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치기의 저주를 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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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내 글을 이어 쓰기 006: 간격 효과 를 이어서 쓰다.



벼락치기의 저주를 끊는 법기록하고, 잊고, 다시 만나라


벼락치기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시험 전날 밤 샤프를 새로 꺼내고, 형광펜으로 책을 도배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번만 잘 넘기자. 다음부터는 진짜 미리미리 하자.”


시험이 끝나면 머릿속은 기분 좋게 비워지고, 전날 밤에 억지로 끼워 넣었던 정보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이상한 건, 이게 단 한 번의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패턴을 수십 번 반복하면서도, 그때마다 “내가 게을러서 그렇지”라고 자책하며 넘어간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진다. 스프린트 마지막 날에 티켓이 한꺼번에 닫힌다. 분기 말에야 OKR 회고 문서가 쏟아진다. 중요한 발표 전날에야 Notion 문서와 슬랙 스레드들을 밤새 뒤진다. 그리고 발표가 끝나면, 그때 쌓았던 이해와 통찰은 다시 흩어진다.


제품은 계속 굴러가지만, 그 제품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력”은 그만큼 누적되지 않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요즘 너무 바빠서”, “이번 분기가 유난이라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조금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정말 시간을 적게 쓴 걸까, 아니면 시간을 쓰는 간격을 잘못 설계한 것일까.


간격 효과(Spacing Effect)는 여기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같은 내용을 다섯 번 본다고 해서 다섯 번 다 남는 게 아니다. 하루에 다섯 번 몰아서 보는 것과, 일주일 동안 다섯 번 나눠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든다.


기억과 실력은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여러 번, 적당한 간격을 두고 다시 꺼내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 번에 몰아서 이해하는 능력보다, 일정한 간격으로 다시 생각하고 다시 보는 습관이 훨씬 중요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벼락치기는 “의지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 실패”에 가깝다. 우리는 늘 긴급한 것에 끌린다. 시험 날짜, 마감일, 릴리즈 데이 같은 고정된 데드라인은 강력한 자석처럼 우리의 시간을 빨아들인다. 그 사이에 있어야 할 작은 간격들, 짧은 복습, 가벼운 정리, 짧은 회고는 늘 밀려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같은 문제를 다시 설명하고, 같은 실수를 다른 포장지에 싸서 반복한다.


이걸 좀 더 실감 나게 만들기 위해, PM 두 명을 떠올려 보자. 이름을 A와 B라고 하자.


A는 벼락치기형 PM이다. 새 프로젝트 킥오프가 잡히면, 전날 저녁에 관련 문서를 몰아서 읽는다. 슬랙 채널, 예전 회의록, 경쟁사 리서치… 링크를 연 달 수만큼 탭이 열린다. 킥오프 회의에서는 그럭저럭 잘 이야기한다. 그날 새로 얻은 정보와 전날 흡수한 내용을 한 번에 섞어서 회의실에 쏟아낸다. 그런데 두 주쯤 지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같은 주제를 다시 논의할 때, 또다시 문서를 처음 보는 것처럼 읽어야 한다. “우리가 그때 뭐라고 합의했더라?”라는 질문이 습관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B는 간격형 PM이다. 킥오프가 잡히면, 일주일 전부터 하루 20~30분씩 관련 문서를 쪼개서 읽는다. 읽을 때마다 “이 문서의 핵심이 뭐지?”를 한 줄로 적어 둔다. 다음 날 그 한 줄을 다시 보면서 살짝만 수정한다. 킥오프 전날에는 새로운 걸 더 넣기보다, 그동안 쌓인 한 줄 요약들을 한 번에 훑어본다. 회의 안건과 결정 포인트는 이미 머릿속에서 여러 번 재호출된 상태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도, 그때의 논의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새로운 정보를 올려도, 붙일 수 있는 뼈대가 있다.


두 사람의 노력 총량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저녁에 일을 하기도 하고, 둘 다 “바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A는 매번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같은 문제 앞에서 허둥대고, B는 점점 더 “이 문제를 오래 관찰해 온 사람”처럼 말하게 된다. 둘의 차이는 재능이 아니라, 간격을 의식하고 설계하느냐 아니냐에서 시작된다.


간격 효과는 개인의 업무를 넘어 조직의 학습 장치, 즉 '회고' 에서도 결정적인 차이를 만든다.


우리가 회고를 해도 잘 안 바뀌는 이유 중 하나는, 회고를 "기억하기 위한 숙제" 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격 효과의 관점에서 보면, 기록의 진짜 목적은 역설적이게도 "안심하고 잊어버리기 위함"이다.


우리 뇌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지난주의 실수와 이번 주의 다짐을 머릿속에 계속 이고 지고 있으면, 정작 오늘 해야 할 판단을 내릴 공간이 부족해진다. 불안해서 붙잡고 있는 정보는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과부하시킬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쓴다.


글로 적어두는 행위는 뇌에게 보내는 "이제 여기는 안전하니, 너는 이만 짐을 내려놓고 쉬어도 좋아"라는 신호다. 잘 쓰인 회고는 그 시점의 치열했던 맥락을 종이 위에 봉인하고, 우리를 중압감에서 해방시킨다.


하지만 안심하고 잊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내가 잊고 있어도, 때가 되면 이 기록이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많은 조직의 회고가 실패하는 이유는 기록이 '무덤'으로 가기 때문이다.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다시는 보지 않을 문서가 된다는 걸 알기에, 뇌는 불안해서 그 기억을 놓지 못하거나, 아예 휘발시켜 버린다. 좋은 회고 시스템은 무덤이 아니라 '부메랑'이어야 한다. 주간 회고에 적은 한 줄이 어딘가 폴더 깊숙이 처박히는 게 아니라, 다음 주 월요일 아침 회의 테이블 위에 가장 먼저 올라와 있어야 한다.


"지난주에 우리가 이걸 고치기로 했었지?"라고 시스템이 먼저 말을 걸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기억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쓴 글을 낯설게 바라보는 그 순간, 바로 그 틈에서 객관적인 '메타인지'가 싹튼다.


이것이 바로 회고의 프랙탈(Fractal) 구조다. 주간 회고에서 발견된 작은 문제들이 월간 회고의 재료가 되고, 월간 회고의 흐름이 분기 회고의 뼈대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재호출될 때, 연말 회고는 단순한 위로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의 “정리된 서사”가 된다. 조직은 시간이 갈수록 “같은 실수를 덜 하는 팀”이 된다. 이것은 의사소통의 기적 때문이 아니라, 잊어버렸던 기록이 적절한 간격을 두고 다시 돌아오는 시스템 덕분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정신없이 지나갔지?”라고 생각한다. 그때 10분만 시간을 내서 오늘 있었던 일 중 딱 한 장면만 골라서 적어보는 것도 좋은 시작이다. 오늘 내가 한 결정 중 가장 잘했다고 느끼는 하나, 가장 아쉬운 하나를 적어본다. 그리고 잊어버려라. 대신 일주일 뒤, 그 일곱 개의 기록을 한 번에 훑어보는 규칙만 지키면 된다.


그러면 하루 단위로는 보이지 않던 패턴이 보인다. “나는 피곤하면 항상 같은 종류의 실수를 하네.” “이 사람과의 미팅은 할 때마다 나를 소모시키네.” 이런 통찰은 하루는 말해주지 못하고, 간격을 둔 일주일이 말해준다.


결국 간격 효과는 뇌과학에서 출발했지만, 일과 삶에 적용하면 이런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꽉 붙잡고 있어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기록해 두고 과감히 잊은 뒤 다시 만남으로써 성장한다.


벼락치기 공부가 시험이 끝나면 사라지듯, 벼락치기 기획, 벼락치기 회고도 시간 앞에서는 쉽게 지워진다. 반대로, 적당히 잊혀질 때쯤 다시 꺼내 보는 메모, 일주일에 한 번 나를 찾아오는 회고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제부터 벼락치기를 하지 말자”라는 다짐보다 더 현실적인 목표는 이것일지 모른다. 어떤 것들은 일부러 잊혀지게 두고, 다시 꺼내 볼 간격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는 것.


오늘도 할 일은 많겠지만, 하루의 끝이나 한 주의 끝에 딱 한 번만 물어보자. “오늘의 나, 이번 주의 우리에게서 나중에 다시 꺼내 보고 싶은 한 줄은 무엇일까?”


그 한 줄을 적어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자. 적당한 때에 그 문장이 다시 당신을 찾아와 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당신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답을 가지고 그 문장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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