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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Feb 11. 2017

<야망의 시대> by 에번 오스노스

중국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으라고 추천할 것이다.

머리말 - 지금의 중국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먼저 읽어라



<야망의 시대> by 에번 오스노스

에번 오스노스의 <야망의 시대>는 재미있는 책이다. '르포르타주'로 중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을 다루는 다른 책들처럼, '중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 약한 것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숫자-통계에 가려진 중국 사람의 본모습에 다가가는데 기여하지만, 장르적 특성상 '그래서 뭐?' 질문에 자유롭진 않다.


우리의 행동 방향을 말해 주지 않는다고 이 책의 의미가 바래진 않는다. 무엇보다, 타국을 다루는 많은 책과 같이 중국을 하나 된 이미지로 그려내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집중하여, 다양성을 드러내어 준다. 큰 이야기에서 그 안의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책과는 사뭇 다르다. 넓은 중국의 땅, 그 안의 생생한 삶의 현장 속에서 더 큰 이야기의 당위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에번 오스노스는 정돈된 언어로 정돈되지 않은 사회를 훌륭하게 그려 냈다.


중국을 다루는 좋은 책은 많다. 중국 사람이 직접 쓴, 우리는 이렇다, 이렇게 할 것이다 하는 책도 좋고, 중국인이 아닌 사람이 여러 가지 시각에서 중국을 '분석'한 책 중에서는 '중국'에 관심이 없더라도 꼭 읽어야 할 책도 있다. 하지만, 중국을 이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이 책이 여태껏 접했던 책 중에서는 제일 좋은 것 같다. 교과서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고, 학술 리포트로 접근하지도, 경영 컨설턴트의 분석 보고서 같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저, 그 안의 삶의 궤적들을 따라가면서 현대 중국의 모습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서 - 13억의 '야망'의 나라


중국의 인구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불가능할 수도 있다. 편의상 '13억'을 택했지만, 이 숫자에는 생각보다 큰 오차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기한 것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숫자의 크기를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13억, 혹은 그 이상'.


구글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인구를 검색하면 볼 수 있는 결과


사람은 모두 다르다. 이사카 코타로는 본인의 작품 <칠드런>에서 아이는 Child인데 왜 복수는 Childs가 아닌가에 대해, 그 아이 Child 가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사람 Person과 인민 People을 놓고 비슷한 말을 해도 얼추 비슷한 것 같다.


'한백무림서' 시리즈의 저자 한백림은 한 명의 절대 고수가 있는 무림(武林)이 아닌,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여러 절대 고수가 등장하는 세계를 창조해내었다. 저자는 언젠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본인이 수능을 보니, 되게 잘 봤는데 그 해에만 만점자가 여럿이었다. 그러니 저 넓은 무림(武林)에 절대고수, 유일한 1등이 한 명인 것은 이상하다는 것. 무림의 최고수가 아니더라도, 특이한 사람은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사기 맹상군전에 나오는 '계명구도'의 고사를 떠올려보자. 기인이사가 장삼이사와 다른 것은, '지금' 사람들이 주목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 뿐이다. 그러니 13억 사람들은 모두 다르고, 그 안의 기인은 또 얼마나 많을까. 예전에는 그 사람들이 그냥 산천에 있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는 '에번 오스노스'라는 사람 덕분에, 책으로 우리는 만나고 있지 않은가. 


에번 오스노스가 찾은 13억의 주머니 속을 찢고 나온 송곳들은 다양하다. 그 사람은 우리가 흔히 알던 이름이 아닌 경우가 많다. 마오쩌둥이 아니고, 시진핑이 아니다. 이들은 등장하지만, 그들이 주역은 아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람들이었다. 또, 책 속에 나오지 않은 다양한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중국은 13억이 넘는 인민의 나라이다. 그런 중국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중국인의 정체성을 하나로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세계를 더 빠르고 쉽게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선 '범주화' 가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시대별로 '중국인'을 쉽게 어떤 그룹으로 묶어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주화'는 이해의 시작이지, 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주머니 속에 13억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뿐더러, 대체로 그 주머니를 삐져나오는 송곳들이 그다음 주머니를 만드는 그룹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스티브 잡스의 날카로움을 닮은 레이쥔이나, 베조스의 뾰족함을 닮은 마윈이 그런 인물이지 않을까. 

            

저자는 그 송곳의 날카로움을 '야망'이라고 한다. 저자는 야망을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순수한 가능성 자체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한다. 모두가 제 삶의 주인공이라면, 그 작품의 주제는 '야망' 이 될 것이다. 


루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희망은 시골에 나 있는 소로(小路) 같은 것이다. 원래는 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 길이 된다.> 


위 인용구는 <야망의 시대> 속의 한 구절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범주 속의 '중국인' 은 어쩌면 공산당 간부들의 야망이 만들어낸 길 속을 걷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중요하다. 제프 베조스가 사업에 관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앞으로의 삶에 대한 판단을 할 때에는 10년 뒤에 바뀔 것을 보기보다는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을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하지만, 다양한 '야망' 속에서 시나리오를 그려 보는 것은, 더 큰 가능성을 찾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 아닐까? 



승 - 중국은 여전히 '천하통일'의 꿈을 꾸는가?


<대국굴기>라는 다튜멘터리가 있었다. 강대국의 조건을 다루는 중국 CCTV의 다큐멘터리였다. 중국은 다시 '대국' 이 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우리에게 익숙한 '동북공정'과 같은 프로젝트를 연달아 시작한다. 이것은 현재 중국이 차지한 영토 내의 모든 역사를 모아서, 하나 된 중국의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행위로 판단된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소수민족만 50여 개가 넘는, 아직도 위구르, 티베트의 내부 갈등을 품은 채 대국으로 갈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진행된 일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마리텔 방송 중 태극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있는 쯔위


그리고 '쯔위 사태'를 기억한다. (위키백과 - 현재 항목 삭제 토론 진행 중, 나무 위키)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인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현한 걸그룹 멤버 '쯔위'의 국적은 '대만', 정확히는 '중화민국'이었다. 


양안관계, 즉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애매하다. '3차 국공합작'이라는 이야기도 한 때 맴돌았지만, 홍콩의 우산 혁명을 거치며 하나 된 중국으로의 길은 혼탁해졌다. 서로가 서로를 국가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같다. 한국이 북한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땅에 대한 정부기관(이북 5도 위원회)을 설립한 것처럼, 대만과 중국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은 한국, 북한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쯔위는 대만 사람인가, 중국인인가? 정체성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철학적인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한 실마리를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얻었다. 개인의 정체는 타자를 통해서 형성된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과 세상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쉬운' 수단이며 범주화일 뿐이다. 개인은 개인이며, 그것은 본인의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신이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라고 말한 것처럼. '삶의 순간에 수많은 선택으로 이뤄낸 자신의 길'만이 개인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폴라리스 랩소디> 중에서


그런 의미에서 쯔위의 정체성은 걸그룹 '트와이스' 및 기타 방송 활동과 그의 꿈을 위해 걷는 길로 정의되어야 하지, 그의 국적, 정치적 정체성을 통해 규정되는 것은 그의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상이 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중요하다. 한국은, 중국은 혹은 세계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쯔위 사태가 대만의 총선 결과로 이어졌는지 분석하는 글도 있었다. 


마치 <광장>처럼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온다. 홍콩의 디자인 스튜디오 'Local Studio HK'는 일러스트 모음집으로 '홍콩'과 '중국' 은 다르다고 말한다. '일국양제'라는 단어에 천착하여 생각해보면, 정체성은 '국' 보다는 '제'에 가까운 것 같다. 정체성이 삶으로 증명된다면, 삶을 통제하는 것은 '경제' '식습관' '생활환경' 일 것이며, 그것은 중국 전역에서 이미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 도시인과 농촌인이 서로를 나누고, 구분 지어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시황' 이후로 하나 된 문자를 쓰지만, 광둥어와 북경어가 여전히 다른 것처럼, 다른 삶은 다른 언어를, 다른 정체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통치의 수단으로 '하나 됨'을 주장하여도 분열해야 할 것은 분열하기 마련이다. 



(c) Local Studio HK



<야망의 시대> 중, '치샹푸'의 말


하나 된 중국은 단순히 '중국'의 '공산당' 이 원하는 그림 만은 아닌 것 같다. '천하통일' 은 '삼국지' 게임을 하면서 수없이 본 목표였는데, 그 안의 영웅들의 생각이 아닌 일반 병사의 생각은 어떨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야망의 시대>에서는 그런 꿈을 꾸면서 일반 병사에서 장수로 올라가려는 '야망'을 지닌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은 '탕제', 그는 2008년 '중국이여 일어나라'라는 동영상으로 중국을 뜨겁게 만들었었다. 그에게 '중국은 무엇일까?'


나는 '중화사상'에 녹아든 '민족주의', 공산주의적 이념으로 양념된 '민족주의'를 읽었다. 한편으로는 '야망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국가 중심적인 사고가 해체되면서 그 반동으로 민족주의가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개인 중심의 사고와 이것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것 같지만, 아직 이건 터지지 않은 폭탄인 것 같아 보였다. '공산주의'를 표방하지만 제대로 된 혁명을 겪지 못한 중국은, 이 뇌관을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다시, 중국에 공산주의 혁명은 없었다.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통한 강제였을 뿐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공산주의, 당이라는 황제를 올린 것뿐이 아닐까.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없었다. 적어도 '인민'의 수준에서는 말이다. 때문에 사회 체제를 만들어 올리면서 만든 '공산국가'의 정체성은 소수의 '지배계층'에게 공유된 것이며, 지금의 '야망의 시대'의 정체성은 또 다른 것이라고 본다.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영화 <영웅>에서 나온 것 같은 '천하통일'에 대한 가치관뿐이 아닐까. 

   


전 - 장벽 안의 갈라파고스


나는 강남스타일을 재밌게 봤었다. 하지만 그것이 소위 '강남'의 부유층에 대한 풍자라는 해석에는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의 동감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삼성역 코엑스, 강남역에 '강남스타일'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드려놓을 때에는 심한 반감이 생겼다. 그러면서 다른 분석에서 지적한 '강남'의 허영을 풍자한 노래의 조형물이 '강남'의 상징처럼 지어지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를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야망의 시대> 에는 그것을 부러워하는 중국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이징 상류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거나, '수출용 뮤직비디오' 란 자고로 웅장하고 감명 깊어야 한다고  금지했을 것이라는 표현이 흥미로웠다. 중국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부의 실체와는 관계없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고, 그것이 문화계 전반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단순히 자국의 콘텐츠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제력, 소비 규모, 통제된 사회를 바탕으로 하는 '비토' 권한을 문화계 전반에 걸쳐서 만들어내고 있다. 언급한 '쯔위 사태' 나, 금번 싸드 이슈로 인한 한한령 등이 그렇다.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비토' 권이 발동되기 이전부터 '중국'의 눈치를 본다. 그래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의 주요 등장인물 '에인션트 원' 은 원작 만화와는 다르게 '티베트인'이 아니게 되었고, '화이트 워싱'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토론을 할 때 '비토' 권을 가진 사람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집중된 권력을 가진 그는, 소외된다. '비토'의 눈치를 보는 대화는, '소통'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그렇게 중국은 고립되어 있다.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다. 인터넷 서비스의 경우 '만리 방벽(Great Firewall)'을 통해 그러고 있다. 그 이름이 '만리장성'을 닮은 것이 묘하다. 실제로 <야망의 시대>에서 그 벽의 역할은 '외부'의 정보가 못 들어오게 하는 역할(페이스북, 구글 차단) 보다는 중국 내부의 생각의 자유를 옥죄는 형태로 그려졌다. 실제 '만리장성' 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더욱 의미심장하다. 


진시황의 '만리장성' 이후로, 중국은 한동안 세계 패권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 당시의 세계는 평평해지기 전의 세계였다. 중국의 영토가 한껏 넓어졌을 때는 '원' '청' 시대, 말을 타는 사람들이 지배하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성벽 밖으로 나가고, 성벽 안과 밖을 연결하였다고 생각한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성벽 안의 세상은 안정되지만, 성벽 밖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도태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13억의 인구 안에서 일어나는 '혁신'은 그 도태의 가능성을 낮추겠지만 본디 혁신의 배후에는 '혼종(Hybrid)' 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성벽 안의 삶의 변화의 속도는 느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c) Local Studio HK


만리방벽을 통해, 혹은 그와 유사한 '독재' 적인 정책을 통해 '중국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사회 진보의 '갈라파고스'가 되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를 지금 '중국'에 주어지게 되면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야망의 시대> 속 중국인의 말은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중국' 만의 사상의 발전 노선을 따라가야 한다고. 출발점이 다른 나라로, '분리' 하여 후일 '통합'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맞는 방향일지는 의문이 든다. 특히, 갈수록 강력해진 '비토'권을 획득해나가는 나라에서는. 


(주: 한편으로는 '한국형 민주주의' 가 떠올라 씁쓸하기도 하다.)


지금도 충분히 중국에서는 '혁신' 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게 지속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세계 시장에서 그들의 경쟁은 얼마나 잘 통할 것인가. <야망의 시대>에서는 '쿵푸팬더 문제'를 언급한다. 왜, 중국의 대표적인 상징물을 섞은 콘텐츠는 미국에서 제작되고 있는 것인가? 그러는 한편 '맷 데이먼' 주연으로 '만리장성'을 모티프로 삼은 <더 그레이트 월> 이 기다려진다. <영웅>의 장예모 감독은 장성 밖의 존재를 '괴물'처럼 그려낸 것 같다. 마치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장벽 밖의 화이트 워커 같은 존재로 그려낸 느낌이다.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참 별로인 설정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내게 중국 하면 떠오르는 영화 콘텐츠는, 대체로 '홍콩' 영화의 계보를 잇는 것들이다. <무간도>, 성룡의 초창기 영화들, 주성치의 영화. 특히 주성치나 성룡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가진 팬덤은 세계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오리지널리티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일대종사> 같은 아름다운 모습의 영화도 좋지만, 우스꽝스러운 풍자와 해학 그 자체도 이미 '중국'에는 있다. 그러나 이대로 그게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 영화들의 팬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주성치의 영화는 '중국'영화인가 '홍콩'영화인가. '성룡'은 어떨까. '우산 혁명/시위' 때의 홍콩을 떠올려 본다. 주윤발은 지지했고, 성룡은 시위를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홍콩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이제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산은 접혔지만, 조슈아 웡의 지지 세력은 홍콩 정계에 진출했다. 이 변화의 방향은 '일국양제'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고, '양안 관계'의 해법이 될지, 파국의 도화선이 될지 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더 그레이트 월>에 가진 편견처럼, 중국이 장벽 안의 온실, 갈라파고스로 계속 나가고 싶어 한다면, 홍콩의 문제는 더 악화될 것으로 보이고 대만과의 관계 개선도 요원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힘을 통한 굴복' 외에는 남은 길을 없애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결 - 공산주의 유령은 아직도 중국을 떠돌고 있는가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연세대학교 목하회에서는 '안녕하십니까' 대자보가 나붙던 시절에 이런 <안녕! 합시다>라는 글에서 '대학가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안녕들하십니까’ 라는 유령이'라고 썼다. 유령은 무엇일까, 왜 '유령'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것이 '실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괴담처럼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령' 은 기존 지배구조, 체제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우리 이렇게 살자라는 '선언'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공산국가일까? 적어도 '흑묘백묘' 이후에는 아니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상술한 것처럼 중국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지 않을까. 소비에트가 난색을 표한 것처럼, 마르크스의 모델에 따르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혁명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 이념은 꽤나 민주적이어야 하나, 체제 경쟁 시절에 수단과 목적의 전이가 일어나면서 '당에 의한 독재'라는 개념이 포함되면서 그것을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경제 체제도  많은 부분에서 자본주의를 따르는 형태를 봐서는, 이제 '공산주의'는 중국 땅에서 정말로 실체 없는 '유령' 이 된 것은 아닐까. 


다시, 공산국가란 무엇인가 노동자의 해방이 일어났는가? 생산 계급은 사라지거나, 배타적인 힘을 잃었는가? 오히려 더 막강한 '공산당'이라는 존재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묶이지 않았을 뿐, 당에게 묶여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본주의' 논리와 독재, 양 측에 묶이게 만들었다. '시진핑'이 주석의 자리에 올라가면서 '빈부격차'를 해소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계급적 투쟁의 승리를 의미할 순 없다. 명목상으로 이미 '공산국가'에서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일 테니까. <야망의 시대>에서는 중국 사회가 문혁 시대를 벗어나면서 '먼저 소수의 부자를 만들자'에 합의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부자는 등장했고, 막대한 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무엇이 될 것인가? 


그 부자들이, 아니면 공산당에서 귀족정에 가까운 정치를 하는 이들이 '공산주의' 이념을 우선할까, 하나 된 중국, '민족주의'를 우선할까. 지금 보이는 중국의 모습은 '민족주의 독재 국가'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파시즘으로 흘러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야망의 시대>에서는 그렇지 않은 '개인' 그려내고 있다. '류샤오보' 같은 개인들. 그들의 행적이 영웅적인 것은 금번에 한국에서 '오뚜기'의 상속 과정이 주목받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기에 주목을 받는 것. <야망의 시대>의 후반부에는 그 개인들이, 송곳들이 정을 맞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도는 '사람'에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 '독재'와 '왕정'에 대한 쉬운 비판 지점이다. 시스템은 그 안에서 정화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한다는 '진리'에 가까운 역사적 사실이다. 괜찮은 전제정은 시간에 따른 확률의 문제로, 존속하기 어렵다. 때문에 올바름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해야 하며, 그 반경은 지금의 평평한 세계에서는 전 지구 단위로 벌어져야 한다. 


제도는 부패할 수 있다. 불완전한 사람이 만든 것이 완전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때문에 제도는 끊임없이 '진보' 해야 하며, 그 속도는 '좌파'와 '우파'의 권력 다툼 속에서 결정된다. 중국에서는 이 과정이 '만리방벽' 속에서 '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일어나고 있으며, 외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음에 드는 것에 대해서는 용인할 수 있지만 아닌 것에 대해서는 벽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비토'하고 있다.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 은 먼 미래 인류의, 꽤 괜찮은 전제정과, 부패한 민주정의 체제 대결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중 '양 웬리'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군인으로, 체제의 '무력 다툼'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순간에 '민주주의에 의해 선택된 무능한 정치가'로 묘사되는 인물의 명령에 복종하여, 전투의 승리를 전쟁의 승리로 바꾸지 못한다. 


마법사 양, 기적의 양 이라고 불리는 <은하영웅전설> 의 '양 웬리'의 생각


(은하영웅전설을 본 사람을 위한 주석: 물론, 이 경우 양 웬리의 모국의 수도의 정치인들과 시민들의 다수가 혼란에 빠진 제국인에게 사살당할 위험이 있었으며, 여전히 제국의 전력은 동맹의 그것을 크게 상회하며, 로엔그람 밑의 용장들이 그대로 무너졌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이 결정이 단순히 민주주의의 명령을 따르는 민주 사회의 군인의 모습만 그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작중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빼놓고 이야기하고 있어서 무시하기로 한다.)


중국의 지금의 성공은 공산당의 독재를 정당화하는가? 비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의 공으로 나머지 과를 모두 덮을 수 있을까로 질문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위'의 문제는 '정체성' 만큼이나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결론짓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하면 질문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만리방벽'과 '당'의 울타리 속에서 '쿵푸팬더 문제'는 해결될 것인가? 마찬가지로 비겁하게 질문을 바꾸게 된다면, 현 정부의 후신이 당선이 되었을 때, 현 정부의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의 지금의 성공은 무엇 때문일까. 조 스터드웰이 <아시아의 힘>에서 밝힌 것과 같은 것일까? 사실 어쩌면 그것은 나라의 힘을 집중할 수 있는 강려한 '민족주의'가 아니었을까 의심해 본다, 중국의 성공의 규모는 13억의 인구, 드넓은 영토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성장 엔진의 동력은 개인의 피를 요구하는 '민족주의적 전제정치'가 아니었을까. 


지금 중국에서 보이는 모습은, 다른 나라와 많이 다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미 '비공산권' 국가와 다를 것 없다. 상자는 열렸다. '흑묘백묘'론에 따라 쥐는 잡아 왔다. 하지만 애초에 두 고양이가 아닌, '민족주의'라는 호랑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양이도 이미 그 호랑이에게 잡혀먹지 않았을까, 따라서 '공산주의 유령'은 정말로 유령이고, '마오이즘'은 중국의 신화적 전통에 따라 신격화된 또 하나의 '관제묘'를 이룩할 뿐이며 진짜 중국 사회를 떠도는 유령은 '민족주의' 그리고 '중화주의' 가 아닐까 의심해본다. 마오쩌둥의 그림자 아래 이룬 경제발전 아래에는 배타적 민족주의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마무리 - we're pretty much fxxked.


중국은 잘 되어야 한다. 그 안에는 인류의 1/5 가량이 살고 있다. 또한, 그 덩어리의 움직임은 세계를 움직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의 단일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 창고를 통해 나온 '비토'는 정말로,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세운 방벽 속에서, 서구권의 문물과 자금을 흡수하면서 - 결론적으로 중국은 달러 패권 위에 쌓은 미국의 Pax Americana 에 무임승차한 것이라는 의견을, 자료를 조사하다가 보았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핑퐁외교' 이전까지에 중국의 방벽에 달린 문은 너무나 작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어쨌든 '중국' 은 우리 모두가 탑승한 배 위에 타 올랐다. 그 무게 때문에 배가 가라앉을까 걱정이 많지만, 그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우리는 멀리 왔다. 우리는 '중국' 없이 더 나갈 수 없도록 우리를 바꿔버렸다. 세계질서에 중국이 빚진 것이 있는 것만큼 세계는 중국에게 경제적 빚을 지고 말았다. 


때문에 중국의 실패는 - 트럼프가 아무리 높은 성벽을 쌓는다고 해도 - 세계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그러지 않기 위해서 계속 중국의 독재를 인정해야 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 '당위'는 모두가 고민해야 하지만, '결정' 할 사람들은 그 안의 '인민'이다. '인권'의 문제도 우리는 권고할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방벽 속의 갈라파고스가 완전히 우리와 동화되기 전에 섣부른 움직임은 가능성의 확장이 아닌 파멸을 빚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앤디 위어의 <마션>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아직까지는 제일 기억에 남는, '첫 문장' 

<마션>의 주인공처럼, 우리가 '화성'에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1/5를 갈라파고스에서 꺼내는 일은 정말이지 지난하고, 힘들고, 돈도 많이 들고 - 결정적으로 갈라파고스 안의 존재에 사실상 그 결과가 달려 있는 일일 것이다. 


<야망의 시대>에서 말하길, 중국에는 '2030년까지 도시의 최하층민의 숫자는 전체 도시 인구의 절반인 5억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한다. 5억은, '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 잘 되었으면 좋겠고, 그들이 '중국인'을 벗어나 '세계시민'이 되면 정말 좋겠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생각은 남지만 말이다.


그래서 <야망의 시대>의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그들의 삶 역시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형이다.

구매: 2017.01.23

완독: 2017.02.01

초고: 2017.02.11

#트레바리 #1701시즌 #쯍쯍 #야망의시대 #에번오스노스 #야망하면 #진산월 #군림천하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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