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멋진 신세계를 위하여
나는 기술 낙관주의자이다. 그래서 가장 ‘기술적으로 낙관적인’ 미래 속에 절망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노동으로 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이루어 낸다면(정신적인 노동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행복해 질까? 모두가 평등해 질까?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반면, 인간은 그만큼 성장해왔는가? 인류의 생산력은 60억, 70억을 감당할 수 있는 이 시점에도 기아로 인한 사망은 발생하고 있다. 기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언젠가 이런 문제가 극대화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겼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세상 말이다.
<멋진 신세계> 속 세상은 효율적이었다. 이렇게 포디즘(Fordism)으로 대변되는 효율성의 극대화는 우리를 더 멋진 신세계로 이끌어 줄 것인가? 이 분야에 대해서 연구를 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포디즘으로만 설계한 미래의 문제점은 대중이 이미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멋진 신세계>에서 불편함을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 인가?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소마’와 같은 ‘장치’를 예로 들어보자. 작품에서 레니나가 자신이 슬프고, 그렇기에 소마 몇 정을 먹어야 할지 계산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이에게 거절당한 상처 조차 수치화되고 계량화될 수 있다면, 어떤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슬픔을 계량화하여, 약으로 처리하다니, 이상해라는 생각을 버려보자. 모두가 슬펐던 순간이 있다. 물론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 있어서 즐거움이 온다라는 묘사를 떠올린다면, ‘슬픔’을 소거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위험은 인지해야 하겠지만. 슬픔이 없는 세상은 정말로 디스토피아 인가?
작중, 무스타파 먼드의 말에서도 재밌는 표현이 있다. 기술로 인한 변화에 과거의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 노화를 정복한 세상에서 노화에 대한 은유와 슬픔의 감정이 묻어 나오는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를 들어 인류의 재생산은 지속되지만 죽음이 사라진 세상은 ‘생산력’의 한계로 맬서스 식의 디스토피아를 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해결되었다면? 끝이 없는 인생은 디스토피아의 구성품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문제는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기대 수명이 늘어나고,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디스토피아’ 적인 이유는, 그것을 뒷받침할 사회 제도가, 재분배의 알고리즘이 작동하지 않은 탓이 아닌가?
현시점의 도덕적인 관점을 버려두고 <멋진 신세계>의 디자인만 뜯어보면, 몇 가지 요소를 제외하곤 일견 완전해 보인다. 하지만 무스타파 먼드가 가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이나, 특이행동을 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말이다.(물론 어쩌면 그것도 사람을 만드는 공정상의 실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작중에서는 묘사한다) 적어도, 전쟁이나 테러로 부터는 해방된 사회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가장 무서워해야 할 되돌릴 수 없는 폭력들 말이다. 아마 데이트 폭력도, 강간도 도둑질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회의 도덕 수준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조건 반사적 교육으로 이뤄낸 성과라는 것이 나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의 도덕에 대한 교육의 많은 부분은 왜 그걸 하지 못하는가 부분보다는 이렇게 조건 반사적으로 살인은 나쁜 것이다, 도둑질은 나쁜 것이다 라고 주입하는 것이니까. 다만 그것이 효율적이지 못한 부분이 문제인 것이지.
사실, 기술 낙관주의자 입장에서 ‘야만인’ 존 역시도 나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변화된 세상에 과거의 ‘윤리적 가치’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종교적인 의식 - 채찍질과 같은 고행 - 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물론 작품 속에서 그의 한계에 불과한 것이지만. 예컨대 64비트 장비에 32비트 OS 같은 느낌이었다. 시리아 난민을 구원하는 것은 교회, 성당, 절간 혹은 모스크에서의 기도가 아닌 성금이다. 그리고 지금의 사회 구조상에서는 아마 각 개인의 투표권 일 것이다.
결국 과거의 방식으로 기술이 가져올 ‘신세계’를 헤쳐나가는 것은 인류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애초에 존이 환멸을 느끼는 부분은 결국 프리섹스 같은 ‘신세계’의 문물 때문인데, 작가가 정말 이것을 ‘부정적인’ 의도만으로 해석하여 존으로 하여금 프리섹스나 여성이 요구하는 성관계에 대해서 혐오하게 만들었다고 하면, 그 역시 올더스 헉슬리가 가진 구시대의 관념의 한계라고 밖에 읽히지 않는다. ‘신세계’는 빅토리아 시대도 아니고. 캐나다 총리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은 2015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Lk2aSBrR6U
애초에 기술이 없던 구세계의 죽음이나, 각종 억업기제들이 옳다고 할 이유는 없다. 작중에서도 그것을 긍정하는 시도는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모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냉장고 없는 시대로 돌아갈 것인가? 그로 인하여 오래되어 잊힌 고전적 가치를 되살리기 위해서? 어차피 신세계에는 신세계에 걸맞은 가치가 필요하다.
사람마다 성윤리에 대한 판단은 아직 달라질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적어도 1부1처제의 관습은 정말로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프리섹스로 대변되는 신세계의 성윤리는 어쩌면 젠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안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특히 '육아' 및 '출산'에 대한 모든 것을 국가라는 조직이 대행한다는 것에 대하여 내가 가진 구시대의 윤리관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매우 합리적이며, 도덕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의 ‘자유 의지’의 말살, 우매한 대중과 같은 키워드가 떠오르기도 했다, 예컨대 알파 계급만으로 이뤄진 사회가 어떻게 붕괴했는지 보여주면서(공산주의에 대한 경계 정도로 읽히기도 했다.) 필요악으로의 차별, 그리고 그 차별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장치를 - 일종의 3S 같은-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술이다. 지금으로 보면 카카오톡 같은 MIM이나, 소셜 네트워크가 그 역할을 하지 않을까. 페이스북에 떠도는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3S적 요소들을 보면, 사실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정보를 더 멀리 퍼뜨릴 수 있는 기술이 나왔는데, 그 기술이 사용되는 대다수의 영역은 포르노라는 것이 현실이니까.
실제 인터넷이 그렇다. 또한 VR 에 연관한 기술이 민간 영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부분은 섹스 산업이라는 논평들은 유명하다. 물론 마찬가지로 성적인 부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화되지 못할 이유는 구 체제의 도덕관, 윤리 외에 딱히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세계'를 그려나가면서 그것을 '옳다 혹은 그르다' 말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에 볼과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멋진 신세계의 체제는 ‘나’를 허용하지 않는다. 개인보다는 대중이다. 모두를 위한 모두, 극단적인 공리주의나 공화정 체제로 읽히기도 한다. 전체주의로 읽는 것이 가장 합당할까? 하지만 기존 사회에서 보여주는 모습으로 묘사하기엔 한계가 있다. 왜냐면 절대다수가 이 체제에 만족을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억압도 없으니까.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좋아요 수치로 우리는 대중의 의지를 ‘계량화’ 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것이 비록 편향된 것일 지라도) 사람의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가 현 인류의 ‘종특’이라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때문에 ‘나’를 잃고 더 큰 ‘우리’를 얻어가는 것이 사회화의 과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 발전을 위해 옳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는 계속해서 달라져야 하고 진보해야 한다. 어쩌면 미래 인류는 전파를 읽는 세 번째 눈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현생 인류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다른 사람이고 격리되어야 할 ‘개인’ 일 것이다.
'누군가 하나는 뚫고 나온다.' 웹툰 <송곳>의 명대사이다. 집합, 군중으로 인류가 문제가 있다면, 누군가 한 명은 뚫고 나올 것이다. 그것을 망치로 쳐내가는 것이 사회 발전으로 옳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진보란, 변화이고 변화의 주체는 아마도 그 뚫고 나온 한 개인일 것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 속의 사회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내 기준에서 <멋진 신세계> 가 디스토피아 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체되어 버렸다. 전체주의적이다. 관념적으로 ‘경쟁’, ‘갈등’ 이 사라진 사회이기에 이럴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야기한 것이 과학기술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모두를 위하는 세상이 되도록 억제하는 과학기술 탓일 가능성이 높다. 입실론 계급의 노동이 과연 억압일까에 대한 부분은 별도로 해야 할 것 같다. 혹은 그들을 현세 인류와 같은 '종'으로 보아야 하는 것도 도덕적 관점의 판단이 필요하다.
또 하나, 궁금한 부분은, '예술 작품'에 대한 것이다. 과연 무스타파 먼드의 말처럼, 죽음을 정복한 우리는 죽음에 관련된 서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인가? 그것은 완벽하게 '타자화' 된 대상과의 화해와 같은 과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일까?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나는 문학적 가치가 있는 서사를 보고 싶다. <트랜스포머 2>부터 해당 시리즈를 혼자 보이콧하고 있는 이유는 가치 있는 서사라고 부를 만한 구석이 그다지 없기 때문이었다. 촉각, 향기 등 지금의 표현으로는 4D 영화 혹은 그 이상의 차원의 영화… 가 가지는 가치를 보고 그것이 옳은가?라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재밌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별 후에 '이터널 선샤인'을 보는 것보다 '소마' 몇 정을 먹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사실 자극이라는 것이 저 정도 문명에서는 뇌파, 혹은 호르몬 통제를 통하여 완벽하게 감각의 전달이 된다고 생각하면 - 그냥, 감정적으로 풍부한 사람의 것을 그대로 주입하면 되지 않을까, 큰 화면으로 볼 이유도 없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어두운 세상을 그려내었고,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적어도 ‘디스토피아’ 로 보기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유전자 조작(작 중에서는 굉장히 무식한 방법이었지만)을 통한 인류의 발전은 필요하지 않을까? 단순 반복 노동은 로봇이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작품에 대한 부분은 계속해서 시험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적어도 예술작품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과 교감을 해야 하는데, 화학 약품으로 이루어진 ‘소마’에 비견할 만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면 소멸되는 게 어쩌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지배체제가 굉장히 피라미드 구조로 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기술의 책임인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기술을 다루는 사람들은 그 기술이 특정 소수를 위해 작용해서는 안된다라는 신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 작중 서사와 같이 - 인류가 큰 전쟁을 겪고 나서 살아남기 위해 자발적으로 저 상황으로 가는 것이다.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에서 '루돌프'가 황제로, <스타워즈>에서 '펠퍼틴'이 황제로 가는 과정은 어쩌면 굉장히 ‘민주주의’ 적이었다. 어쩌면 가장 편한 길을 선택을 한 결과가 개인의 죽음과 전제 체제의 탄생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기술이 우리를 짓뭉게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혐오하고 나누어서 서로를 짓뭉게다 지쳐서 우리의 자유를 타인에게 헌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와 같은 기술 낙관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세상을 경계하는 태도를 항상 공부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할 때 ‘fool proof’ 설계 부분이 있다. 모두가 당연히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발생 가능한 사람의 실수나 오류로 야기되는 제품/서비스의 실패. 어쩌면, 멋진 신세계-디스토피아(distopia)는 이런 설계 없이 낙관적으로만 그려낸 미래상에서 인류가 적응하다, 빚어낸 바보 같은 실수가 아닐까?
정말로 멋진 신세계를 위하여
멋진 신세계 written by 올더스 헉슬리
#트레바리 #1601 시즌 #트레바리뇽
2015.12.20 ~ 2015.12.25 완독
2015.12.25 초고 / 2016.01.01 탈고
2017.01.30 2차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