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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로 가는 길

365 Proejct (272/365)

by Jamin


AGI로 가는 길: 정상을 향한 등반인가, 능선을 따르는 종주인가


인공지능의 진화를 논할 때 우리는 종종 단일한 목적지를 상정한다. AGI(범용인공지능)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지점은 마치 모든 지적 능력이 수렴하는 특이점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가 과연 기술 진화의 실제 경로를 반영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가 그러했듯, 기술의 진화 역시 예측 불가능한 분기와 우회, 그리고 예상치 못한 창발을 통해 전개될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AGI가 단일한 실체로서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전문화된 지능들의 네트워크로부터 '창발'할 것이라는 사변적 가설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여정은 순수한 기술의 자동적 발전이 아니라, 인간 전문가의 설계와 실용적 요구, 그리고 경제적 현실 속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질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1. 프레임워크: 섹터 AI와 네트워크 지능의 출현


가설의 출발점은 '섹터 AI(Sector AI)'라는 개념이다. 섹터 AI란 특정 산업 도메인(리테일, 헬스케어, 금융 등) 내에서 준-범용적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시스템을 의미한다. 각 산업의 전체 가치사슬을 이해하고 최적화할 수 있는 도메인 전문가로서의 AI다.


이러한 섹터 AI들이 충분히 성숙하면,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개별 AI의 능력을 초월하는 집합적 지능을 낳을 수 있다. 리테일 AI가 예측한 수요 패턴은 물류 AI의 최적 경로 계산으로 이어지고, 이는 금융 AI의 리스크 평가 및 자금 조달과 실시간으로 연동된다. 개별 뉴런의 전기화학적 신호가 의식이라는 거시적 현상을 만들어내듯, 개별 섹터 AI들의 상호작용이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우리가 AGI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다.


2. 현실의 제약 I: 상호운용성과 '도메인 아키텍트'의 부상


하지만 이 창발의 과정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각기 다른 데이터 표준과 규제, 이해관계를 가진 섹터 AI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이 '바벨탑 문제'는 순수한 기술적 해결책만으로 풀 수 없다. 특히 금융이나 의료처럼 사소한 오류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미션 크리티컬'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메인 아키텍트(Domain Architect)' 라는 인간 전문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전통적인 시스템 통합(SI) 전문가처럼, 이들은 AI와 AI, AI와 인간, AI와 규제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설계하고 전체 시스템의 비즈니스 로직을 구축한다. AI가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조수 역할을 한다면, 도메인 아키텍트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지휘자가 된다. 결국 섹터 AI 네트워크는 완전 자동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고도로 숙련된 인간 전문가와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구축되는 인간-기계 하이브리드 지성이다.


3. 현실의 제약 II: 중앙화의 필연성과 하이브리드 모델


분산된 네트워크라는 이상과 달리, 현실의 기술은 효율성과 자원의 제약을 받는다. 현재 AI 모델에 필요한 막대한 계산 자원은 필연적으로 중앙화의 압력을 만들어낸다. 인터넷이 분산된 기술로 시작해 소수의 빅테크 기업으로 힘이 집중된 것처럼, 섹터 AI 네트워크 역시 이들을 연결하고 구동하는 소수의 '메타 플랫폼'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미래의 모습은 순수한 분산형이 아닌, 중앙화-분산화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모델이 될 것이다. 즉, 전문 지식과 데이터는 각 섹터에 분산되어 있지만, 이들을 연결하는 인프라와 컴퓨팅 자원은 중앙화된 플랫폼에 의존하는 형태다. 이 플랫폼을 누가 통제하느냐의 문제가 새로운 기술 지정학(Techno-Geopolitics)의 핵심이 될 것이다.


4. AGI의 재정의: '인공 인간'이 아닌 '기능적 지능'


이러한 경로를 통해 창발한 AGI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공지능'과 '인공인간'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네트워크는 자아나 고유한 목적의식, 즉 '꿈'을 가진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목표를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효율성으로 수행하는 거대한 기능적 시스템에 가깝다.


여기서 인간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 드러난다. 이 강력한 시스템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방향과 목적, 즉 '왜(Why)'라는 질문을 던지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 AI가 '어떻게(How)'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인간은 '왜'의 영역을 탐구하는 존재로 AI와의 공생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사용자 관점에서 AGI는 거대한 단일 지능이 아니라, '개인 섹터 AI' 라는 대리인을 통해 이 네트워크의 힘을 빌려 쓰는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나의 글쓰기 AI, 재무 관리 AI가 필요할 때마다 전 세계의 전문 AI 네트워크에 접속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체감하게 될 실용적인 AGI의 모습일지 모른다.


결론: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결국 이 사변적 탐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AGI로의 여정이 단일한 정상을 향한 등반이 아니라 다양한 전문성의 봉우리들을 연결하는 능선을 따라가는 종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도메인 아키텍트로서 시스템을 설계하고, 사용자로서 개인 AI를 통해 그 힘을 활용하며, 궁극적으로는 이 거대한 기능적 지능에게 '꿈'을 부여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는 질문을 바꾼다. "언제 AGI가 발명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이 창발하는 집합적 지성을 어떻게 책임감 있게 설계하고 조율해 나갈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었던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종착점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의 지평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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