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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을 이어 쓰기 007: 유토피아는 한낱 꿈에 불과한가 를 이어 쓰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시나요? 갈등 없는 평화로운 공동체, 혹은 모든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는 풍요로운 미래일지도 모릅니다.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의 열망을 상징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은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1516년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통해 완벽한 사회를 묘사했을 때, 그는 짓궂게도 두 가지 의미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리스어 "우-토피아(없는 장소)"와 "유-토피아(좋은 장소)"의 이중적 의미는 태생적인 모순을 내포합니다. 어쩌면 이 단어의 탄생 순간부터, 우리는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가야만 하는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릅니다.
유토피아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암시하며,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상대적입니다.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가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억압이 될 수 있듯, 기술 중심의 유토피아는 인간성을 잃을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완벽한 유토피아는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은 늘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 애썼습니다. 19세기 뉴하머니와 같은 유토피아 사회주의 공동체나 셰이커 교도와 같은 종교적 집단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획일적 규범에 가두려다 내부 갈등과 현실적 제약으로 붕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완벽한 세상을 꿈꿨던 순간들은 종종 악몽으로 끝이 났습니다. 20세기에 일어난 더 큰 비극이 이를 증명합니다.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 체제는 유토피아 건설을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했고, '완벽한 사회'를 위해 불순물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결국 디스토피아를 초래했습니다.
모든 이가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거대 실험들은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폭력으로 얼룩졌고, 우리는 "지상낙원을 만들려는 시도가 늘 지옥을 만들어냈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완벽함에 대한 강박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는 유토피아의 꿈을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유토피아는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했습니다. 과거의 유토피아가 '모두를 위한 하나의 사회'를 꿈꿨다면, 현대의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개인에게 최적화된 파편화된 유토피아'를 제공합니다.
알고리즘적 고립: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광장이 아닌,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 속에 안전하게 머뭅니다.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알고리즘은 개인이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을 형성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 내가 보고 싶은 세상만 보여주는 알고리즘은 안락합니다.
하지만 이 완벽한 편안함은 때로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개인에게는 안락한 천국일지 모르나, 사회 전체로는 소통이 단절되고 확증 편향이 강화되는 고립된 섬들의 집합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타인과 부딪히며 생기는 소음이 사라진 세상, 그것은 어쩌면 유토피아가 아니라 매끈한 벽으로 둘러싸인 독방일지도 모릅니다.
편리함과 통제의 교환: 기술은 질병과 빈곤을 해결할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그 대가로 개인의 데이터가 감시되고 통제되는 '디지털 판옵티콘'의 우려 또한 낳고 있습니다. 디지털 격차나 윤리적 문제는 새로운 도전으로 대두됩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유토피아 없는 세계는 사상누각"이라며, 유토피아를 현실 안주를 거부하는 비판적 사유의 도구로 보았습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을 넘어서는 희망으로, 구체적 실현보다 정신적 저항으로 기능합니다.
리처드 로티는 유토피아를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닌, 희망의 사회를 그리기 위한 실용적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되, 그 한계를 인정하라"는 그의 제안은 점진적 개혁을 통해 불완전하지만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합니다.
실제로 유토피아적 사고는 현실 비판과 개선의 토대가 되어 왔습니다. 복지 제도, 인권 개념, 환경 보호 등은 모두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전환하려 했고,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을 통해 공정한 사회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유토피아의 꿈은 기술 발전을 촉진하지만, 동시에 경계도 요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어디에 유토피아가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현대의 복잡성과 기술적 부작용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미래학자 케빈 켈리가 제안한 '프로토피아(Protopia)'라는 낯선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정으로서의 발전: 프로토피아는 화려한 낙원이 아닙니다. '완벽한 상태(State)'가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과정(Process)'을 의미합니다. 유토피아가 현실에 없는 허상이라면, 프로토피아는 매일 1%의 개선을 통해 점진적으로 만들어가는 현실입니다. 그저 '어제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오늘'을 의미합니다.
역동적 적응: 이는 단 한 번의 혁명으로 완성되는 사회가 아닙니다. 기술적 부작용이 생기면 수정하고,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며 끊임없이 '생성(Becoming)'되어가는 역동적인 사회 모델입니다. 낡은 것을 고치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지평선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지평선이 있기에 우리는 걷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유토피아는 인간 정신의 필수적인 나침반입니다. 멀리 있는 지평선은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지만, 그 지평선이 있기에 우리는 계속 걸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착이 아니라, 걷기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완벽한 세상'이라는 박제된 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알고리즘이 주는 안락한 환상에 갇히지 않고, 타인과 연대하며 매일의 현실을 조금씩 고쳐 나가는 '프로토피아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진정한 유토피아는 명사(Place)가 아니라 동사(Action)일지 모릅니다. 유토피아는 '도착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갈등이 있고, 균열이 있어도 좋습니다.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우리가 나누는 대화와 작은 실천들이야말로,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현실로 불러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한낱 꿈"이 아니라, 꿈을 통해 현실을 재창조하는 역동적 과정입니다. 유토피아적 이상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며, 그 빛에 의존해 우리는 어둠을 걸어갑니다.
완벽함을 포기하지 않되,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유연함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흔들리며 나아가는 존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