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051/365)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46: 아이디어는 싸다, 실행은 더 싸다 를 읽고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47: AI 가 SaaS 를 붕괴시킨다, 뉴욕 증시, 클로드 효과에 붕괴 를 읽고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48: 두 종류의 AI 사용자 를 읽고
GeekNews에서 흥미로운 글을 하나 읽었다. AI 사용자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단순히 프롬프트를 잘 쓰냐 못 쓰냐의 차이가 아니다. 본질은 '권한'과 '신뢰'의 격차다.
한쪽은 AI를 그저 검색 엔진의 확장판으로 쓴다. "오늘 점심 메뉴 추천해 줘", "이 기사 요약해 줘" 수준이다. AI는 말 잘 듣는 앵무새에 불과하다.
반면 다른 한쪽은 터미널을 열고 AI에게 시스템 권한을 쥐여준다. "이 폴더의 로그 파일을 분석해서, 에러 패턴을 찾고, 슬랙으로 리포트 보내." AI는 손발이 달린 유능한 직원이 된다.
흥미로운 건 이 격차가 개인을 넘어 기업 단위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대기업은 보안과 레거시 시스템 때문에 AI 도입이 더디다. 반면, 작은 팀은 잃을 게 없으니 AI를 비즈니스 프로세스 깊숙이 침투시킨다.
이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은 하나다. 어쩌면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 제품이나 시장이 아니라, 기업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사업 방식(Operating Model)' 그 자체에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제학자 로널드 코스(Ronald Coase)는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를 '거래 비용(Transaction Cost)'으로 설명했다. 시장에서 매번 사람을 구하고, 계약하고, 감독하는 비용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은 내부 직원을 고용하고, 관리자를 두고,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그 시스템이 품질을 보장하고 리스크를 줄여줬다.
그런데 AI 시대가 오니 이 논리가 뒤집힌다. AI 에이전트는 거래 비용을 0에 수렴하게 만든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 회의하고, 조율하고, 보고하던 일을 작은 팀이, 심지어 혼자서 해낸다. 소통 비용은 사라지고 실행 속도는 빛의 속도가 된다.
이 상황에서 대기업의 그 견고한 자산들—복잡한 보고 체계, 부서 간 장벽(Silo), 엄격한 품의 시스템—은 더 이상 안전장치가 아니다. 이제 그것들은 조직을 지키는 자산이 아니라, 혁신의 발목을 잡는 무거운 부채(Liability)가 되어버렸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오늘의 발목을 잡는다.
현장의 풍경은 더 기이하다. 대기업 개발자나 기획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사내망에서는 보안을 이유로 챗GPT 접속조차 막혀 있다. Copilot을 도입한다고 하지만, 기능이 제한된 '반쪽짜리'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직원들이 개인 아이패드를 들고 와서 테더링을 켜고, 업무 데이터를 복사해서 몰래 AI에게 넘긴다. 이른바 'Shadow AI'다. 역설적이게도, 보안을 위해 세운 통제 시스템이 오히려 내부 데이터를 가장 취약한 경로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반면 작은 팀은 야생마 같다. 지켜야 할 레거시(Legacy)가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 API를 열고, DB 접근 권한을 주고, AI가 실서버를 건드리게 둔다.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이 속도 차이가 하루, 한 달, 일 년 누적되면 어떻게 될까? 대기업이 결재판 들고 뛰어다닐 때, 작은 기업은 이미 시장 검증을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제약 없는 작은 기업이 무조건 승리할까? 글쎄,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고민이 깊어진다.
확실히 AI 덕분에 '결과물(Output)'은 많아졌다. 그리고 빨라졌다. 30년 된 30개 시트짜리 복잡한 엑셀 재무 모델을 AI에게 던져주면 순식간에 파이썬 코드로 변환해 준다. 예전 같으면 개발팀과 재무팀이 붙어 몇 달 걸릴 일이다.
하지만 그 산출물이 곧장 '성과(Outcome)'로 이어지는지는 의문이다. 과거에는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고 했다. 지금은 다르다. "쓰레기를 넣으면 빛의 속도로 그럴듯한 쓰레기가 나온다."
더 무서운 건 '침묵하는 오류(Silent Failure)'다. 코드는 돌아간다. 에러 메시지도 없다. 겉보기엔 완벽하다. 하지만 30년 묵은 엑셀 수식 속에 숨겨진 미세한 예외 처리, 김 부장님 머릿속에만 있던 암묵지가 코드에 반영되지 않았다면?
그 모델이 회사의 현금 흐름을 미묘하게 잘못 예측한다면, 그리고 그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속도는 빨라졌지만, 브레이크 고장 난 스포츠카를 타고 안개 낀 절벽 길을 질주하는 것과 같다. 빠르긴 한데,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생성(Creation)'의 시대를 지나 '검증(Audit)'의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대기업은 구조적 한계 때문에 AI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도태될 위기다. 반면 빠른 팀들은 검증되지 않은 Output에 취해 자멸할 위험이 있다.
결국 살아남는 건 맹목적으로 속도전을 펼치는 쪽이 아닐 것이다. 쏟아지는 Output 중에서 진짜 가치 있는 Outcome을 걸러내는 '편집장'의 눈을 가진 쪽이다. 이제 실무자의 핵심 역량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의심하고, 뜯어보고, 비즈니스의 본질과 연결하는 능력이다. 단순히 코드를 짜는 '코더(Coder)'보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의 맥락과 정합성을 판단하는 '아키텍트(Architect)'와 '감사(Audit)'의 역량이 훨씬 더 귀해진다.
AI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이 도구가 너무 강력해서, 우리가 일하던 방식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Output의 양에 취하지 말고, Outcome의 질을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변화의 파도는 이미 들이닥쳤다. 이제는 그 파도에 휩쓸려갈 것인가, 아니면 그 위에 올라탈 것인가를 냉정하게 결정해야 할 때다.