로 집단과 이념을 공고히 하는 시스템. 몸에 불필요한 것들을 쫓아내고, 그 원인을 찾아 백신을 만들어 없애 버리는 - 인터넷 논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팩트 찾기나 신상 털기(출신지 검증 등) 그를 통한 인신공격 - 방식은 근대 이후의 '병리학'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사회의 안정에 기여한 부분이 - 나는 -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서로를 '좀비'로 보고, 실제 좀비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실상'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살아야 하는가? 이영도 작가의 작품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거대한 정치 집단인 아라 짓 제국에 대해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파괴하여 피를 마시며 지속하는 조직이라 묘사한다. 작중에서 '아라 짓 제국'은 사실상 세상 유일의 '국가'로 타자가 없기에 스스로를 분리, 타자화하여 죽여야만 한다고 서술한다. 전작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네 종족의 사람(인간, 레콘, 나가, 도깨비)을 등장시켜서 거대한 전쟁(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제 의식이야 작품 간 차이가 있지만 본 글에서 찾는 '타자'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의 방향은 -내가 생각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말미에서 등장하는 대사에 녹아 있다. 


 "빌어먹을, 네 말은 헛소리다! 그렇다면 능력만 되면 누구든 다른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도 된다는 거냐!" "그것이 제 죄입니다." "뭐라고?" "그것이 제 죄입니다. 저 자신의 마지막 한 부분에 끝까지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 제 죄입니다. 저는 저의 마지막 한 부분을 긍정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죄로 생각합니다.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 저는 그것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제한에 빠져 있는 비아스의 모습을 견딜 수 없습니다. 자기와 다른 세상 따위 부정해 버리고 없애버리려는 그 모습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여인과 함께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케이건 드라카. 부탁하겠습니다. 제가 듣고 이해한 것이 맞다면, 당신은 한 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르다는 것을 긍정과 기쁨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그렇게 하십시오. 저처럼 되지 마십시오."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 우리에게, 혹은 우리의 일부에게 아직까지 찾아보지 못한 미덕 중 하나가 아닐까. 월드워 Z에서 좀비를 속이는 해법은, 스스로가 다른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는 것이다. 엔딩 장면에서는 조류독감 등 다양한 바이러스를 섞어서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그것이 '실지로' 묘사된 형태이지만 '평택' 씬으로 돌아가 보면, 평택 기지 내 첫 감염자 사건에서 살아남은 미군 병사의 경우 '바이러스' 가 아니라 물리적 사고 후유증으로 보이며, 오프닝 씬에서 홈리스로 보이는 노인을 좀비들을 지나치는 것을 주인공이 회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역시 노환으로 이한 '약자'가 된 것이지 바이러스라 단정할 근거는 없다. 


이스라엘 씬에서의 소년의 경우에도 바이러스에 걸려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영양실조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였다.(물론 병이라는 것은 그러한 상황에서 닥치는 것이라 WHO 연구소 씬에서 연구원이 말하는 바와 같이 다른 바이러스 감염자를 피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기는 하다) 여기서 더해 처음, 주인공 가족 일행이 헬리콥터를 기다리기 위해 아파트로 들어갈 때, 골목 입구에 앉아 술을 마시는 홈리스가 등장하는데 - 여기서 비약을 더하면 그 노인이 처음 대도시에서의 좀비 사태에 살아남은 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아닐 수도 있지만) 혹은 다른 사람이지만 그 홈리스는 왠지 살아남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하게 되었다. 




전술한 희생양의 메커니즘에 따라, 전근대적 사회에서 쉽게 자연신, 유일신 등에게 바쳐질 '희생양'으로 선택될 수 있는 사람들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은 '비켜' 간다. 제작자, 연출가, 감독의 의도가 무엇일지 분명하진 않다. 하지만 내가 파악한 바로는 이 설정은 영화판의 오리지널이다. 따라서 '의도한 바'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여 본다. 우리가 배제하였던 질병 보균자, 사회적 약자를 비켜가는 대재앙이라는 콘셉트는 시사하는 바가 없다고 하기에, 너무 노골적이다. 반면, 이 해석대로 보더라도 너무나도 진부하고(대재앙, 인류의 대적의 존재) 슬픈 결말이다. 스타쉽 트루퍼즈라는 영화를 보며, 외계 생물에 대한 인식이- 외계인에 대한 인식이 ET가 아닌 에어리언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며 나는 깊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희생양의 메커니즘은 결국 '먹이사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적 살인과 그를 통한 자기증식은 '문명'을 발명한 인류가 '동물'의 한계를 모사하는 행태(Skeuomorphic)로 보인다. 우리는 서로를 먹잇감으로 보지 않기 위해서 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할까. '좀비'가, '대재앙'이 없는 상태로 말이다. 





(제법 긴 사족들)


그래도 <부산행>을 보고 나서 고쳐 쓴 글이니 몇가지 사족을 덧붙여 본다. <부산행>에서의 좀비의 모습은 <월드워 Z>와 유사하다. 조금 다른 지점이라면 시각을 차단당했을 때, 목적을 잃는다는 것이다. 


<부산행>에서는 <월드워  Z> 와 다르게 좀비 바이러스의 근원을 한 회사로 특정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왜 그 회사가 작전 세력에게 휘둘리는지는 모르겠다. <바이오해저드> 의 엄브렐러 컴퍼니 처럼 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란 잡생각이 들었다. 


<부산행> 에서는 공통의 적을 맞이한 인류는 (혹은 한국 사회는) 단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상호 감독이 겪고, 바라본 인간 사회에 공감을 하면서도, 안타깝기 그지 없는 지점이다.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에서도 사람과 사람은 싸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참... 안타깝다. 나도 그 상황에서 타인을 배제해서 좀비 무리로 밀어넣고 살아남으려 할 것 같아서 더 슬펐다. 


영화 말미를 보면 어느정도 좀비를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나오는 것 같다. 이미 '동석무쌍' 마동석님이 보여준 것 처럼 물리력으로 처리 가능하며 물리는 것 외의 감염경로가 안보이니까, 통제 가능한 질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 이후에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부산 외의 지역은 황폐화. 외부와의 단절. 일본이나 중국에 의한 흡수통일이 되거나, 다국적 기구의 힘을 빌려서 좀비에 대항해서 낙동강 전선으로 가고, 제 2차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한다거나..(뭐, 마지막에 보면 서울에 있는 김대리가 살아있는 거니까, 서울도 어느정도 통제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뭐 이걸 좀비 영화로 구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냥 취약한 사회 시스템을 고발하는 영화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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